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월곡닭갈비 - 대중음식의 진화론
최근 정치인과 검찰이 공방을 벌이는 도중 한 무고한 민간인이 "닭갈비를 홀에서 먹으면 볶음밥을 안먹을리가" 같은 주장을 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닭갈비를 홀에서 먹는다면 볶음밥은 필수요, 먹지 않았다면 포장이나 배달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닭갈비 양념에는 볶음밥. 그런 말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닭갈비라는 요리는 서울에서 참으로 만나기 어렵지 않은데, 본고장이라는 강원도까지도 술만 마시지 않을 요량이라면 손쉽게 다녀올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특별히 떠오르는 곳은 없는데, 누군가에게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블로그를 이전하면서 먹는 것을 의무적으로 죄다 올리는-혹자의 표현을 빌리면 '영역 표시하는'- 행위를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으므로, 이 닭갈비가 대단한 울림-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을 주지 않았다면 그저 여느 날처럼 지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서울의 지하철 역중 한가하기로는 손에 꼽을 듯한 곳에 있으니 그야말로 목적지 식당이다. 수납공간 달린 술집 의자의 구성이 반긴다. 과연 이런 것 때문에 이 멀리까지 올 일이 있었나.
기본적으로는 닭갈비(KRW 8000)와 모듬(KRW 9000)이지만 사실상 어떤 조합으로 주문하지 않는 것은 이곳에서는 결례에 가까울 정도로 자리잡았다. 고구마무스(KRW 4000)에 우동사리(KRW 2000)를 더한다. 인당 만 원 정도의 예산으로 식사를 하고 나머지는 주대. 인플레이션에 힘입어 감흥 없는 한 끼의 가격이다. 그러나 여기서 번개 맞은 느낌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자세를 가다듬고 음식을 다시 보자. 일단 기본이 되는 것은 닭고기와 양념이다. 단맛 위주에 짠맛이 조금 더하지만 양념은 식자재마트에서 업소용으로 나오는 것을 적당히 배합한 느낌이다. 그릴링을 하여 군데군데가 검고 그을린 향을 더했다. 흔하지는 않지만 이해도 가고, 감흥도 적당한 정도에서 머물 것 같은 구성이다. 그러나 음식이 완성되는 지점은 궁합이었다. 브라질산 닭정육이라는 재료가 무엇인가, 기름기가 좀 많지만 맛에 있어서는 여전히 텅 빈 느낌에 가까운 물건이다. 마음껏 맛을 올려낼 수 있다. 부담스럽고 자극이 강한 데리야끼 소스의 중압감을 씻어주는 것은 고구마다. 다른 맥락의 단맛, 소스의 점성과는 대비되는 흐트러지는 물성이 술마저도 해내지 못하는, 식사의 피로를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닭갈비집의 영혼과도 같다는 볶음밥은 소스가 입에 맞는 만큼 맛은 나쁘지 않았으되 고민은 잔류하는데, 구성상 탄수화물의 자리는 우동으로 충분하다. 아니, 그것이 더 잘 어울린다. 맛의 층을 지탱해줄 탄수화물의 역할, 그리고 자극을 다듬어줄 중립적인 식재료의 역할 모두 우동이 해낸다. 한참 가늘은 국수를 쓰는 쪽이 설득력은 훨씬 있었겠으나 나름의 역할을 해내는데, 볶음밥은 궁여지책이다. 탄수화물과 이런 양념의 궁합이 보여주는 기본 빵이라는게 있지만 반복의 맛 속에 지칠 뿐이다. 인심 좋은 달걀까지 올려주되 굳이 고구마흔 낭자한 철판에 다시 올려주는 모양도 시원치 않다.
일상 속의 식당이므로, 많은 것들이 딱 기대한 모습이므로 찾아가기를 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환경 속에서도 더 나은 요리로 객을 설득하기 위해 무언가를 행하는 공간들이 생기고, 그런 데서 우연히 아이디어는 피어난다. 시장의 자연선택, 요리의 진화다. 시판 소스, 시판 고구마, 시판 우동면, 시판 닭. 전부 도매가로 한참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인데 모여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데 성공했다. 설득력 있는 맛이다. 최소한의 상황에서 궁합의, 조화의, 즉, 요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닭갈비라는 요리는 그동안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는 것들을 더 많이 봐왔다. 고통스러운 자극만을 더해서 맛이라고 할 수 없고, 그렇기에 치즈를 담뿍 올려 먹을 수 있게 만드는 식으로. 그렇지 않다면 단맛 위주의, 거대한 철판 속 궁핍을 만날 때가 적지 않다. 결국 닭갈비는 닭다리쪽의 고기를 먹기 위한 요리인데, 기름지되 특유의 맛은 옅으니 양념이 거든다. 사실 그렇게 기름기가 부담스럽지 않은데 반드시 매운 맛의 자리가 필요할까? 단맛과 짠맛의 조화, 그리고 마이야르 반응. 두 가지의 핵심을 관통해서 반복해도 좋은 일상의 행복을 만들어낸다.
과거의 사진은 이런 가스버너를 사용하지 않았던데, 그것이 맞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런 모습이 되어버린 것은 유감이다. 주방에서 조리되어 나오는 음식이기에 버너는 필요도 없고 좁디좁은 원탁의 공간만 차지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런 것을 원하니까 이렇게 된 것이리라.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