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H. -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쉬어가는 코너. 아이스크림. 아니, 아이스크림이 쉬어가는 코너라고? 적어도 여기에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그동안 몇몇 주름 두꺼운 블로그들을 보며 우리는 그들이 디저트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고 이제는 너무나 지친 나머지 말을 멈출 수 없게 되지 않았나! 단 한 번도 "잘 모르겠습니다"가 허용되지 않았던 사회에서 유독 먹거리에 대해서만 사람들은 모름에 관대하다. 바의 요리에 대해서 논한다고? 지금까지 커버 차지에 따라 나오는 것들에 대해 사람들이 얹은 말들을 생각하면 나는 그게 더 경우 바깥이라고 생각한다.
제목을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이라고 뽑았지만 정식 명칭은 몰턴 초콜릿 케이크Molten Chocolate Cake라고 되어있다. 또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 요리의 기원을-살아있는 전설을- 떠올릴 것이다. 정확하게는 기원이 정확하지 않다는 기원 말이다.
부드러운 케이크가 뜨거운 초콜릿 분수를 품고 있는 형태의 퐁당 오 쇼콜라, 혹은 반숙 초콜릿Mi-cuit au chocolat은 1980년대 처음 개발된 현대 요리이다. 최근인 만큼 제작자도 특정되어 있는데, 첫째로는 구대륙 기원설이다. 1981년 미셸 브라 셰프가 개발했다는 주장으로, 원래는 특정한 감성을 표현하기 위한 오트 퀴진의 디저트로서 개발된 것이다. 굽는 방법이 생각보다 만만하다는 걸 감안하면 놀라운 지점. 그가 의도한 내용은 역시 초콜릿의 대비이다. 부드럽게 잘리는 케이크로부터 뜨거운 초콜릿에 젖어들어가는 경험은 마치 한겨울 차가운 바깥에서 따스한 집안으로 돌아오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해준다. 액체에 가까운 심장부와 고체에 가까운 표면부의 대비에 온도의 대비까지 더하여야 이러한 표현은 완성된다. 통상 아이스크림을 곁들이는데, 그게 원작자의 의도에 부합한다. 원작자는 단지 케이크의 내외부의 대비를 더해 공간의 이동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얀 아이스크림의 산에서 내려와 맞이하는 한 잔의 초콜릿을 한 접시에 담아낸다. 알프스 산맥에서 겨울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그 아쉬움, 하지만 휴가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 맞이하는 따스함을 기억하는가? 알프스가 아니고 겨울철 늦은 밤의 퇴근길이라도 그 감성은 훌륭히 들어맞는다. 보통은 따뜻한 초콜릿 대신 나이트캡을 한 잔 마시고 뻗어버리지만, 기분만큼은 알 법도 하다. 특히나 알프스 못지않게 겨울이 추운 이런 곳에서는.
장 조지가 전하는 에피소드는 다르다. 그가 1987년 파티에 쓰일 초콜릿 케이크들을 구웠는데 속이 익지 않아버린 것이다. 메트르 도텔이 그를 나무랐지만 이미 방법은 없었고 이 실패작은 파티의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는 스타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 용암처럼 초콜릿이 흐르는 케이크에 보이는 대로 이름을 붙였다.
장 조지의 이름을 전미에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이미 그들은 80~90년대에 거쳐 한바탕 조용한 논쟁을 벌였다. 지금이야 주방의 구루같은 게 된 분들이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뜨거운 분들이었다(지금도 차갑지는 않다). 90년대 <뉴욕 타임즈>의 취재에 응한 장 조지는 자신이 개발자라고 강력하게 어필했다Fabricant, F. (New York Times, 27 Nov 1991). The Cakes That Take New York Erupt With Molten Chocolate: All over town, warm, runny desserts.. 일단 목격자들이 많았다. 확실히 미국에서 이 케이크를 알린건 장 조지가 맞고, 그 덕에 모두가 이걸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소식에 밝은 셰프들은 그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해당 기사에서는 알랭 뒤카스에게서 배웠다고 하는 언급이 있는데, 뒤카스는 자신이 오 년은 빨랐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창작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뒤카스가 이 요리를 냈을 때에는 이미 어느 레스토랑을 가도 이게 나와서 자신도 이걸 할 의무를 느꼈다고 하니, 뒤카스도 남의 것을 먼저 본 셈이다. 추측컨대 모든 정황이 미셸 브라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수십 년의 세월은 커녕 불과 십 년 만에 미셸 브라의 서정적 서사는 삭제되었으며, 그럼에도 훌륭한 맛 덕분에 전세계를 사로잡았다. 미셸 브라와 뒤카스를 거친 주방에서는 가나슈를 얼려서 굽는 방식으로 이것을 구현했으나 보급에 혁혁한 공이 있는 장 조지의 레시피는 굽기를 조절하여 구현한다는 점에서만 차이를 지닌다. 맛의 지점에 있어서는 어느 쪽의 손을 들지 않겠다. 인연으로 치자면 뒤카스쪽에 가까운 피에르 에르메도 가나슈 냉동이 아니라 덜 굽는 기법을 쓴 적이 있다. 주방의 사정에 따라 선택하면 될 일이고, 핵심은 겉과 속의 대비를 어느 수준에서 완성하느냐라는 결과물에 있다. 즉, 어느 쪽을 선택하던 이유를 보여주면 그만이라. 다시 말해, 속을 굳힐까봐 겉이 구운 케이크가 아닌 반죽의 느낌이 남아있으면 안되고, 반대로 점도가 충분하되 초콜릿이 흐르지 않고 떡이 지면 실패다. 다만 파인 다이닝의 단계에 들어선다면 가나슈를 따로 얼리는 쪽이 좋을 수 있다. 풍미의 켜가 더해질 수 있기 때문. 미셸 브라 본인처럼-그는 더 이상 주방에 서지 않지만- 누벨 퀴진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짠맛의 세계의 것들을 다루어 볼 수도 있고, 에르메의 생각처럼 초콜릿에 바닐라가 아닌 라즈베리 아이스크림으로 계절을 뒤집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설득력만 있으면 된다. 두 가지 측면에서의 설득력, 첫째로 기술적으로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둘째로, 그리고 그것을 용해서 무엇을 만들려고 하고 있는가? 창작의 영역은 이미 브라 본인의 손을 떠났다. 그에 대한 충분한 존중을 머금었다면 무엇이든 불가능하랴.
하지만 이곳은 디저트에 혼을 싣는 곳이 아닌 바의 주방이다. 물론 찰스 H.의 바에 많은 것을 기대해도 좋지만, 그렇다고 하여 평가의 기준이 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의 음식은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훌륭한 동반자여야 한다. 이를테면 아이스크림은 고혹적이어도 좋으나 더욱 중요한 것은 빠르게 녹아서는 안되며, 초콜릿은 복잡한 풍미를 지닌 두 잔 사이의 여운을 끊어주는 역할을 잊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창작에 대한 평가는 한결 완화된 심사 기준을 적용함이 합당하다. 지나치게 어이없지만 않으면 재량의 영역을 인정할 수 있다. 심지어는 공란이어도 좋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술적 흠결이 없는 공란도 가능한 답안지다.
그래서 몰튼 케이크는 어땠는가? 일단 정통주의자들은 사진에 보이는 표면에 대해 강한 불만을 제기할 것이다. 쩍쩍 갈라지기 시작하는 표면을 보면 케이크의 완성도를 가늠할 수 있거늘. 껍데기를 다시 입혀? 그렇다면 껍질-반죽-속으로 세 층의 케이크가 되기 때문에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어지러워질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껍질이 전체의 경험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케이크, 혹은 퐁당 오 쇼콜라의 만트라인 선강후약의 박자에서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앵글은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글의 제목을 다시 보라! 몰턴 초콜릿 케이크가 아니고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이다.
생각건대 「보칼리노」 주방에서 흘러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이 아이스크림은 지금은 그곳의 주방에서는 찾을 수 없다. 어째서냐 묻는다면 일단 아이스크림을 먹는 문화가 없고-젤라또는 단지 베스킨 라빈스의 안티테제이다. 이탈리아 어쩌고 찾지 말고..- 피스타치오를 찾는 사람들은 더 없다. 민트초코가지고는 정말 절망적인 농담만이 계속되는 가운데 본래 녹색 아이스크림의 본가인 피스타치오는 관심 바깥으로 밀려났다. 인위적으로 색을 더해 형광빛이 나는 피스타치오때문에 사람들은 이 낯선 견과류에 관심을 끊는다. 그 다음은 미국산 피스타치오 때문에 두 번 발길을 끊는다... 그렇지만 견과류는 아이스크림으로 만들 이유가 있다. 높은 지방이, 독특한 풍미가, 그리고 볶더라도 단단하며 어금니 사이사이에 박혀버리는 자비롭지 못한 질감이 자신을 가공하라고 명령한다.
앞뒤로 강한 칵테일을 마시는 데다가 초콜릿 케이크까지 곁들이는 심정이므로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의 풍미에 대해 자세히 논하는 것은 경우에 어긋난다. 다만, 그 역할에 주목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이스크림은 칵테일의, 그리고 다시 케이크의 조력자로 기능한다. 지방이 풍성한 아이스크림은 냉동고로 가득한 바의 공간의 맥락에도 자연스레 어울릴 뿐 아니라 알코올의 취기로부터 벗어날 여유를 준다. 시가 한 대에 불을 붙이고 여유를 즐겨도 좋겠지만 실내 흡연은 한국 문화권에서 야만과 동의어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를 대신할 동반자를 여러분은 찾아 보았는가, 내 생각에는 아이스크림이다! 조금 거시기하지만 몇달 전 서울의 모처에서 아이스크림 과자들을 바에 잔뜩 들인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초콜릿과 견주어서는 견과의 풍미로, 칵테일과 견주어서는 풍성한 지방과 단맛으로 호흡을 맞추는 아이스크림 한 컵은 다소 쌀쌀한 바의 카운터에서 함께 가도 좋을 동료Companion다. 그러나 어느정도 클리크를 미리 조정해두길 바란다. 땅콩 따위를 씹는 것보다는 여러모로 훨씬 발전했으나 피스타치오 그 자체는 도시의 환경에 대한 극복, 초월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은 다음의 질문이다:그럼 이 형식을 이용해서 두 번째 단계의 설득력을 보여주는 경험이 BAR가 아닌 곳에서는 가능할까? 미셸 브라가 아니라 피에르 에르메, 아니 어디 로마 시대 요리서를 가져와서 똑같이 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요리가 될리 없다. 위대한 셰프들이 만든 요리래요-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보았다.를 더한 요리를 이곳을 떠나서 찾을 작정이다. 적어도 찰스 H.의 주방에서는 답이 있지 않았나.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 말이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또 누군가는 다른 것을 채우겠지, 아니면 같은 것을 다르게 하겠지? 이 메뉴가 지낸 세월을 생각하면 내 기대는 결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퐁당과 아이스크림 모두 개별로는 어려운 게 아니므로 단순히 접시에 같이 담기만 해도 그림의 배경은 될 수 있는데, 그림을 본 기억은 없다. 단 맛의 세계에서 초콜릿은 도화지를 칠할 수 있는 물감이지만 우리는 좀 더 제대로 된 그림을 원한다. 글씨 말고, 그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