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âteau Bernadotte, Haut-Médoc, 2011
포이약의 그랑 크뤼 2등급, Château Pichon Longueville Comtesse de Lalande과 같은 업체라는 이름값에 빛나는 레드 보르도 블렌드. 까베르네 소비뇽이 주인공인 날이었지만 51%의 까베르네 소비뇽이 사용되어 간신히 과반을 지지하고 있으며, 48%의 메를로와 1%의 쁘띠 베르도로 구성되어 있어 메를로의 특징 또한 적지 않게 묻어나온다.
30년 정도 수령의 어린 포도나무가 중심이며, 새 프렌치 오크와 재활용 오크가 1:2 비율로 사용되어 일 년 이상을 숙성한다. 대량으로 만드는 제품이므로 품질의 균일화에 더불어 원가절감의 효과까지 맛볼 수 있으나 그만큼 나무의 힘은 떨어진다 느낄 수 있다. 시음적기의 절정을 맞아 천이 흩날리는 듯한 질감은 훌륭하며 잘 익은 과실향, 블랙커런트 뿐 아니라 미세한 청색 사과의 신맛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나무에서 오는 달콤한 향기는 역시 아쉬움의 영역이며, 커피나 담배향도 흔적으로 그친다. 그야말로 보급형이다.
보급형 와인이라고는 하지만 즐기기에는 무리 없는 지점을 지나 굉장히 훌륭한 지점도 많았다. 한 잔 권한다면 주저없이 택할 만 하다. 특히 이 날은 순대를 곁들였는데, 순대와의 호흡에서 나는 감동을 느낌과 동시에 슬픔을 느꼈다. 사랑해 마다않는 궁합이지만 서울에서 순대가 설 자리는 적다. 예외적인 곳으로서 을지로에서는 순대를 먹기 위해 줄을 서곤 하지만 나는 이미 지방에서도, 수도권에서도 몇 군데의 순대들을 잃어버렸다. 내가 꽤 오랜 시절을 살았던 대전광역시에서만 나는 세 가지의 순대를 잃어버렸는데, 그 중 한 곳에서는 재개발로 섭섭치 않은 보상을 받은 할머니의 등뒤에서는 치기 어린 농담을 건네보기도 했지만 쓴맛은 내 입안에 여전히 남아있다.
까베르네 소비뇽의 높은 탄닌계 화합물의 밀도에서 오는 떫고도 매혹적인 감각과 짙은 과실미보다는, 더욱 단맛이 적고 젊은, 무더운 랑그독이나 론의 작황이 좋은 최근의 어린 와인들의 호흡이 더 좋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해서 와인은 까다롭게 고른다. 그러나 정작 순대는 어떠한가. 프랑스의 순대로 불리는 부댕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 질 수밖에 없다. 한국 순대가 프랑스의 내장 요리보다 열등하냐고? 천만에! 그러나 당면이나 양배추 따위를 채워넣은 가짜 순대에게만큼은 죄가 있다. 아직도 민중 사이를 떠도는, 케이싱이 식용 비닐이라는 공허한 담론은 오가는 사이 그 속에 채워지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리고 재빠르게 일원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밋밋한 탄수화물 위에 흔적처럼 올라간 향신료의 맛. 왜 순대를 무엇에 찍어먹을지에 대한 논쟁만 깊어지는가 이해할 수 있다. 나에게 순대는 세대 갈등의 음식이자 지키고픈 전통이었다. 동물의 도살부터 그 냄새까지 혐오하였던 어른이 계셨으나 나는 그것을 사랑하고 지키고 싶었다. 돼지가 도살된 순간 우리는 그 죽음을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그 전부를 맛본다. 가장 고귀한 고기 뿐이 아니라 그 내장, 피까지도 버릴 수 없다. 맛마저도 훌륭하다. 약간의 사치를 부려 고기를 조금 다져넣을 수 있다면, 돼지 기름과 선지가 뒤섞이는 사이에 완성된 맛은 검붉은 포도주에도 환상적으로 어울릴 뿐 아니라 한 끼 식사의 반찬으로도 매혹적이다. 그러나 도심 복판에서 훌륭한 와인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평범하게 좋은 순대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전등 아래 와인잔에서는 창창한 미래가 보이지만 순대의 미래에는 어두움이 드리운다. 참기름과 깨소금의 힘에 더불어 당면 순대를 삼키는 순간 순대에게는 미안함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