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âteau Poujeaux, Moulis-en-Médoc, 2008
샤토 푸조의 역사는 길지만 이 빈티지는 그 전의 샤또 푸조와는 다른 와인으로 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푸조 특유의 라벨의 형태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이름, "ph. cuvelier"가 처음 각인된 해이다. Ph. D.도 아니고 ph.라니, 하고 묻는 이도 있겠으나 이는 현재 보르도의 거부 중 한 명인 필립 퀴빌리에의 이름이다. 그가 이 와이너리를 인수하고 낸 첫 빈티지. 필립 퀴빌리에가 프랑스 와인업계에서 얼마나 성공가도를 달리는지에 대해 쓰기 위한 글은 아니니 그렇다고만 치고 넘어가자.
경제논리로 30%의 오크통 12개월 숙성분과 나머지의 스테인리스 탱크 원액으로 혼입된다. 53% 까베르네 소비뇽, 43% 메를로 그리고 4%의 쁘띠 베르도.
"역시 보르도 블렌드는 보르도에서"를 외치고 싶었다. 훌륭한 구조감 속에서 스페인삼나무의 꺼끌한 향, 또 스페인삼나무와 아름답게 어울리는 시가향이 미각을 사로잡는다. 맛도 좋다. 그야말로 비단처럼 흐르는 가운데 입맛을 돋구는 살짝의 단맛은 동물성 단백질과 화음을 이룬다. 이거 vinous점수가 꽤 좋을 것 같은데, 하는 상상은 곧 현실이었다. AG 91. 나무의 수령이 썩 젊은 편임에도 과실미에 더불어 맛이 튼실하다. 12년이라는 시간은 과연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부족했다면 신맛 위주의 엉망인 맛일 수도 있었다.
"동네마다 다 AOC가 다르고 떼루아가 다르다"고 하지만 사실 이 한 잔을 두고 이것이 지롱드강을 끼지 않고 한 층 육지로 들어간, 물리스-엉-메독이므로 지롱드강을 마주보고 있는 뽀이약이나 마고와는 다르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과연 나는 보르도에 잡아먹힌 것은 아니었을까? 어쨌건, 이 한 잔 만큼은 옳았다. 그렇지만 잔류하는 고민은, 과연 나의 와인 입맛이라는 것이 스스로 서고 있는가 하는 지점이다. 상상 속의 보르도를 상상 이상으로 잘 구현한 양조자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편견이 생길까 두려워졌다. 보르도만이 정답은 아니다. 보르도를 즐기되 열려 있어야 하는데, 사람이 피로하니까 권위에 기대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