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 Benfiddich - 팜 투 서비스
바 문화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우연한 사건은 무엇이 있을까, 20세기에는 금주령이 있었다면 21세기에는 아이폰의 탄생이 아닐까.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의 시대는 칵테일 문화를 급진적으로 바꾸었으며, 지금도 변하는 중이다. 그 중 특이한 경험은 지역마다 '외국인에게만 유명한 바'가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뉴욕의 The Algonquin같이 스토리와 해리티지로 명성을 얻은 바보다, 소셜 미디어에서 시선을 이끄는 바에 갔을 때 외국인을 자주 만나게 된다. 서울 사람들은 대부분 '사우스사이드 팔러'의 존재를 모르지만, 그곳은 언제나 다양한 국가에서 온 여행객으로 가득하고, '제스트'나 '바 참'의 대기열에는 이제 외국인들까지 가세한지 오래다.
신주쿠의 낡은 건물에 위치한 바 벤피딕 역시 그런 경험을 선사하는 곳이었고, 나도 그런 부류에 합세한 경우였다. 넓지 않은 공간에 일본인은 히로야스 본인과 주니어 바텐더들 뿐, 그나마도 주니어 바텐더 중에는 일본어가 거의 불가능한 외국인마저 있었다. 많은 주류 문화의 팬들이 '독특한 일본식 바텐딩'을 찾아 도쿄로 향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것과는 별 상관 없는 가게도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벌써 10년을 이어왔으니 이제는 벤피딕의 스타일마저도 도쿄의 한 갈래라고 해야할까?
벤피딕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무명에 가까운 바텐더였던 카야마 히로야스가 2013년 개업, 자영업으로 운영하는 가게로 '직접 키운 허브를 이용한 칵테일'이라는 주제로 시작해 팜 투 글라스, 즉 '직접 키운 허브를 사용한 술을 사용한 칵테일'이라는 단계로 나아가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고, 지금은 월드 50 베스트 바의 랭킹을 보고 찾아온 외국인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바라고 소개할 수 있겠다.
벤피딕은 고정된 메뉴가 없고, 각 고객이 원하는 맛이나 상황을 묘사하면 대화를 하며 칵테일을 만들어 나가는 방식을 고집한다. 어릴적 누구나 생각해봤을 법한, '메뉴를 보지 않고 주문하는 고객이 단골'같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하는 어센틱 바의 스타일.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마셨는지를 구구절절 따지고 드는 것은 의미가 없겠으나,
이 한 잔, 벤피딕의 유일한 시그니처이자 메뉴 아닌 메뉴라고 할 수 있는 '포레스트'만은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 벤피딕에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한 잔은 피해갈 수 없으니까.
진 리키를 바탕으로 변주하는 이 칵테일은 계절 허브를 한껏 빻아 진에 향을 입히고, 역시 허브 인퓨징을 쓴 탄산수로 코끝이 찡하게 만드는 칵테일이다. 물론 물리적으로 빻는 것이기 때문에 묘사한 것보다는 강도가 점잖은 편이지만, 일반적인 진 베이스 칵테일에 비해 처음 맡는 향, 그리고 첫 한 모금의 임팩트에 힘을 강하게 준 느낌을 낸다. 썩 재밌는 느낌을 주지만 사실 세상에 큰 기억이나 영감을 주는 칵테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크래프트 진의 종류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문제인 요즘, 기본이 되는 허브의 화사함과 씁쓸함, 그리고 얼음의 차가움과 소다의 청량감 이 모든 것이 적절히 균형을 유지하는 그런 칵테일을 찾기는 오히려 어렵다. 벤피딕의 포레스트는 그 중에서 몇몇 개성이 모나게 튀어나온 형세로, 비슷한 것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보편적인 좋음보다는 한 번의 특별함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포레스트'로 인해 벤피딕 프로젝트의 실패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오히려 벤피딕의 정수는 히로야스가 즉석에서 만드는 다양한 칵테일에 있다. 사실 완전한 창작은 아니고 대충 들어가는 재료를 보면 전형적인 클래식 칵테일을 기반으로 몇가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조합해서 만드는 방식이다. 기주별로, 스타일별로 두 세 종류씩만 구비해도 곱하면 수백 가지를 만들 수 있지 않나. 거기에 더해 허브나 과일을 즉석에서 가공하는 퍼포먼스가 꽤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에(민속촌에서나 볼 법한 것들까지 쓴다) 대부분의 관객은 그쯤에서 이미 마음이 사로잡힌다. 그렇기에 맛은 생각보다 안전하며, 특이하고 놀라운 방법을 동원하지만 결과물은 대체로 균형이 있는 편이다. 마지막 사진의 '말차'는 에그녹과 유사한 칵테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끝에 결정된 것. 위스키와 달걀을 쓰는 대신 텍스처에서 컨센서스를 잡았고, 그를 바탕으로 크림 바탕에 녹차로 만든 그래스호퍼같은 칵테일을 만들어냈는데 정말 좋은 그래스호퍼가 민트-초콜릿-차가움의 쾌락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이 말차 역시 녹차 아이스크림의 단맛과 쓴맛, 그리고 리치함을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려 큰 만족감을 주었다.
물론 다른 칵테일도 전부 대단한 맛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대부분의 객은 사실 칵테일의 맛따위는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몇 자리 되지도 않는 바에서 '예쁘게 생긴' 칵테일에 대한 문의가 쇄도했으니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여느 힙한 바에서 다 일어나는 일 아닌가.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바를 가보면 그 풍경이 다소 불유쾌할 때가 많다. 손님은 어쨌거나 유명한 바를 왔다는 성취감과 적당한 취기로 달래는 정도이고, 돌이켜 보면 어떤 유명세를 쫓아 무엇을 경험하기 위해 그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손님이 아니라 미디어와 세계의 동료 바텐더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듯한 느낌이 드는 곳도 더러 있다. 바 문화에도 오버투어리즘의 그림자가 이미 짙게 드리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벤피딕은 그런 느낌이 덜한 편이다. 공간이 협소해서? 일본어와 영어를 할 수 있어서? 그런 것을 넘어선 보편적인 서비스의 성질이라는 게 있고, 그에 대한 지식과 감각을 갖춘 사람이 운영하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일본어가 서투르고, 특유의 폐쇄적인 바 문화에는 더 서투른 외국인의 마음도 울리는 서비스. 단순한 오모테나시보다는 적당한 서구식의 거리와 재치가 있다. 아마도 호텔전문학교에서 최소한의 교육을 받지 않았을까. 나는 요리학교를 나온 요리사를 신뢰하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만(위대한 대가들을 살펴보면 요리학교를 차린 사람은 많아도 다녀본 사람은 거의 없다) 서비스만큼은 제도를 신뢰한다. 히로야스는 그 신뢰를 가진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