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칼리노 - 2022년 봄

호텔 운영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경영진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사업의 주체가 두 곳-부동산과 자금을 제공하는 오너, 숙박업을 운영하는 호텔 체인-인 경우 나오는 결과물은 천차만별이다. 포 시즌스 호텔이라는 브랜드는 빌 게이츠와 사우드 왕가의 손에 있지만 부동산 소유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들이 전개하는 사업의 그림은 세계 각지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모회사라 할 수 있는 사우드 왕가의 소유에 있는 파리의 조지 5세 호텔과 포 시즌스의 소유인 도쿄, 일본 부동산회사가 소유한 교토와 한국의 투자회사가 소유한 서울은 단지 지역만 다른게 아니라 가장 위에서 이루어지는 경영산 판단에서부터 다르다.

이 결정이 왜 중요하냐면, 바로 보칼리노의 상태를 결정한 사람들 역시 그들 사이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포 시즌스 호텔 체인은 리조트도 다수 운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가스트로노미의 측면에 대하여 대단히 집중하지 않는 아만이나 여타 경쟁 체인과 다르게 동시대 가스트로노미의 일원이 되기 위한 수준을 갖추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특히 대도시에 위치했다면 더욱이.

그러나 서울의 포 시즌스 호텔의 F&B는 지하의 바 한 군데를 제외하면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다. 물론 이 호텔의 개관이 레드가이드 서울판의 발매보다 빨랐으므로 예측하지 못한 측면도 있겠으나, 이후에도 식음료 영역을 운영하는 전략은 모호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유유안」은 체인이 가진 막대한 인적 자원을 아주 제한적으로만 활용하고 있으며, 「보칼리노」나 「컨펙션 바이 포 시즌스」는 뚜렷한 비전 없이 인사이동 철마다 셰프만 바뀌고 있다. 가장 최근까지 보칼리노에 있던 셰프 역시 타지역의 포 시즌스에서 이동해온 셰프였는데 COVID-19를 맞은 뒤 오래 있지도 못하고 떠나고 말았다. 마침 역시 비슷하게 왔던 패스트리 총괄도 떠나보내고 호텔의 서양 주방은 완전히 대공위시대를 맞았는데, 호텔의 F&B 공간이 소비되는 맥락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의 허영을 꾸미는 기능이 작동하는 한,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그 허영을 적절히 부풀리는데는 어떤 권위만한게 없으므로 호텔은 계속 이런 방식으로 운영될 전망이다.

이번의 도전자는 (약간은) 놀랍게도 포 시즌스 체인에 있지 않았던 요리사였다. 과연 그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방문 전

보칼리노의 예약은 자체 웹사이트와 전화를 통해 가능하다. 예약 관리 시스템으로 테이블체크를 사용하고 있으며, 예약 여부는 프로그램의 문자 알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방문 전 한 번의 확인 전화가 있으며 당일에는 확인 전화가 없다.

요리

이날은 작정하고 찾아간 날이었으므로 셰프가 제안하는 단품 메뉴 대신 호텔 영업상 존재하는 코스 메뉴(KRW 140000)를 선택했다. 그러나 디저트는 기존에 존재하던 것인 등 코스 전체를 논할 실익이 매우 적으므로 논할 지점이 있는 부분만 다루겠다.

첫번째는 빵과 오븐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포 시즌스와 달리 서울 포 시즌스는 이탈리안과 (그럴 예정이었는데 바뀐) 스시 바를 내세웠는데, 당시 한국에서도 사랑받지 않던 한식당-여러분은 한복이 드레스코드에 없어서 쫓겨난 일을 기억하시는가- 대신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외식으로 호텔을 채우게 되면서 참으로 의아한 피자 오븐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호텔 짓는데 그깟 피자 오븐 하나 가격이야 신경쓸 정도는 아니지만 뭘 생각했는지 감이 잡혀서 더더욱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탈리아를 하나의 전체로 뭉뚱그려 이해하려다 보니 흐릿한 그림밖에는 나오지 않는데 그 정점이 나는 이 피자 오븐이라 본다. 물론 이탈리안을 내세우는 레스토랑과 피자 오븐이 공존하는게 무슨 문제냐 물을 사람도 많으리라. 하지만 생각해보라. 이 오븐이 빵 오븐으로 잘 쓰일 수 있을까. 중세식으로 화덕을 떼는 오븐을 쓰는 오래된 호텔에서 견습한 요리사들도 이제는 모두 장년층에 접어들고 있는데 서울에 파견되는 젊은 셰프들에게 이 화덕이 무슨 용도가 있을까? 물론 이탈리아 요리학교에서도 피자 코스가 있는 등 기본적으로 사용법은 숙지하고 있을 수 있지만 보통 피자 오븐 앞에 선 시간이 결코 길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무슨 요리사가 오던간에 피자, 스파게티, 스테이크하고 티라미수 정도 만들도록 이미 공간이 요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실제로 포 시즌스가 제공하는 피자는 대단히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지만 AVPN 표준 언저리에서 노는, 브랜드가 설정하는 스스로의 최소한을 넘어서지 못하는 제품들 뿐이다. 물론 오테마치와 마루노우치의 포 시즌스 역시 피자 화덕을 가지고있지만 한 군데는 아예 업무분장에 피자이올로가 따로 있고, 일본은 한참 전 AVPN 열풍을 지나 독자적인 피자 나폴레타나 씬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므로 서울과 등치할 수는 없다.

요리 담당자와 제빵 담당자가 모두 사라지면서 빵은 결국 새 셰프의 손에 의해 BITE같은 빵-정확히는 Bocconcini di pane-으로 바꿨는데 그야말로 임기응변이었다. 앤초비와 소금을 이용해 적절히 짠맛을 불어넣어 아예 일종의 안티파스티 느낌으로 바꿨는데, 다시 말해 식사에 어울리는 빵의 자리는 일단 손을 놓았다. 한국에서 프랑스 빵보다도 흔히 접할 수 있는게 이탈리아의 빵인데 현실이 이렇다. 셰프도 일단 빵을 아주 모르는 사람은 아니겠지만 주방은 결국 팀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데, 제대로 자신의 요리 세계를 보여줄 새도 없이 떠나는 헤드 셰프와 언제나 고군분투하고 있는 수셰프만으로는 매꿔야 할 구멍이 너무나 크다.

Burrata e pomodori marinati
Zuppa di piselli e menta, brandade di merluzzo, caviale Sevruga

이러한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새 셰프 마르코가 그리는 요리 세계는 나름의 재미를 가지고 있었다. 완벽하다, 뭐 수준이 높다(수준이 뭔가?) 이런 측면이 아니라, 경험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요리를 보일 마음이 있었다는 뜻이다. 샐러드에서의 발사믹 캐비어가 그랬다. 알긴산나트륨의 성질을 이용해 캐비어 형태를 만드는건 정말 오래되다 못해 지긋지긋한 방법이고, 많은 요리사들이 분자요리랍시고 시도때도없이 시도하는 통에 안좋은 편견마저 가지고 있었는데 간만에 그렇지 않은 요리를 만났다. 토마토는 감칠맛과 신맛 모두 약간 모자란 상태였는데 캐비어를 터뜨릴 때 기분좋은 신맛, 그리고 과실향이 감싸주는 감각이 좋았다. 그 살짝이 없었다면 스트라치아텔라의 지방도, 민트의 기분 좋은 상쾌함도 무주공산 속에서 방황했으리라.

스프는 섬세함이 많이 모자랐지만, 동시에 그리는 그림은 보여서 나쁘게만은 말할 수 없었다. 잘 끓인 완두콩 벨루테도 좋지만 브랑다드를 올려 스프에 일종의 몸통을 만들었는데, 잔뜩 끓여 적당히 한 끼 떼울 요량의 스프가 아닌 코스 내에 위치한 전채로서의 기능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다만 브랑다드에서 스프로 이어지는 질감(texture)이 일관되지 않아 결합하여 일어나는 맛의 상승효과가 기대만큼 크지 않고, 온도 역시 이러한 불협화음을 다스리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둘 모두 빵의 단짝과도 같으므로 제대로 된 빵이라도 하나 있었다면 또 이야기가 다를 수 있었는데, 위의 빵은 그런 용도로는 쓸 수 없는 물건이었으므로 아쉬움만이 남는다. 하지만 요리 곳곳에 요리사가 경험한 인생이 묻어나고 있으며, 그 그림이 바라는 방향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공감대를 가지고 있으므로 아직 기대할 수 있는게 남아있다는 인상을 준다.

Spaghettoni fatti in casa, salsa con broccolini e la nostra 'nduja, mollicata

이날 마르코와 대충 파스타 프레스카 만들고 티본 굽고 이런 뻔한 요리보다는 다른 지점의 포 시즌스처럼 한 발 더 나아간 요리를 하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요리를 보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포부는 그렇더라도 하여간 하기는 해야 한다. 스파게티 은두야를 다소 충격적인, 미국식 미트소스 스파게티를 떠올리게 하는 연출로 담아냈는데 스파게티에 대한 환상 같은걸 가지고 있지 않다면 받아들일만한 식사였다. 칼라브리아에서 이렇게 요리하면 무슨 반응이 나올까 싶은, 지극히 서울스러운 요리인 와중에도 살짝의 레몬향이 감돌아 과연 모르고 만드는 장난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기왕에 이런 폭탄같은 비주얼로 낼 것이었다면 아예 신맛과 매콤함 역시 높은 수준으로 설정하여 쾌락에 가까운, 파스타라는 본질을 잊게 만드는 요리였다면 훨씬 즐거웠겠지만 그런 것은 굳이 바라지 않는다. 당장 맛있는 은두야는 거의 수입되지 않고, 이 호텔의 명줄을 쥐고있는 고객들의 요구사항은 일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메뉴를 고른 의사결정의 과정이 궁금하지만, 그러한 틀 안에서 나름의 길을 찾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Brasata' Guancia di manzo alla milanese
Merluzzo e caponata

보칼리노는 여전히 스스로가 설정한 포지션과 받는 가격에 비해 굉장히 엉성한 게 현실이지만, 새 셰프와 함께 등장한 새 메인 요리가 가장 완성도가 높았으므로 앞으로에 대한 기대를 다시금 가지게 만들었다. 의무로 만들어야 하는 스테이크를 제외하면 시칠리아와 밀라노, 셰프의 요리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곳 중 한 곳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듦으로서 자연스레 앞서 펼쳐진 그의 요리세계에 대한 이해를 완성할 수 있게 도움과 동시에 요리의 완성 수준 역시도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모자라지 않을 정도에 올라있다. 브레이즈brasata한 소 볼살 요리는 레스토랑의 첫 단추를 잘 끼웠다는 인상이었다. 젤라틴의 조리 정도도 적당하고, 바롤로는 아니겠지만 와인이 스며든 정도 역시 즐거워 정말 전형적인 북부의 즐거움을 담고 있었다. 일전의 페 메종의 요리가 굉장히 유사하기는 하지만, 피노 누아에 피노 누아를 얹어서 부르고뉴를 그려냈다면 이쪽은 오롯이 밀라노에 레퍼런스를 두고 있었으므로 횡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은 빵까지 곁들였다면 정말 뻔한 완성품의 극치가 되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다는 점.

팬프라이한 대구는 이에 반해 이미 완성에 가까웠다. 비록 메뉴판에 sarmoriglio를 "살모리글리오"라고 읽고 있어서 비참한 기분이 들었지만, 요리는 탈선하지 않고 잘 도착했다. 문제의 살모릴리오로부터 카포나타까지 자연스레 이어지는 기분좋은 신맛의 연타가 정말 화사한 봄날에 어울린다. 현대적인 조리 기법을 부담없이 사용하는 셰프지만 뻔한 옛 방식으로 조리한 요리에서 그의 가치는 완전히 드러난다. 야채가 가진 매력을 오롯이 이끌어낸 카포나타는 가지 속을 채워 오븐에 굽거나 빵에 얹어 먹고싶다는 충동을 들게 만드는, 전형적인 카포나타 중의 카포나타였다. 그러나 그 카포나타가 그러한 전통의 맥락에서 이탈했을 때 이를 어떻게 다시 빛낼 것인가? 그는 이에 대해 간단한 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답했다.


총평: 새 보칼리노는 새 셰프에 의해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등 남부 이탈리아를 주무대로 하는 레스토랑으로 탈바꿈했다. 스스로 내세우는 바에 비해 모자람이 많은 주방을 계승한 현실 속에서도 그의 요리는 명확한 비전을 지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해안가에서 오래 근무한 경력을 살려 시칠리아의 유산들을 적절히 활용하지만, 필요하다면 이외의 요소들 역시 보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많은 요리에서 적절한 신맛이 항상 입맛을 돋우는데, 이런 요리가 풀바디의 남부 와인이나 신대륙 레드와인과 격돌하면 가히 장엄한 풍경을 연출한다.

이제 첫 발을 뗀 시점에서, 스타트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소를 조리해야만 하고, 때가 되면 트러플을 써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이상 앞으로를 장담하기는 어렵겠으나, 지금까지 보여준 그는 결코 습관으로만 요리하는 요리사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알았다. 마르코 에르바가 이끄는 보칼리노는 다시 지켜볼 가치가 있는 레스토랑으로 돌아왔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 혹은 예산이나 인력이 필요해 보인다. 후자는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전자를 기다린다. 여름 메뉴를 낼 때 쯤이 본무대가 되리라 본다.

서비스: 포 시즌스가 제안하는 경험의 평균. 그러나 영어를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경험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은 치명적인 약점

가격: 코스 메뉴 인당 KRW 140000

음료: 개편이 필요한 프랑스와 북부 산간 위주. 국내 최고의 칵테일 바와 전혀 시너지를 내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