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æst - 피자와 삶
가게의 이름 철자 하나로도 이 식당에 흐르는 피를 느낄 수 있다. 크리스티안 풀리시의 를레(Relæ)다. 100% 유기농 인증을 달성한 레스토랑이라는 원대한 프로젝트로 귀감이 되었던 그는 스스로와 공동체를 위해 더 자유로운 요리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기념비적인 레스토랑을 닫았다. "Fuck everything"이라는 그의 발언이 보여주듯이, 전통부터 사람들의 기대까지 모든 것에 도전했던 그는 단순히 재정적으로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요리사들이 그랬듯이 지쳐버린 것일까? 그가 구운 두 조각의 파이에는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었다.
를레와 함께 최초의 100% 유기농 레스토랑으로 족적을 남겼던 만프레드의 흔적은 전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버터에 살짝 볶은 호밀빵 부스러기와 신맛이 타르타르의 앞뒤를 휘어잡는다. 그릇의 크기가 야속한 가운데 지금의 그는 뉴 노르딕이 아닌 이탈리아 요리를 하고 있지만, 이탈리아에 더 매혹되었다거나 과거를 잊었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보여준다.
이력이 화려한 셰프답게 유럽 대륙의 피자 게임을 사로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가 빚어내는 피자는 이탈리아를 주축으로 하는 유행과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STG 나폴레타나에 비해 수분이 조금 넉넉한 편이지만 성형에 있어 특별한 기술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점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투박한 외관과는 달리 거대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데, 모차렐라가 선사하는 유지방, 그리고 토마토가 선사하는 감칠맛이 두텁다는 느낌이 강하며, 은두야는 그 둘의 개성과 맞붙어도 좋을 만큼 신선하게 맵다. 500도에 달하는 오븐에 익힌 음식이지만 마치 날것을 먹는 듯 생동감 있는 감각을 선보인다. 무슨 조화인가 고민해보면 역시 재료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피자 나폴레타나는 분명 역사적인 음식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역사에 짓눌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수많은 피자 나폴레타나가 그렇다. 핵심이 되는 모든 재료가 태평양을 건넌 수입산이다. 밀가루는 물론 치즈와 토마토까지. 수입되는 식재료의 종류가 만들 수 있는 피자의 종류를 규정하는 수준이며, 몇몇 곳들의 마르게리타는 아주 똑같은 맛이 나기도 한다. 그러한 점에 빗대었을 때 크리스티안이 거둔 성공은 궤를 달리하는 차원에 있었다. 분명 이탈리아의 맛을 그리고 있지만, 덴마크에 있기에 그는 덴마크의 물감으로 도화지를 수놓는다. 여기서 참고할 점이 있다면 그의 요리는 나폴리향이 아닌 시칠리아향이다. 좁은 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분명히 다르며, 특히 은두야는 그러한 그의 혈통을 드러내는 요소가 된다. 피자만큼 국제적인 음식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대답 역시 국제적인 방식이어야 하지 않겠나? 크리스티안의 주장은 선명하면서도 유쾌하다.
피자이올로는 자칭하는 나폴리 출신(그것이 설사 단기 체류에 불과하다고 해도!)이라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나마저도 거부감이 드는 이런 장난같은 피자에서 오히려 그의 진가가 드러난다. 피멘톤의 강렬한 다홍, 레코드판을 돌리는 방식에서 영감을 얻은 디저트처럼 장난스럽게 그려낸 토핑은 식탐을 자극하는 배달 피자의 세계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한 조각 안에서 크리스티안이 그려내는 감각은, 너무나 피자이면서, 너무나 본인 그 자체다. 일체를 이루는 두 종류의 소스는 켜켜이 쌓인 버거를 베어무는 듯 하지만, 좋은 발효가 가져다주는 푹신함이 플렛브레드로서 피자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피자 나폴레타나란 무엇인가, 편하게 먹고 소화가 잘 되는 단순한 음식이다. 크리스티안은 그 이상을 지키면서도 시칠리아 요리가 자랑하는 지중해의 매콤함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담아낸다.
굳이 분류해 들자면 크리스티안이 내는 피자는 시칠리아를 모티브로 하지만, 당연하게도 시칠리아에는 이런 요리는 없다. 그리고 그 어떤 재료도 시칠리아에서 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덴마크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식은 나폴리의 것을 따지고 있지만, 바라는 것은 고향이다. 십 년도 살지 않은 고향에 왜 그렇게 큰 가치를 부여하냐고? 그가 그려내는 것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자신의 삶 그 자체라 생각한다. 세계적인 가이드와 거대 미디어도 속박할 수 없었던 것처럼.
- 크리스티안 풀리시는 미쉐린 가이드와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이 주도하는 레스토랑 질서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온 바 있다. 기억나는 표현으로는 '어떻게 해야하는 지도 모른 체 이기도록 경쟁하게 만든다'는 멘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