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H. -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X World's Best 50 Bar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를 목전에 두고 있는 요즘이다. 입국시 격리의무도 없어져 그간 밀려있던 행사들도 진행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족족 해외로 떠나고 있다(비수기에 휴가를 갈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니). 찰스 H.는 델타 유행이 한창이던 12월에 원격으로 행사를 진행한 바 있는데, 입국자 격리가 해제되자 얼마 안있어 이렇게 내한 행사를 열었다.
행사에만 제공된 음료들이다보니 "이건 맛이 어땠고 여러분도 가서 먹어보시라" 류의 이야기를 한다면 안 쓰느니만 못하다. 일단 카드사 홍보를 위한 행사이다 보니 제약도 있었을 것이고(왜 어떤 칵테일이 파란색일까?) 아멕스 오너들을 제외하고도 초대받은 사람이 워낙 많아 이럴거면 오너사의 회식날과 무엇이 다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굳이 글을 쓰는 이유? 기왕에 도대체 현대 BAR의 음료들은 어떤 방식으로 먹고 마시는 문화를 이해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나눠보고 싶었다. 국내 바들은 다양한 해외의 기술을 적절히 모방하고는 있으나 그 이유를 드러낸 적은 거의 없는데, 과연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는 이들은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그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다.
일단 하나하나를 따지고 들어가기 전에 이 설정을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외에도 Keith Motsi의 이름으로 나온 2종의 칵테일(SOMETHINGCRISP, COCOLOCO)까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전부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는 설정이다. 행사의 주인공이었던(색을 보라) 야마나스는 아예 아이스 버킷에 채워내고 있었는데, 여러모로 분주한 행사에서 온도 관리는 완전히 손을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칵테일의 기본이 결국 서로 다른 재료들을 어느 정도의 물/어느 정도의 온도와 함께 녹여내는가의 문제에 놓여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뼈아프다. 특히나 여느 행사도 아니고 유수의 바텐더들을 초빙하는 행사라면 더욱이.
실제 음료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두드러졌는데, 잔에 채운 얼음이 대부분 썩 빨리 녹기 시작해 음료의 일관성을 헤쳤다. 순간적으로만 가능한 상태를 만드는게 칵테일이라는 요리의 본질이라지만, 잔의 2/3 정도를 비울 때부터 맛이 뚜렷하게 흐려져버리니 제아무리 좋았던 첫인상도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착석 시간에 제한까지 있을 정도로 밀려드는 상황에서-정말로, 바에 그런 게 있다- 직접 손이 닿을 수 없으니 꺼내는 궁여지책이라지만 얼음의 관리마저 신경쓸 수 없게되니 착잡했다. 결국 이런 상황이 맞아떨어지면 단지 빨리 마시고 빨리 일어나는 것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결제 금액, 아니면 사진.
그럼에도 각 음료의 구성 자체는 충분한 합리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아쉬운 마음도 있다. 롱 드링크인 크리스탈은 완전히 맑게 만든 음료에 탄산을 주입해 만드는 즉석의 하이볼 비스무리한 음료였는데, 이런 장비가 주는 통상의 인상 없는 탄산음료를 조금은 넘어서고 있었다. 탄산보다도 위스키가 오스만투스가 주는 캐러멜 유사의 단향과 짝을 짓고, 다시 김 파우더가 주는 짠맛과 갯내음에서 위스키의 피트 뉘앙스의 그림이 떠올라 위스키를 마시는 재미를 잘 보여주었다. 물론 니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충분한 단맛과 완전히 물에 가까운 유체의 가벼움이 주는 경쾌함과 동시에 다시 전형적인 스카치 위스키의 캐릭터를 떠올려볼 수 있어 해체 후 재조립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지나치게 짧지도 않고, 또 하이볼처럼 길지도 않은 절묘함이 있었는데 그 여흥이 잔의 바닥까지 이어지지는 못한 점은 아쉽다.
샐로우 역시 맛의 모델이 된 칵테일을 변형한 형식이었는데 이런 부류의 음료들 중에서는 서울에 있는 것들보다 한 차원 높은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화이트 럼에 코코넛, 파인애플이 차례로 느껴지는 피냐 콜라다인데 피냐 콜라다의 심부와도 같은 단백질-지방의 조직을 완전히 걸러냈는데(clarifying) 어디에서나 볼법한 아이디어임에도 결과물은 그렇지 않았다. 신맛과 단맛은 물론 향의 응집도가 높아 피냐 콜라다가 지닌 즐거움은 더욱 진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음식에 맞춰도 무방할 정도로 강렬하고, 맑은 피냐 콜라다라는 낯선 개념이 주는 놀라움 역시 갖추고 있어 다방면으로 즐거웠다. 다만 쿠페 잔의 넓은 표면적 덕분에 음료의 온도는 빠르게 오르는데, 그를 방지하기 위해 얼음을 띄우니 음료가 가진 장점이 점점 흐려지는 고통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생긴 것만 보고는 한 번 셰이크라도 했나 싶었는데 정신없이 돌아가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서버들을 보니 그렇지는 않은 듯 했다.
바니 강의 두 칵테일이 클래식을 주제로 한다면 레나토 '타토' 지오반노니가 낸 것들은 음식 외적인 부분에 그림을 두고 맛의 문법으로 그것을 묘사하는 방식인데 위험하고 어려운 접근법을 택한 이유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이름처럼 야마나를 떠올리게 만들기 위해 무려 파타고니아의 게를 썼다고 하는데 정작 맛으로는 핑크 진과 같은 진 바탕의 단순한 음료가 떠올랐다. 무언가 엄청나게 들어가긴 했는데 향이 복잡하게 피어나기보다는 진의 쓴맛-나머지의 단맛의 단순한 구조의 강력함에서 버틸 만큼 충분하지 못했다. 평범하게 즐기기에는 무리가 없었으나 아르헨티나와 영국을 잇는 무언가라는 묘사는 인쇄된 레시피 바깥에서는 느껴지는게 거의 없었다. 또한 음료가 저온에서 버티도록 잔도 안팎으로 얼음으로 어떻게든 감싼 뒤 조금씩 따라내는 방식이긴 하지만 희석과 온도 상승으로 인한 열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높은 곳을 바라보는 레시피에 비해 디테일이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이런 21세기형 칵테일들이 '나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바니와 타토 두 사람의 음료는 그래도 현대적인 믹솔로지 기법의 재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최소한으로는 이해하고 있는 인상이었다. 남의 업장을 빌린 처지이므로 기물과 전시 방법 등은 급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준비된 환경에서는 더 나은 결과를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특히 바니 강의 맑은 피냐 콜라다는 피냐 콜라다라는 요리의 맛을 적절하게 재현하면서도 질감이나 외형을 변주하여 반전에 의한 놀라움 등을 충분히 연출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이 행사가 서울에 무언가를 남긴게 있는가 하면 아무리 날고 기는 바텐더를 초빙해도 기본적인 인프라가 모자라면 안되는 것은 안된다는 일반론적 교훈 뿐이었다. 파격적인 가격 혜택과 더 파격적인 게스트들을 업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칵테일을 마시는 즐거움에 대해 새로운 영감을 얻어갔다면 좋겠으나 글쎄. 과연 이날의 고객 중 몇 명이나 이 지하를 다시 찾아줄까. 초대받아 온 귀빈들께서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드실까? 바텐더와 요리사 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에 음식 사진 올리기를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이 반값 결제 혜택도 아닌 무료 의무를 다하기 위해 분투하는 현장은 우습기만 했다.
원래 호텔이 그런 곳 아니던가? 호텔을 대표로 하는 접객업이 고부가가치를 추구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비일상의 재미란 무엇이다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공간을 이용하는데, 보통은 별로 인류의 발전에는 도움이 안되는 방향들이다. 서울이 아니라 리츠나 조지 V를 가도 호텔을 떠받치는건 클리비지를 촬영하기 바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동경하는 나머지들이다. 수영장과 F&B를 결합해서 수영장에서 밥을 먹는 제주신라호텔의 모델이 이런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라 하겠다. 수영장에서 음식맛 따질 일인가. 이는 찰스 H. 베이커 주니어의 시대에도 그랬다. 그는 이른바 맛잘알 행세하는 뉴욕의 동료 부자들보다 동방 식민 제국의 열정적인 노동자들, 세계를 누비는 탐험가들로부터 노하우를 얻고자 평생을 매달렸던 사나이였다. 이런 사회성 부족한 인물들이 꼭 이렇게 태클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도로아미타불. 왜 식당에서는 음식을, 바에서는 음료를 중요하게 생각하면 안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