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âteau Cantemerle, Haut-Médoc, 2013
새삼 뻔한 보르도였다. 모두가 알만한 방향성, 그런데 뻔하지 않은 빈티지. 그래, 2013년. 봄부터 추웠고 비가 쏟아졌다. 앞뒤로 10년을 살펴보아도 이해만큼 망한 빈티지는 없고 덕분에 싼맛에 셀러 어딘가에 처박아둘 수 있었다. 그러다 꺼낸 날이 아마 저 날이었다.
GCC가 이래도 될까? 라고 할만큼 맛의 밀도는 재수가 없지만 똥값에 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짜고짜 매도할 수는 없었다. 뚜렷한 카시스향, 가죽이나 정향 등의 향도 썩 쉬이 느낀다. 다만 문제는 역시 맛의 농도일 뿐. 모자란 일조량과 많은 강수량이 당연한 동네에 살다보니 봄에 비좀 내렸겠으려니 박살이 난 작황에 원망이 없을 수는 없다.
좋은 빈티지의 좋은 와인과 함께 유유자적, 자연과 시간을 누리는 와인이 진정 고급지고 더 가치 있는 삶이라고 씨부리고 싶지만 올해 유럽이 어떤 계절을 겪었나를 생각해보면 심경은 복잡하다. 물론 환경이 바뀌는걸 두고 손 놓고 있기에는 너무나 발달한 업계이므로 기후변화가 가속한다고 해서 바로 구정물같은게 나오지는 않으리라. 새로운 산지가 떠오를 것이고 새로운 양조방법이 발견되리라.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손을 놓고 있을 필요도 없을텐데. 과연 이 와인 산업을 떠받치고 있는 아래에 대해 우리는 어디까지 파악하고 대비하고 있는가?
기왕에 하나 더하자면, 아마 이 와인을 두고 조금 더 유하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평가의 내용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맛의 얼굴을 두고 blackcurrant, black fruits, savory, leather의 특징들을 논할 것이고 액체의 촉감에 대해서는 soft, light따위의 표현을 쓸 것이다. 전자의 경우때문에 여전히 보르도이지만 보르도 레드에 기대하는 그림과는 상반되는 후자의 이유때문에 '망빈'이다. 큰 틀은 존재할지라도 복잡성은 없고, 숙성의 잠재력은 커녕 씨알부터 풍미의 집적도가 지나치게 모자란 13년은 특히나 꺼려진다고 평가한다. 여기까지는 뻔한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잠시 머리를 굴려보자. 과연 세상에 이렇게 음료에 여러분은 까다로워본 적이 있는가? 콜라를 마시며 탄산의 구조가 주는 촉감부터 바닐라향, 캐러멜향의 집중의 정도를 따져본 적이 있는가, 혹은 막걸리의 바디를 두고 용도를 구분해본 적이 있는가? 와인에게는 쉽게쉽게 망빈 소리가 나오지만 다른 음식 맛없다 소리 하기가 힘들다. 사실 대부분의 진정 망해버린 것들에 비하면 감히 망했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망빈을 비난하기 전 한 끼니의 쌀밥이 주는 즐거움, 저녁에 걸치는 소주 반 병과 함께 맛과 행복을 진정 논할 수 있는 날이 오면 그 순간 나는 말하겠다. '멈추어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
그 때 나는 이 와인과 함께 결박되어 지하로 던져지고 기꺼이 멸망하겠다. 내 일이 끝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