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스 - 2022년 봄
계절별로 갯수의 하한이나 상한을 둔 것은 아니지만 시간과 예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므로 DINING 섹션의 게시글이 올라오는 주기는 썩 일정한 편이다. 그러나 종종 예외를 두고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는데, 이날의 경우가 그랬다. 기가스의 초기 요리는 상당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는데, 당시로서는 추상적인 방향성이나 손에 밴 습관 등이 느껴졌으나 이른바 와인바라는 영업형식 등은 의문이 남은 상태로 이후를 기약한 바가 있다. 결국 오래 지나지 않아 기가스는 코스 형식으로 재편되었는데, 과연 이것은 와인바와 같은 또다른 대중적 생존 형식에 불과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 무언가를 보여줄 것인가? 기가스의 요리가 과연 확장에 성공할 수 있을까 그 실황을 목도하고자 걸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방문 전
기가스의 예약은 전화, 혹은 서드파티 앱을 통해서 가능하다. 예약 후 문자안내가 한 번 있으며 이후로는 앱에서 자동 발송되는 알림만이 존재한다. 확인 전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요리
기가스의 초기 요리에 비해 코스 형식의 재편 이후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밭채소의 문법으로, 거의 모든 요리에 채소가 맛의 층(layer)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서울에 존재하는 몇 갈래의 서양 요리와 대비되는데, 첫째로는 세밀한 고려 없이 서양의 채소 문법을 한국에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이다. 그 안에서도 완성도의 스펙트럼의 폭은 넓은 편이지만, 경험에 의해 축적된 서양의 전통에 기대어 전형적인 결과물을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데는 큰 일치를 보인다. 사정이 나쁜 채소는 서양 수입품으로, 근근히 국산이 나오는 경우 국산품을 쓰기는 하지만 결국 전형적인 서양 요리의 모방을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 그 다음으로는 한식의 세계를 구성하는 재료들, 혹은 이외의 서양의 전형적 문법과 친하지 않은 재료들을 접붙이려는 시도들이 있다. 보통 크로스오버, 학제적인 요리를 표방한다고 하지만 채소의 쓰임새는 대부분 유사한 성질에 기반한 대체재로서의 기능만을 가질 뿐이다. 바질 대신 나물이나 깻잎을 이용한 페스토가 이런 경향성을 대표하며, 이런 요리를 하는 곳으로는 스와니예가 가장 우선해서 떠오른다. 스와니예의 호박꽃 튀김, 나물 따야린과 같은 요리가 이런 사고방식을 대변한다. 다음으로는 아무렴 낯섦이 주는 효과에 기대어 만드는 요리들이 있다. 밍글스의 소재 일변도의 전채들이 그랬다. 초당 옥수수, 중국산 송이버섯 등이 여러분의 이해를 도우리라 믿는다. 스와니예와 10월 19일의 스낵 오이 요리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이런 요리들 속에서 채소는 단지 전기적 요소에 불과하며, 그렇지 않은 성질을 지닌 것들은 다시 첫번째의 취급으로 회귀한다.
이러한 요리들의 흐름과 기가스의 요리는 어떻게 다른가? 기가스가 야채를 사용하는 방법은 그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야채를 맛내기의 문법적 요소로 채택하는 데 있어서는 전형적인 서양 요리의 모방과 성질을 같이하나, 그러한 틀에 갇혀있지 않는데서 구분된다. 무언가의 대체요소로 쓰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맛을 완성하는데 기여하므로 대체로서의 채소들과도 구분되며, 채소의 특징이 요리의 그림에 기여하되 그것에 전적으로 기대는 방식이 아닌 다른 재료와의 화용을 감안한 구성이 돋보이므로 마지막의 경우들과도 구분된다.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이를 설명해보자. 이러한 시도가 가장 훌륭하게 드러난 요리는 필-필 소스와 파를 맞춘 조개 요리였다.
흠잡을 데 없이 익힌 조개부터 필-필 소스까지 두터운 짠맛과 지방, 감칠맛이 조화롭게 식사를 이끌며 부르고뉴 화이트와 맞닿는데, 엉성하게 올린듯한 파는 단지 장식이나 착향료(flavoring agent)가 아닌 전체의 일부로서 기능한다. 완벽하게 구워낸 파 밑동은 단맛을 더하며 가볍게 처리한 윗부분은 특유의 매콤함으로 피로감을 덜어낸다. 좋은 파가 가진 압도적인 파괴력은 나머지와 합쳐져 하나의 독특한 인상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실파는 맛이 흐린 편이지만 두터운 파줄기로 향하는 씹는 감각의 매개로 기능하며, 결론적으로 이 요리는 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무언가로 완성된다.
기가스의 다른 요리들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좋은 야채의 위대함을 영리하게 이용한다. 물론 각각이 가지는 설득력에는 차이가 있다. 새우의 단맛과 짝을 지은 고구마의 단맛은 전형적인 갑각류 요리의 좋음을 넘어서기 어려웠고, 파이로 구워낸 돼지감자는 피에르 가니에르의 무스에 비하면 참으로 흐릿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오를 깨끗이 잊을 정도로 기가스가 가져가는 승리의 가치는 크다. 앞선 파가 단맛과 녹색 후추를 연상케하는 매콤함으로 독자행보를 보인다면 엄나무순과 두릅은 아예 허용되지 않던 영역인 떫은맛, 쓴맛으로까지 세계를 확장한다. 가히 기예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아래에는 반 나절 내지 하루를 당길 수 있는 독자적인 채소 수급방식이 버티고 있다. 좋은 나물은 막 자랄 때, 생명이 폭발하기 직전 가장 두터운 맛을 보여주기 마련인데 정확한 때에 거의 근접한 상태였다. 두릅은 참으로 어려서 숟가락으로 끊어 수프처럼 떠마실 수 있을 지경이지만 그윽하게 올라오는 마이야르의 감칠맛을 압도할 정도로 깊은 봄향기를 뽐낸다.
다음으로, 야채 바깥에서 기가스를 기가스로 만드는 특징은 비교적 손이 덜 가는, 단백질-소스 별도 조리의 문법과 그 사이를 조율하는 세 번째 요소라는 특유의 틀이다. 그릴을 이용한 갑오징어, 저온조리로 완성한 듯 보이는 생합이나 민어 등 익히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으나 소스가 되는 부분을 함께 끓여내는 등의 조리는 상정하지 않고 있는데, 아슬아슬하게 돌아가는 인력의 문제를 빼고 이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행히도 그 조리 상태가 좋을 뿐 아니라 적절한 손질은 거치고 있다. 이러한 아쉬움을 잊게 만드는 것은 세 번째 재료의 존재, 특히 이번에는 치즈였다. 정작 치즈 요리로 나온 푸름 당베르는 철 지난 배와 엉성한 질감의 세미프레도가 전문가의 부재를 통감하게 만들었으나, 기타 요리에서 치즈들은 남김없이 그 아름다움을 전부 표출하고 있었다. 쇠고기의 건조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곰팡이취와 연결한 리바로, 브라운스톡을 응용한 뵈르 블랑의 유지방-짠맛과 연결한 브리야사바랭은 분리되어있는 둘을 하나의 접시 위에서 잇는 가교 역할을 함과 동시에 전체적인 그림을 선명하게 만드는 데에도 기여한다. 횡적 병렬보다 좋은 방식이 분명히 있긴 하겠지만, 여타 서울의 식사와 비교하면 이미 기가스는 앞서나간다. 여타의 주방에서는 不知로 인해 시도되지 않는 방식들이 기가스가 가진 넓은 폭 안에서는 자유롭게 구현된다. 치즈의 관리와 품질에 대해서까지 논할 수 있는 수준에 가장 근접했다(여기는 알레노와 가니에르도 치즈를 포기한 나라다). 굳이 실패작을 하나 꼽자면 스트라치아텔라로, 어디서 무슨 물건을 구했는지는 몰라도 특유의 조직감이나 섬세한 풍미가 거의 느껴지지 않아 놀랐다. 그리고 치즈에 대한 설명을 준비하는 방식은 매우 아쉽다. 치즈는 재료, 수분, 몰드 등 명확한 범주화가 가능한 몇 안되는 식재료임에도 인상에 기대어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게 남은 지점은 조리의 디테일이다. 이는 전적으로 헤드 셰프의 개인기, 직관에 기대고 있는데 어떤 것들은 통하고 어떤 것은 통하지 않는 가운데 의도만이 빛난다. 사이펀이나 핸드블렌더 등을 이용한 텍스쳐의 변형은 아무래도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나, 레체 데 티그레에 배치한 샐러리, 그리고 근육의 배치에 따라 잘라낸 고등어의 씹는 감각은 아주 훌륭했다. 씹혀야 할 것들이 씹히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넘어간다. 전적으로 요리사의 능력이다. 이외에도 전반적으로 선명해야 하는 맛들이 선명하다. 소스는 신나게 짜고, 깻잎으로 만든 레체 데 티그레는 필요할 만큼 쓰며, 타르트 오 시트롱를 뒤집은 디저트 접시의 레몬 커드는 정직하게 시다. 그렇다고 맛이 단편적이지도 않고 적절히 층을 이루고 있으니 즐거움은 이어진다.
한계 역시 더욱 뚜렷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첫째로는 여전히 빵이다. 브리오슈가 나오는데 어느 지점에서 잘못되었는지 몰라도 버터의 비중은 높되 빵이 이미 거의 마른 상태로 속이 부스러지기 직전이었다. 브리오슈를 가를 때 나오는 풍성한 향기 역시 휘발된 채로, 중간이 되어서야 등장하는 외주 제품 빵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빵을 외주로 주는 사정이므로 굉장히 제한적으로 제공되는데 여러모로 경험에 빈칸을 만든다. 빵의 자주화, 최소한 괜찮은 조건의 재협상이 절실하다. 빵이 모자라다. 둘째로는 디저트, 결국 첫째와 묶어 패스트리 섹션 셰프의 부재인데 디저트에 가깝게 준비되는 치즈 접시와 진짜 디저트 모두 의도는 이해가 가지만 그것을 완성하기 위한 세부사항이 다소 엉성하다. 얼린 시트러스를 이용해 반죽을 대체한다는 시도는 재밌지만 결론적으로 남은 인상은 잘 구운 반죽의 그리움이었으며, 세미프레도는 뻔한 기계와 브아롱 냉동퓨레로 만드는 물건을 넘어서는 장점을 드러내지 못했다. 다른 요리들은 셰프가 가진 창의성에 기대 단점을 가릴 수 있지만 제과, 제빵은 결국 노동집약적인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만다. 인력의 부재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는, 한계라고 하기에는 같이 묶일 성질의 것은 아니나 기대해볼만한 지점으로 가지고 있는 밭을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지점이다. 어린 두릅을 필두로 하는 밭채소들은 기가스의 대들보이자 자랑이지만, 봄이라는 계절이 되고 보니 거꾸로 한식의 봄의 전경에는 산과 들이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계속해서 남았다. 봄을 상징하는 식재료는 채집의 채소들, 산나물이 아닌가. 야생 참나물, 취나물이나 고사리같이 산에서 자라는 나물들은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었는데 밭에서 기르는 채소를 쓰겠다는 포부가 거꾸로 한계를 긋게 되는건 아닐까 약간의 우려가 되었다. 물론 이런 종류들도 기르지 못할 것은 아니고, 또 꼭 써야한다 이것은 아니지만 누군가 해야 한다면 결국 이 사람들이 하게 되지 않을까. 노마를 따라한답시고 개미를 먹이는 경우들이 있는데 봄산행을 나서 나물 꺾어오면 그게 진정한 포레스트 시즌 아닌지? 기가스가 노마가 될 필요는 없지만, 기가스의 요리는 무한한 폭을 지니고 있으므로 무기는 많이 갖출수록 좋으리라.
총평: 기가스의 요리는 좋은 방향으로 충격적이다. 기가스는 나물의 섬세함을 죽이는 초고추장/고추장 바탕의 죽음의 행진도, 대책없는 낭만주의에 기대는 방치나 서양 풀의 대체재로 전락시키는 유사제국주의적 시각의 격하도 아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한국적인 채소를 소화하며, 그 결과들은 대체적으로 매우 훌륭하다. 시골의 풍경을 전원풍의 풍경화에 박제하지 않으면서 현대 도시의 무대위로 끌어올리는 요리는 서울에서 극히 드문 형식이며, 그 완성도는 시골인들의 시골입맛을 만족시키기에도 모자람이 없다. 비유를 하자면 이는 마치 이브 생로랑이 1966년~1969년까지 보여주었던 아프리카풍과도 같다. 누군가에게는 친숙하면서도 누군가에게는 낯설고, 독창적이면서도 익숙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경험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데 있다. 보편적인 유쾌함, 불필요한 자기표현을 절제하는 미덕을 갖춰 기가스의 요리는 성공한다. 조금이라도 더 낯섦에 기대거나, 게으르거나 혹은 무지했다면 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창작을 '간신히 해내는'데 급급한 단계에서는 불가능한 높은 단계의 요리이다. 단지 입구에 피키요가 잠자고 있으며 온라인상으로 지중해라는 단어가 써있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지중해 지중해 하지만 이번 코스를 통해 기가스의 요리가 가지는 지중해성이 무언가는 더더욱 분명해졌다. 주키니 꽃을 튀기거나 가지 속을 파내 치즈로 채우는 등의 지중해도 아니며, 성게소나 등푸른생선만 체리피킹하여 일식 흉내를 내는 지중해도 아니다. 기가스의 지중해는 사고방식, 살아가는 태도를 대표한다. 지중해 사람으로는 뒤카스, 지중해 아닌 사람으로서는 브라를 떠올리게 만든다.
앞으로 기가스가 가진 과제는 자신을 묶고 있는 바운더리를 밀어내는데 있다. 서울 복판 청담동의 충분치 못한 조리공간과 간소하게 준비된 도구들, 시대상을 반영하는 길쭉한 바 테이블은 물론 결국 한우를 포함한 코스를 구성하게 만드는 서울의 고객들까지도 기가스는 바꾸어야만 한다. 그들은 그럴 수 있기 때문에.
분위기: 아슬아슬하지만 모자라지 않은 거리와 가사 없는 음악, 낮은 조도와 깔끔하게 폴리싱한 스테인리스 스틸이 주는 도회적인 편안함.
서비스: 요리와 와인이 순서를 맞추지 못할 정도로 모자란 인력. 변수에 앞서 상수에도 적절한 대응을 하기 어려운 정도
가격: KRW 120000 단일코스.
음료: 요리에서 보이는 사고방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현실성 위주의 구성. 수요와 공급 모두 안정적인 유명 산지, 대형 생산자 바탕으로 서울 여느 곳들과 비교해 독특한 점은 없다. 어떤 와인을 내고 싶다보다는 낼 수 있느냐의 문제가 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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