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옥 - 빵맛 빵, 피자맛 피자
지도를 확인해서 피자를 먹을 수 있는 곳을 찾다가 텅 빈 가게를 찾아내 충동적으로 들어섰다. 가게의 벽에는 무의미한 카푸토 컵이 힘겹게 걸려있었고, 종이로 된 메뉴판은 자주 젖어서인지 찢어진 구석이 보이는 가운데 가장 앞장에는 "피자계의 평양냉면"이라는 소개문구가 적혀있었다. 아,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구나. 그러나 다행히도 메뉴에 마리나라가 있었으므로 곧 몸을 의탁할 수 있었다. 도시인의 한 끼의 가격으로 마지노선에 아슬아슬하게 닿아있다(KRW 12000). 음료까지 한다면 아무리 서울의 직장인이라 해도 매일 반복하기는 어려워진다. 구내식당이 절실해지는 비용이다.
그렇게 받아든 피자가 다행히도 선입견을 부수어주었다. 이곳의 피자는 피자였다. 피자는 반죽 스스로의 본성 때문에 두터운 껍질을 가질 수는 없지만, 끝자락은 적절히 부풀어올라 빵의 미덕을 다할 수 있다. 신맛도 적절하게 펴발라져있는 가운데 수분이 적절히 날아가 피자의 맛과 피자의 질감이 있었다. 8조각으로 잘라주니 괜히 더 풍성한 느낌까지, 한 끼 식사로 피자 마리나라를 먹은 셈 치기에는 큰 모자람이 없었다. 그래, 종로 5가부터 1가까지 걷다보면 이런 식사 할 장소가 하나는 있어야지.
그래서 좋은 피자였는가 하면 엄격한 기준 하에서는 그렇지 않다. 세계를 다니며 피자를 배웠다고 하니, 세계의 기준을 들이대보자. 반죽의 레시피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단점도 장점도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협회식'이다. 문제는 오븐의 온도에 있다. 딱히 동의하는 바는 아니지만 나폴리의 구식 기준으로는 그을음bruciata이 없으면 지네 피자가 아니라고 따질 정도로 그을음에 집착하곤 하는데, 생각건대 중요한 것은 그을음 그 자체보다는 결국 열을 가함으로서 일어나는 화학변화, 즉 맛이 충분히 익었느냐라고 본다. 맛만 충분하다면 그 맛이 숯을 떠올리게 하는 거뭇한 맛이건, 짙은 황금빛의 껍질이 선사하는 잘 익은 탄수화물의 맛이건 나는 모두 품을 수 있다. 그러나 경일옥의 피자는 화덕의 온도가 높기는 하되 정작 반죽을 충분히 익히지는 않아 향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인상이었다. 다행히도 반죽이 속까지 적절히 익기는 하여 부드러운 피자 반죽을 씹을 수 있었지만 그을음이나 빵 어느 쪽의 향을 입기 전에 조금 빨리 꺼내졌다는 느낌이었다. 그와 대비되어 이상한 점은 오레가노와 바질이었는데, 빵에 열이 모자라게 전달된 느낌을 주는데 비해 정작 토핑이라 할 수 있는 바질은 바싹 타서 고유의 향은 거의 없이 캐러멜화-탄화의 맛을 전달하고 있었고, 오레가노 역시 말린 가루가 되어있었다. 아마도 굽는 내내 화덕에 코를 대고 있었다면 좋은 냄새를 맡았으리라.
중세시대의 거대한 공동체용 오븐을 본뜬 피자 오븐은 까다로운 물건이다. 과거에는 애초에 빵 자체가 한참을 익어도 괜찮은 단단한 것들이 주류였고 덩치도 컸지만 매우 높은 수분율과 극단적인 부피 대비 표면적비를 지닌 피자 반죽은 굽는 내내 사람의 섬세한 관찰을 요구한다. 오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 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다 같은 회사 밀가루, 같은 토마토 깡통, 심지어 화덕도 수입하는 업체가 몇 군데로 정해진 상황에서 결국 피자는 피자이올로라는 한 사람의 '어떻게'에 주목하게 만드는 음식이다. 그리고 내가 목격한 내용은 전술한 바와 같다.
- 피자계의 평양냉면이라는 표현을 보고 나는 도대체 평양냉면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졌다. 설마 '심심한'? 심심한으로는 부족하고, 녹진하고 슴슴하니 쫄깃쫄깃하고 안 달아서 건강하고 맛 없을수 없는 고오급 맛이라고 하자. 참고로 '고급'은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