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렛 피자 - 피자 헬레니즘
피자 마리나라는 근래의 저런 추세에 가장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요리라고 하겠다. 하다못해 한식세계화가 밀어붙인 비빔밥보다도 더한 형식으로, 도우에 토마토만 발라내고 마늘과 오레가노, 올리브유로 마무리한다. 마르게리타가 정치적 발명품이었다면, 이쪽은 나폴리 빈민들의 생존의 역사에서 막바로 발견된 민중의 형식이다. 2D 액정 내에서의 아름다움을 위한 피사체가 되기 위해 근래 서울의 요리들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요리가 아닌가. 낯섦에 의존하는 조악한 동시대 조리기술의 전시, 혹은 원가, 본전 따지던 무한리필 멘탈리티를 그대로 복제한 재료 전시의 문법들이 착잡한 형태로 매일매일 어딘가에서 재현되고 있지만, 도망갈 구석 한 곳 쯤은 있기 마련이다.
누가 정한지도 모를 3대 진미라거나 분명 한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식육용으로 기른 기억이 없는 한우 따위와 엮여있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고, 피자의 문화사는 그닥 아름답지 않은 덕에 기사 등으로 받아쓰기된 적이 없어 허황딘 이야기로 꾸며지지도 못했다. 블로거와 유튜버들을 통한 선행학습 등으로 오염된 판단의 기준도 없이 참으로 자유롭다. 마르게리타만 하더라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사람들은 자유롭게 음식을 즐기고 평가할 수 있지만, 과연 자유로운 평가라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통신량 자체는 어마어마하게 늘었지만 근거와 사유를 바탕으로 한 논쟁은 적게 보인다. 당장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도 받은 반론이라고는 "니가 적게 먹어봐서", "사적 감정이 담겨있어서", "타인의 지식을 인용해서" 따위의 것들밖에 없었다. 학문은 커녕 상식 수준의 대화조차도 바라기 힘든 현실이다. 물이 1기압에서 100도에 끓는다고 하면 섭씨 100도가 아니라 120도에 끓는다고 하면 저질스럽되 논쟁에는 해당하는 주장이지만 위의 것들은 논쟁의 자격이 없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그래서 피자 마리나라는 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까지 다른가? 어째서 이 피자는 논쟁이 가능한가? 이 피자는 우선 저렴하다. 피자 한 판을 통상 둘이 나눠먹으니 라멘트럭의 돈코츠 라멘보다도 저렴한, 서울에서는 부가가치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돼지 부속 끓인 요리들에 필적하는 가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쟁점은 차고 넘친다. 본질적으로 피자는 빵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면 무수한 피자의 형태 중에서도 빵맛의 해상도가 가장 높은 형태이므로 빵에 대해 논하기 제격이다. 반죽의 수분과 산도, 성형부터 오븐 내에서의 회전 등 돔형 오븐의 활용 등 잠깐의 시간동안이지만 기술적 세부사항이 맛에 묻어난다. 브렛 피자의 산도 높은 도우는 토마토의 풍부한 신맛과 발을 맞춰 입맛을 훌륭하게 자극한다. 한껏 흥이 오른 미각은 올리브유와 빵이 전달하는 풍미를 음미한다. 구운 탄수화물이 전달하는 내음은 인간이라면 갈망할 수 밖에 없는 포만감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먹는 이를 다음 조각으로 잡아당긴다.
지방에 있어 흰 치즈를 이용하는 마르게리타쪽이 통상의 감각에 훨씬 적합한 형태이겠으나, 빵이 지닌 미묘한 신맛과 단맛, 그리고 향에 취하기에 마리나라는 축복에 가까운 레시피이다. 피자 마리나라를 만들고 먹는 행위는 그 시절의 지혜를 이 시대에 재현하는 일이 된다. 21세기 여전히 소비의 금액 순으로 미식가들이 정렬되는 사이 여전히 요리사들은 박봉으로 신음하는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지혜를 집대성한 피자 마리나라는 각별하다. 울고 싶은 이를 위한 음식이고 울고 싶게 맛있다. 물론 브렛 피자의 마리나라가 빙켈만의 라오콘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과연 피자란 어디에 쓰는 물건이고 어떤 부분이 아름다운가에 대해 훌륭하게 탐구하였고 그 결실이 주방과 홀에 드러나고 있다. 피자 나폴레타나, cucina povera의 지지자로서 라르도 피자의 출시를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