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9 - 호텔, 공간, 행키 팽키
서울은 호텔 체인들이 럭셔리 브랜드를 많이 둔 곳이 아닌데, 어쨌거나 경제 성장과 관광업 성장과 함께 여러 새 브랜드들이 런칭되고 있다. 그러나 럭셔리를 표방한다고 해서, 어떤 가치들을 표방하며 비싼 가격들을 내세운다고 해서 그에 걸맞는 서비스와 경험을 제공하게 되지는 않는다. 서울 호텔들을 살짝만 들추어보면 호텔의 이면, 오너와 호텔 체인, 그리고 피고용인들의 관계를 보면 럭셔리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적지 않다. 새로 런칭하는 브랜드라고 해도 결국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면, 또 오너가 단기적으로 장부에 찍히는 것만 고민하는 호텔이라면 소비자를 상대로 꿈꾸는 일은 기망밖에는 없다.
이러한 문제는 굳이 페어몬트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New kid on the block이 온 김에 굳이 짚고 넘어가긴 해야겠다. F&B 부문을 떠나서, 과연 서울의 럭셔리 호텔 사업은 대가에 응당한 경험을 제공하는가? 일회용기에 담긴 치약과 세면제부터 접객원의 입꼬리가 어디 쯤에 올라갔는지까지 지적하는 호텔 평가자들은 수두룩한데, 충분히 훈련되지 못하고 경력이 짧은, 즉 저임금 인력에 기대고 있는, 그나마도 드러나지 않는 부분은 전문성이 필요하지 않음에도 용역과 하도급으로 처리되는 현실에서 묻어나는 엉터리의 감각은 다들 느끼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런건 호스피탈리티의 본질적 측면이 아니라고? 카페트 아래에 먼지를 쓸어넣는게 언제부터 호스피탈리티의 자세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언제나 더욱 중요한 손님들(7계명 그 일곱 번째)만을 생각하는 특정 호텔 체인이야 관심도 없다. 그러나 해외 체인의 경우에도 거의 모든 곳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럭셔리의 열악한 본모습이 포착되는데, "어디보다 어디가 낫네"식에서 멈추는 결말이 허용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왜 했는가. 이 바의 설계와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겉껍질과 컨셉트와 같은 것들은 사무소같은 곳과 의사소통하여 나온 결과물이다. 호텔 체인에서도 도움을 주고 총지배인 이하의 본사 스탭들을 배치하여 관리한다. 나비와 로컬 푸드라는 컨셉, M29의 메뉴에 짙게 묻어나는 페어몬트의 헤리티지와 같은 요소들은 단지 오픈 팀에 있던 주방과 바의 실무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오픈한 이상 이것들을 어떻게 활용할 지는 이제는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기획 방향이 어쨌건,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보여주는 내용물이 곧 진실이다.
공간 한 켠에 바가 있고 식사를 겸용할 수 있는, 전형적인 서구식 호텔 레스토랑처럼 보이지만, 입구부터 백 바의 강렬한 시각효과에 이끌린다. 스파클링을 담은 끌차가 마중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샴페인 칵테일이나 아페리티프를 주문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흐르지 않는다. 공간을 공유하지만 바 메뉴는 레스토랑의 요리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지 않은 듯, 주문은 가능하지만 짝짓기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바에 착석할 기회는 식사를 마무리한 뒤, 식후주의 단계에 머무른다. 앉은 자리에서 브랜디를 비우는 것도 좋겠지만 기왕에 장장 두 시간 넘게 시선을 붙잡아온 바에서 페어몬트 호텔의 해리티지와 「마리포사」를 상징하는 음료 한 잔으로 식사의 여운을 전부 닦아낸 뒤 하루를 끝낼 수 있다.
사보이 호텔을 상징하는 <행키 팽키>가 이 날의 선택이었다. 바의 시그니처 창작 칵테일을 마시는게 글의 맥락에는 좋지만 식사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식후주의 역할을 하기에는 허브 향기가 짙고 음료의 질감이 부드러운 칵테일을 원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나는 알다가도 모를 나비의 정신보다는 페어몬트의 해리티지를 어떻게 계승하고 구현할 것인가. 서구적 맥락의 럭셔리에 대한 이해도를 어느 지점에서 보여줄 것인가를 느끼고 싶었다.
정석적인 1:1에 일본식 대시 보틀에서 페르넷 2대시, 먹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틀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건 최종적으로 완성된 음료의 온도였다. 원판은 셰이킹이지만 스터로만 완성한다. 스터로 만드는 칵테일의 경우 기주를 냉동/냉장/상온에 보관하는지에 더해 스터의 정도로 차고 묽은 칵테일부터 지나치게 강한 칵테일까지 판이하게 다른 인상의 한 잔을 만들 수 있는데, 과연 이 바의 주방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페르넷 브랑카의 뉘앙스가 탑노트부터 뒷맛까지 전체를 감싸지만 탱커레이 텐 특유의 성질이 전체를 배회한다. 베르무트에서 페르넷 브랑카의 피니쉬로 이어지는 강렬한 "펀치" 한 방의 칵테일, 게다가 식후라는 상황을 감안하면 의도인지는 몰라도 넉넉하지 않은 회전수 덕에 상황에 어울렸다. 그러나 마티니 잔을 완벽히 가득 채우는 용량덕에 칵테일은 필연적으로 추가적으로 더 식게 되고, 허브 뉘앙스는 짙어지는 가운데 맛의 복잡성은 한계에 다다른다. 탱커레이 텐에 맞서기에 현재의 제법이 최선일까? 또 "서울의 열악함.."을 말하기에는 이날만큼은 백 바에 무기가 모자라지 않게 준비되고 있었다.
음료의 완성과 함께 떠나는 바텐더, KRW 23000의 가격, 철저히 기본에 맞춘 행키-팽키. 과연 스스로 럭셔리를 표방하는 호텔에 걸맞는 결과물인지, 특히나 페어몬트가 매니지먼트를 맡은 사보이 호텔의 바가 <세계 최고의 바>로 선정된 역사를 기념한다는 칵테일이 과연 여기서 멈추어도 좋은지 여러번 스스로 되물었다. 행키-팽키의 본가에서 이 음료는 더이상 이렇게 기본기로만 만들어진 음료로 등장하지 않는데(주문은 가능하다), 사보이 호텔과 같은 것을 만들 필요는 없고 국내에서 호텔과 바가 동시에 느끼는 문제를 감안해야겠지만, 같은 철학은 공유할 수 있지 않은가? 1930년에 출판된 책의 레시피를 박제하는건 사보이의 정신이 아니다. 물론, 사보이 호텔이 에이다 콜먼-해리 크래덕으로 이어지는 20세기 믹솔로지 상징적 장소라는 점을 감안해서 완벽히 절제한 칵테일을 만들고자 마음을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메뉴 전체를 읽으면 그러한 설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보스턴에서 탄생하지 않은 보스턴 쿨러, <베드 인 피스>를 <허니문>과 맞추는 설정은 판선 손길의 흔적이다.
공간 전체가 바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무기로는 페어몬트의 무지막지한 해리티지까지 손에 넣었다. 레스토랑의 디저트 주방은 다소 능숙하지 못한 느낌을 흘리며 그런 손님을 맞을 바는 서울에서 통상 가장 콧대 높은 바들이 받는 KRW 20000 이상의 가격까지 갖췄다. 이만한 천재일우의 기회가 있을까. 물론 22시 영업 제한은 치명적이다. 그러나 오픈 반 년을 지내지 않은 곳에서 느끼는 것은 영업의 곤란함과는 무관한 차원의 허전함이었다. 오늘날 호텔 바, 특히 이런 공간에서 호텔 바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란 무엇인가. 지금의 답은 결코 만족스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