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kbook Politics,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20
책의 내용보다는, 내 감상을 통해 사실 이 책이 던지는 주제의식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글을 쓰고자 한다. 예외적으로 이 글은 독자에게 책을 읽자고 권하는 추천사가 아니다. 오히려 읽지 않아도 좋다. 대신, 나와 함께 생각해달라.
「요리책 정치학」이라는 제목은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을 연상케 만드는데, 몇 권의 요리책을 예시로 들어가는 것을 통해 주장을 펼치는 점 또한 그렇다. 그렇지만 이것은 부수적인 부분이고, 그래서 그 주장이 무엇이냐? 바로 요리책을 통해 요리가 레시피가 되고, 레시피가 다시 요리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 읽는 정치적 흐름을 찾고자 해야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자크 랑시에르의 대표적인 아이디어, le partage du sensible를 통해 요리책을 독해하는 것을 공공연히 밝힌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굳이 랑시에르를 먼저 읽을 필요는 전혀 없는데, 몇 가지 질문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우리가 어떤 요리를 레시피로 문헌화하고, 또 레시피를 보고 다시 수행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어떤 요리는 하나의 요리로서 굳어지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핵심이 굳어가는 과정은 굉장히 정치적이다. 예컨대 족발을 떠올려보라. 피난민들의 요리가 보급되는 과정에서 노두유와 팔각과 같은, 한국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조미료들의 존재가 등장한다. 팔각 먹는 자들은 한국인인가? 혹은 김치를 레시피화하는 과정에서 무쳐질 수 있는 야채는 누구인가? 컬리플라워 김치는 김치인가? 우리는 족발과 김치를 선험적 존재로 받아들이지만, 그 자체로서 이미 정치의 결과이며 정치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위기는 요리책들이 어떤 국가 또는 민족의 요리를 표방하게 되면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저자는 이탈리아 요리를 예시로 들지만, 한국 요리의 예시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김치, 비빔밥, 추어탕, 국시 따위의 요리들은 한민족이라는 개념의 발명 이전부터 존재했고, 이것들이 한국 요리로 규정된 것은 그 다음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그 구분짓기의 어려움을 마주한다. 중국의 장육과 우리의 족발은 어떻게 구분되며, 돈까스와 일본의 돈가스-외래어 표기는 이거다, '돈카츠'가 아니라!-의 구분선은 어디게 그어지는가?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이는 지극히 작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나폴리 피자가 이탈리아 음식으로 당선되었듯이 우리는 불고기와 비빔밥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민족을 지키기 위해 민족 요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김치를 둘러싼 갈등은 또 어떠한가. 10년 전에는 "기무치"와 싸웠고 이제는 "파오차이"와 머리채 잡고 싸우는 사이에서 김치는 정치가 된다. 김치란 무엇인가의 문제는 한국 요리가 어떻게 외국 요리와 구분될 수 있느냐이기도 하지만, 한민족이 어떻게 다른 민족들과 다른가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인도 요리, 이탈리아 요리가 사실상 평생동안 그 지역에 정주하는 사람이 먹어보지도 못한 요리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게 했듯이, 우리 또한 그런 경우를 종종 겪는다. 예컨대 한식재단에서 대하 잣즙냉채를 한국 요리 레시피로 수록하는 경우이다. 집에서 이거 단 한 번이라도 해드신 분? 고문서의 요리법을 다듬은 이런 요리를 한식으로 선포하는 이면에는 지배계급의 요리가 곧 민족의 요리가 되어가는 현상을 읽을 수 있다.
요리책은 요리되기 위해 쓰인다는 점에서, 요리하고자 하는 선택과 맞닿는 듯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분명한 간격이 있다. 한국인들이 제 아무리 자주 먹더라도 스타벅스 커피의 레시피를 한식으로 수록하지 않는다. 쌀국수의 레시피는 베트남이나 태국 요리로 소개될 것이고, 한국인들이 제 아무리 독특한 방식으로 조리하고 또 자주 즐기더라도 뚱카롱과 다쿠아즈는 프랑스 요리로 다시 선언되고 말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들은 일어나는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그 현실에 만족하는가? 이러한 요리의 정치학은 복잡하다. 정치는 요리의 발전을 가로막기도 하지만, 반대로 기여하기도 한다. 나폴리 피자는 요리의 정치가 없었다면 결코 지금같지는 않았으리라. 우리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결말보다는 질문이며, 현재보다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