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뚜아멍 - 2024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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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다 합쳐서 두 명이 운영하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한계, 그리고 그것을 한계로 인식하지 않는 발상이 마주하는 시작이 이 빵과 버터다. 전형적인 프랑스식 식사에서 빵은 환대의 상징으로 '단 한 조각'의 빵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적절한 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주장이 강한 버터가 그것이었다.

흰살생선을 으깨 버무린 것으로 만든 이 요리는 창백한 색만큼이나 그런 맛을 지니고 있었는데, 지나고 기억에 남는 것은 의외로 얇게 떠낸 양송이였다. 자세히 말하면, 이날 식사 중에서 어쩌면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것이 이 양송이의 식감이다. 1960년대 일본을 거쳐 종균이 수입된 낯선 버섯으로 그 이름에서는 한때의 위세를 실감할 수 있는 '양송이'라는 이름, 외래종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양에 고귀함을 나타내는 송이의 이름을 쓰고 있지만 양송이에는 송이와 같은 향이 없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물론, 향이 없는 버섯이라고 해서 반드시 천박한 것은 아니나, 양송이를 송이처럼 쓸 수 없고, 송이를 양송이처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양송이의 길은 무엇일까, 당연히 생식은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텍스처가 어떤 생각을 남겼다.

자유로움을 오가는 요리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지만서도, 이런 요리는 '우리 끼리만' 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는 발칙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당귀가 다가오는 맥락의 측면에서 말이다. 아주 낯선 것보다, 익숙한 것이 낯설 때 더욱 새로운 인상이 느껴지는 법. 희끗한 관자의 질감도 놓치지 않아야 할 요소이다. 보통 아름다운 갈색빛, 그리고 폭발적인 버터의 향에서 관자의 매력을 찾지만, 심부까지 이르는 텍스처에서 경이로운 집착을 맛본다.

주인공의 느낌은 그림이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면, 그림에서 닿지 않는 것에 대한 감상은 바로 다시 돌아와 양송이버섯이다. 기름에 튀기듯 볶아 졸아든 것 같지만 그런 조리법으로는 생기지 않는 미묘한 표면의 저항감, 그 안의 집중도가 접시 위 버섯의 위치를 확대한다. 진한 소스, 자연스럽게 씹는 행위를 유도하는 주인공의 두께와 맞물려 한 번 더를 버텨내는 조리의 섬세함. 비트로 덮어씌운 단맛의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그 옹호자가 되고 싶지 않은 측면이 있었으나, 그 질감에서 나는 생을 맛본다.

파스타와 두족류의 질감을 오가는 요리는 오르조와 루꼴라로 이탈리아-지중해스러움을 드러내면서도 관자에서와 달리 생각지 못한 측면에서 다가오는 고온의 개입이 즐겁게 녹아든다. 작은 두족류가 가진 섬세한 질감과 지방의 쾌락, 그리고 그것을 감싸는 지중해의 지혜. 표현하기엔 짧지만 여운이 긴 요리.


푸아송-비앙드로 이어지는 흐름임에도 어느 한 쪽에서도 결코 무게감을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극의 절정이 길게 이어지는 인상을 주는데, 어쩌면 (요리사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어도) 이런 주방에 기대하는 바가 아닐까 한다. 비일상의 프랑스 요리. 단백질과 지방 조리가 주는 쾌락.


뛰뚜아멍은 작지만 확고한 주관을 가진 주방으로, 배운 기술로 가진 재료를 녹여낸다는 점에서 믿음을 준다. 이미 앞선 글에서 다룬 부분에 대해서는 또 다시 다루지 않았지만, 경향이나 흐름에 대한 생각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소스를 마무리하는 방식, 몇몇 재료의 질감을 잡는 방식에서 현명한 집착이 느껴지지만, 그것이 이 식당을 방문하게 되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