10월 19일 - 2020년 가을

한 때 디저트를 기록하고 또 이야기하기 위해 열심히 찾았지만 근래 완전히 손을 놓았다. 디저트로 글을 쓰는 일이 무용해졌기 때문이다. 애당초 투고 한정의 각종 "클래스"의 제품들은 여기서 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데, 이제는 서울의 디저트 가게들도 다 그런 곳들로 변해버렸다. 나날이 늘어가는 줄도 줄이지만 각 업장들이 여름과 겨울을 두루 거친 시간이 늘어나며 특별히 말을 붙일 거리가 내게는 많이 보이지 않은 탓도 있다. 물론 쓰자면 언제나 할 말이야 많다. 다만 나는 항상 이 글이 가이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여러분의 경험을 통해 다시 체화되고, 공감을 사거나 반감을 사거나 하는 방향으로 반사되기를 바라므로, 콜라보니 한정판이니, 어떤 이름에서간에, 보통의 도시사람이 접할 수 없는 맛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한 시간여 이상의 줄이 늘어선 상황은 그 자체로, 줄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을 일시적인 자격의 회원Member pro tempore 처럼 대하게 된다. 이는 비단 요리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지만, 그다지 그런 경험의 복제생산을 바라지도 않으므로 말을 아끼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월 19일>이 이전한 소식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세이버리 푸드를 포함한 디저트를 하고 음료또한 눈에 띈다. 스스로를 코스 디저트, Sweet, Savoury, Pairing이라는 단어들의 나열로 설명하고 있는데, 과연 현재 이 문화권에서 디저트란 무엇인가. 나는 그 답을 찾아야 했다. 과연 이것은 조엘 로부숑과 고 미요의 누벨 퀴진, 페란 아드리아의 테크노 이모셔널 퀴진을 뜻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

방문 전

문자메시지와 전화를 통한 예약이 가능하며, 수기로 관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약 2주간의 간격을 둔 날짜에 예약했는데, 확인 문자와 예약일 이전 한 번의 확인 전화를 통한 확정 절차가 있었다. 별도의 예치금 제도를 운용하고 있지 않다.

요리

10월 19일의 요리는 오로되브르 개념의 한 입 요리와 "첫째-둘쩨-셋째"의 디저트, 쁘띠 푸르로 구성되어 있다.

착즙한 레몬에이드와 자몽폼 / Lemonade

와인 리스트가 레스토랑의 얼굴이라는 점을 결코 부정하지 않지만, 나는 직접 만드는 음료가 있다면 적어도 이 도시에서는 그것이 더욱 주목받을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음료는 또 다른 요리의 한 축이다. 칵테일부터 주스, 차까지 하나의 요리이고 하나의 주제의식이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어느 하나 아름답게 꽃피운 게 있는가. 그 뿌리, 아니 씨앗을 찾아야 한다. 레몬에이드 위에 거품으로 붙잡아낸 자몽은 그런 선택이었다.

두꺼운 단맛이 이 음료의 위치를 먼저 흐리게 했다. 단 맛의 세계(sweet world)가 본인들의 요리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아닌가, 음료마저 이리 달다니. 과연 이것은 어떤 의도일까. 관성은 아닌가. 레몬에이드에 자몽이나 요거트와 같은 것을 폼으로 올리는 것이 단순한 기술의 과시여서는 안된다. 이유 없는 가르니튀르, 먹는 것 이외의 것을 이유로 하는 가르니튀르의 자리는 적어도 현대 요리를 표방하는 주방에는 없다. 차라리 미쉐린 가이드의 환심을 목표로 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런 점에서 이 요리의 거품은 합리적인 시각에서 해석되어야 한다-자몽은 같은 시트러스지만 레몬이 가지지 못한 쓴맛을 불어넣어준다. 앞서 쓴맛과 자몽의 향을 맛보면 레몬의 더욱 강렬하고 풍성한 신맛이 입안을 정리하리라. 나의 기대였다. 실행은? 자몽도 레몬도 단맛이었다. 선명하게도 두터워서 신맛을 지울 정도의 단맛이었다.

과거에는 레모네이드를 사입해서 내지 않았는가? 과연 작금 우리의 상황에서 이 착즙한 레모네이드, 그것도 단맛이 썩 지배적인 레모네이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생스러운 것이 곧 주방의 결과물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당황스러운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 제주도의 레몬을 사용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레몬인지 그 개성을 밝힐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폼은 자몽의 쓴맛을 피해서 만든 모습이었다.

스낵오이, 요거트, 청포도겔 / pickled cucumber, yogurt

첫째 요리는 스낵오이였다. 요거트의 신맛과 청포도의, 무스카텔이라는 이름의 주인다운 향을 얹어냈다. 과연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지점은 오이다. 나는 그들의 이러한 실행에 주목한다-적어도 전통적인 디저트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보통 음식(savory food-과연 이 말에 대한 적합한 우리말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의 재료들이 디저트에 도전해오고 경계는 흐릿해진다. 특히 이러한 야채의 귀중함을 밝힐 수 없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한 측면에서, 스낵 오이는 무엇인가. 사실 이런 표현은 굉장히 불투명한 표현으로, 스낵오이라고 불리는 종자가 국내에 있기는 하지만 과연 먹는 이들에게는 설명된 적이 없다. 크기를 보니 전형적인 다다기나 가시와 같은 구분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고, 오히려 서구에서 피클로 쓰는 게르킨에 가까운 크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매끈한 표면은 게르킨이 아님을 단번에 알게 해준다. 시중에서 이른바 스낵오이로 불리는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길 없으나, 다양한 오이의 변종들은 유전적으로는 큰 차이가 보고되지 않았으므로 일단은 같은 오이의 선에서 맛을 본다.

날 오이의 압도적인 수분이 나를 맞이하기 전, 요거트와 젤이 입을 적신다. 오이가 갈라지는 순간은 그 다음이다. 날것의 단단함이 있기 때문이다. 달큰한 오이즙은 특유의 청명하고 차가운 감각이 크지 않은 대신 청포도향이 전체적인 감각을 지배했다. 오이의 쓴맛은 완전히 쫓겨났다. 요거트가 미약한 단맛을 붙잡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과연 이것이 현대적인 디저트의 전형적인 흐름인가에 대해서는 재고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식사의 후식으로 구성된 코스가 아닌데, 물론 디저트의 세계는 단 맛의 세계이다. 그러나 단 맛 이외의 모두를 죽인다면 굳이 이런 세계가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카카오의 쓴맛이 현대에 부활해 전세계에 보급된지도 50년을 바라보고 있다. 샤인 머스캣의 이름에 기대지 않는데 만족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이는 총체적인 경험을 어그러뜨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초대된 손님은 아니었다. 단순하게 작은 쿠키 반죽이어도 큰 그림은 변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레몬버베나 그라니타, 망고 샐러드, 타이st 아이스 / Aerated Thai Milk, Green Mango, Green Granita

본격적인 여정은 아이스크림의 연타로 시작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개별 요리에 대해서 미분된 글에서는 다루기 적합하지 아니하므로 후술하겠다. 어쨌거나 가장 처음은 대안 유제품의 일종인 코코넛 밀크에 도전한 점은 긍정적으로 본다. 다만 지금 이 모습이 스스로의 의도인가. 이후 두 아이스크림과 반드시 비교해 보시라. 요리사의 숟가락은 여러번 물통과 아이스크림통을 오간다. 아이스크림이 최적의 상태가 아닐지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한다. 거기에 향신료인 타이 바질의 향까지 내겠다니 성공만 한다면 이것은 서울에서 감히 디저트 역사의 획을 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이스크림은 꿈에 머무른다. 우유와 비교해 이런 대안 유제품은 지방의 양과 질 모두 다르다. 나쁘지는 않지만 전통적인 방법만을 사용한다면 엉망이 되고 만다. 우유를 압도하는 지방을 지닌 코코넛 밀크도 있고, 그런 것들을 째로 이용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른다. 높은 지방은 부담스러울 지언정 위대한 아이스크림을 만드니까. 이것은 어느 방향으로도 향하지 못한 질감이었다. 서걱거리는 최악의 결과는 피했지만 점성이 없는 수준으로 코코넛의 향 또한 옅어졌으니 어떤 방식으로 침출했을지 모르겠는 허브 또한 곧 잊혔다. 열심히 건져올린 아이스크림이 무색했다. 켜켜이 뿌려진 허브와 무려 그린 망고까지. 꿈으로 가득찼지만 지독한 현실밖에는 남지 않았다.

귤 소르베, 허브크림소스, 사과, 단감, 샬롯 피클 / Mandarin sorbet, pickled shallot, apples, persimmon, cream sauce, apple gel

대안 유제품을 이용한 아이스크림 이후에는 다행히도 올바른 형태로 자세를 고쳐잡은 소르베였다. 뒥셀을 연상케 하는 사과와 단감이 매개체vehicle 역할을 하려는 양 바닥에 자세를 잡았다.

흐름에 대한 이야기는 후술하기로 하고, 또 이 작품만을 미분해서 살펴보자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재료의 선택이었다. 앞서 야채의 새싹은 오이에서 끝나고 과일들이 늘어선다. 명백히 철이 아닌 귤에 감과 사과는 섬유질로 가세했다. 주인공인 귤은 소스와 허브향을 만난다. 여전히 전체적으로 단맛이 지배적인 가운데 각각의 단맛이 서로 겹친다. 단맛으로만 층층이 쌓인 디저트가 없는게 아니다. 밀푀유와 같은 디저트는 푀유떼도 달고 크렘도 달고 글라사주도 달다. 그러나 그 단맛이 같은가. 반죽과 캐러멜의 단맛, 초콜릿과 설탕이 빚는 단맛, 유지방과 설탕이 빚는 단맛이 제각기 선율을 이룬다. 피클로 절였다는 과일에는 생과로 먹는 것으로 의도된 우리 과일의 옅고도 지루한 단맛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르베 또한 시트러스의 신맛이 아닌, 설탕이 화장품으로 쓰이던 시대를 연상케 하는 납작한 단맛이었다. 소르베가 먼저 녹아들고 과일이 밋밋하게 씹힐 뿐이었다. 전체를 아우르기 위한 크림 소스는 숙성했다는데, 말에 어폐가 있다. 숙성이라 함은 통상 시간으로 하는 조리를 말한다. 미생물을 개입시켜 단백질을 분해하는게 기본이다. 유제품에서 불가능하지 않다. 크렘 프레슈Crème fraîche같은 게 있고 사워크림 또한 익숙하다. 그러나 이 크림 소스가 그랬는가. 보관에 가깝지 않았는가 하는 의견을 남긴다.

매개체의 역할을 과육과 크림으로 해석하고자 한 시도는 높이 산다. 그러나 과연 피클 정도로 이것은 만족되는가? 사각거리지 않는 소르베는 이 도시에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적절하다고는 할 수 없다. 시트러스의 생명인 신맛은 결코 만족스러운 밀도를 지니지 못했는데, 이는 아이스크림 자체의 밀도의 영향도 없다고 할 수 없다. 끄넬을 뜨는 요리사의 손길은 여전히 분주했다. 좋은 아이스크림은 끈적할지는 몰라도 저항해서는 안된다.(우리는 이걸 scoopable이라 한다) 크림 소스와 귤 소르베는 레스토랑의 포트폴리오에서 꽤 긴 시간을 지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연 발걸음이 무겁다.

홈메이드 식빵, 트러플 베샤멜소스, 프로슈토, 바닐라 아이스크림 / Bikini, vanilla ice cream

작은 오븐이 카운터 뒤에서 쉴새없이 돌아가는데, 바로 이 식빵을 굽기 위해서였다. 미리 썰어두어 냉장고에 보관한 식빵을 오븐에 구워준다.

이 빵이 이 코스의 유일한 빵이다. 모든 용어들은 프랑스어로 점철되었다. 비록 넛맥의 향이 거의 나지 않지만 "베샤멜" 소스가 있다. 그렇다면 이 빵의 의미는 여러분이 해석하셔야 한다. 내가 오해하고 있거나, 내가 이상하거나,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닐까.

"크로크무슈"가 아닌 "비키니"로서 프로슈토지만 어쨌거나 짠맛의 범주에서 실패하지 않는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마다가스카르 바닐라의 흥겨운 정취가 느껴지는 전형적인 물건이었다. 이거마저도 제대로 하는 곳이 드문 서울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을 가치가 있다. 트러플의 향과 아이스크림, 빵의 박자가 절묘하게 맞는다.

그러나 과연 이 요리가 스스로, 또 다른 이들에 의하여 자신들을 위치시키고자 하는 차원에 존재하는가. 빵 사이에 햄이랑 아이스크림을 끼워서 파는 문법은 서울에서 길거리 음식으로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주방에서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가장 중대한 지점은 빵이다. 말하자면, 나는 주방에서 이 빵의 껍질을 잘라서 내는 것을 보았다. 곧 나는 물었다. 빵 끝은 왜 자르십니까. 혹시 문제가 있었을까. 그것은 아니고 정해진 포션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게 오븐에서 구워진 겉부분이 잘려나갔다. 여러분은 빵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묻고 싶다. 빵 굽는 이들에게, 빵 먹는 이들에게 묻고싶다.

아, 빵 끝이여. 다음에는 꼭 크루트로 불러주리라.

라즈베리 무스, 비트겔 / Raspberry mousse, beet gel
라즈베리 무스, 비트겔 / Raspberry mousse, beet gel

이 요리의 이름은 Petit four로 메뉴에도 기재되어 있다.
제철을 역행하는 라즈베리는 필요에 의해 사용될 수 있고, 종종 실험적인 빵집에서나 보는 비트의 자리가 있는 것 또한 좋다. 오늘의 요리 중 신맛이 가장 많은 편이어서, 음료보다도 신데, 보통 시다고 말할 단계에는 속하지 않는다.

이렇게 한 식사를 마무리하지 않고, 알라카르트로 추가한 요리가 하나 더 있다.

I'm Pine / 요거트폼, 파인애플, 메론, 시소 소르베, 팜허브

서플먼트로 티라미수와 이 파인애플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데, 거의 모든 이탈리아 요리사들이 티라미수 이외의 디저트를 망각한 이 도시에서 또 티라미수를 먹을 수는 없었다. 본능이 파인애플로 이끈다.
무언가에 재웠다는 조금은 말라버린 파인애플과 멜론의 생과와 다양한 향을 지닌 잎사귀들, 머랭이 동그랗게 둘러싼 것은 그래도 횟수가 지나쳐지기 전에 떠낸 소르베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곧 덮여버렸다.

글이 지나치게 길어질 것 같으므로, 코스라는 구성에서 서플먼트의 위치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자. 티라미수와 아임 파인은 같은 위치에 존재해도 되는 디저트들인가. 의도에 따른 만족스러운 결과인가. 혹시 딱히 갈 곳이 없을 뿐은 아닌가. 그렇다면 코스의 구성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이렇게 내는 경우 비대칭에 불과한 Quenelle은 먹는 입장에서 어떻게 다가오는가.

총평: .....
10월 19일의 디저트 코스는 코스 디저트라는 형식에 대한 최소한의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라니타-절인 과육과 소스-빵과 크럼블로 이어지는 맛의 매개체vehicle의 흐름을 담고 그 위에는 대안 유제품-소르베-아이스크림으로 이어지는 냉동 디저트의 아름다움을 담았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현대 서울의 디저트의 현실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불유쾌함이 곳곳에 서려 있었다. 코스 디저트, 플레이트 디저트가 무엇인가. 디저트가 접시에 담기지 않은 때가 있었나. 유리잔도 접시고 은쟁반도 접시다. 에스코피에의 페셰 멜바는 공중에 떠있지 않다. 그렇다면 플레이팅 디저트란, 접시라는 공간을 주제로 자유로움을 담아야 한다. 완성되어 냉장고나 쇼케이스에서 판매만을 기다리는 갸또와 비견되어, 각 요소들이 주방에서 현출되어 존재할만한 이유를 갖추어야 한다. 물론, 그 축을 붙잡는건 아이스크림의 존재다. 디저트의 신앙과도 같은 존재인 아이스크림이 개입하는 것 만으로도 플레이팅 디저트는 시도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을 끼얹는다고 모든 것이 완성될 리가 없다. 애초에 유제품인 아이스크림이 끝에 온다는 지점은 혁신보다는 관습적인 의견에 가깝다. 적어도 코코넛의 밀도 있는 지방을 살려 순서를 바꿀 수 있었다면 과연 그 부분만큼은 위대하다고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루기 어려운 재료기 때문에 적당한 완성도여도 낸다니. 이건 한국 소비자들이 받아야 할 대우가 아니다. 디저트의 질감이라는 건 그렇게 무시되어도 되는게 아니다.
나에 의해 설득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 매번 빼먹으면 섭한, 전문가 패널을 초청해보겠다. 디저트의 마에스트로, 무슈 에르메. 마침 디올이나 록시땅과 같은 패션 하우스들을 위해 그는 플레이팅 디저트를 다수 작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는 플레이팅 디저트가 그 어떤 디저트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강조한다. 좋은 플레이팅 디저트란, 불필요한 장식이 없이 맛있으면서도 아름다워야 하며 각 요소들이 디저트를 먹는 감각의 단계를 격상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통상적인 디저트의 문법이 유효하며, 다만 각 요소를 횡적으로 배열하는 자유를 얻음으로서 새로운 시도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록시땅에서 그가 내는 요리를 참고자료로 게시해본다.

모든 파티시에들이 유감없이 복제하는 성서의 작성자인 에르메인만큼 어떤 영감을 주리라 믿는다. 그럼 에르메 수준이 아니니 나쁜 것이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지구 반대편에서 에르메의 꽁무니를 좇는 세태가 달갑지 않은 사람이다. 다만 기본적인 문법이라는게 있지 않다. 맛을 전달하는 과자 반죽의 역할이, 단단함을 불어넣는 설탕과 초콜릿의 역할이 있다. 생과나 절인 과일도 필요할 때는 역할이 있다. 요소들이 쌓여 맛의 층을 이루고, 단맛 위에서 각 풍미와 향, 심지어는 다른 맛들까지 즐김으로서 디저트의 흥이 살아난다. 이는 지극히 디저트스러운 행복이다. 과연 마른 파인애플과 메론, 사과와 단감이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일인가. 바닐라는 깎아내서 점처럼 쓰이지 않는가. 어제 타코때문에 찬조출연한 알렉스 스투팩을 또 불러오겠다. 그가 토르티야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곳이 wd~50의 패스트리 섹션이었으니까. 디저트는 인공미의 음식이다. 변성, 변화, 변조, 무엇으로 부르건, 모양과 질감 모두 자유자재로 손봐줄 수 있다. 한 번 끊어낸 단백질이 다시는 이어지지 않는 고기와 같은 것들과는 다르다.
과육에 대한 변호의 가능성을 조금 남겨두자면, 다음은 빵으로 넘어가자. 왜 빵 껍질을 잘랐는가. 우리는 왜 빵을 굽는가. 전체적인 디저트에서 파트 수크레나 사블레는 제외되었다. 대신 보통 음식의 영역에서 식빵이 넘어왔다. 한국에서 식빵을 주목하는 일은 좋다. 현재 해답에 대한 가장 절실한 부분이 이 식빵이 아닌가. 차라리 다른 빵들이야 외국어의 권위를 빌려 어찌저찌 해결을 보고 있는데 식빵만큼은 익숙함의 대가로 고통받고 있다. 주제로서 더 이상 타당한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새하얀 식빵은 미리 썰리고 노릇하게 데워지며 껍질이 벗겨진다. 타파스나 카탈루냐 요리로서 비키니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게 유일한 빵이라고 한다면 나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특히 디저트 코스에서의 빵이라면.

애초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요리가 하나의 층을 이루고 있는 이상 플레이팅 디저트라는 지점마저도 이제는 의문으로 넘어간다. 다시 올라가 에르메의 초콜릿을 보고 내려오시면 좋겠다. 역시 유명인이 편하고 이래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소스를 올려주는 정도의 서비스를 제외하면 플레이팅으로 내는 것이 주방을 분주하게 만든다는 점 이외에 어떤 실익들이 있을까. 베린같은 디저트와는 어떻게 다른가. 그래, 에르메 선생이 서울에서는 아이스크림을 리델 오에 담아서 낸다. 그라니타나 다진 과일같은건 이치에도 벽이 있는 컵이 알맞다. 칼로 긁어서 포크에 올리는 것보다 숟가락과 벽을 타고 딸려들어오는 감각이 자연스럽다. 최소한 접시를 바꾸거나, 정확하게는 이런 단순히 쌓은 디저트를 해서는 안된다.

나는 메뉴만 보고 10월 19일의 요리가 반드시 성공하기를 바랐다. 너무나 많은 꿈들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이 도시의 아이스크림의 질감과 농도, 미친듯이 반복되는 갸토의 전형적인 형태들과 그마저도 고귀하게 만드는 물음표 숏케이크들, 고수만 보고도 기겁하는 허브의 입지, 중요한 식사일수록 외면받는 채소들. 10월 19일의 요리에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의 가능성이 있었는데. 나는 지금의 서울이 미래의 디저트가 되는 것만은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건 아니다.

분위기:

서비스: 서빙하는 공간에서 한 명의 메트르 도텔(소믈리에?)과 두 셰프의 역할이 크게 나뉘어 있지 않다.

가격: 코스 가격은 KRW 28000이며 메뉴는 한 가지이다. 서플먼트는 KRW 10000.

음료: 리스트를 확인하지 않은 점에 양해를 바란다. 구대륙의 가벼운 식전주들 위주의 반 병이나 글라스 와인이 구비되어 있다. 글라스 와인으로 준비된 것들이 곧 페어링이다. 페어링의 가격은 KRW 27000. 주정강화와인이나 증류주의 구비 여부에 대한 추가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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