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스 - 2023년 봄
이 식당이 생기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지중해"를 입에 올렸다. 입구 간판에 지중해라고 써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이전 글(아래 참조)에서 이 지중해라는 취지에 대한 간략한 해석과 그에 대한 의견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우려대로 사람들은 큰 고민 없이 지중해라는 단어를 소비했으며 레스토랑이 가이드에 실리게 되면서 이러한 장면은 더더욱 반복되었다.
여러분에게 묻자. 지중해 요리란 무엇인가?
- 말 그대로 지중해에 존재하는 요리. 모로코와 튀니지부터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전역, 터키에 이르기까지.
- 알랭 뒤카스를 필두로 한 남프랑스 바탕에 다른 국적의 요리를 혼합하되 허브나 야채, 생선의 향을 덮는 조미를 배제하는 방식.
- (특히 발렌시아/ 바스크 중심의) 스페인 요리.
초기 기가스의 요리에서 보이는 것은 3)에 가까웠으며 이것을 지중해 요리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두어 번의 방문을 통해 실제로 추구하는 방향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과연 그러한 이해에 동참하기에 지중해라는 표현을 남발하는 것인지 불만이었다. 왜 그런 가치가 굳이 지중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불만이 없던건 아니지만 그렇게 이 레스토랑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치고는 그러한 삶의 방식, 요리에 방식에 동참하는 흐름이 놀라우리만치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서울에서는 돈이 된다고 하면 금새 모작이 등장하지만 기가스의 모조품은 커녕 기가스의 스타일을 인정하고 다른 방식에 대해 회의를 던지는 시선마저도 없다. 미디어 스타로 올라선 정관을 필두로 한때 불어닥치던 한식 바람도 「가온」의 휴업, 「라연」의 강등이 보여주듯이 차게 식고 있는 현실이다.
요리
시작부터 고등어를 제외하면 조개만 4연타를 내는데, 실은 이때 기가스가 가진 프로젝트의 비현실성에 대해 고민했다. 가장 먼저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첫 조개, 동죽이었다. 전형적인 방식으로 손질한 새조개나 백합과 달리 동죽은 껍질과 분리해 조리하는 방식이 아주 낯선데, 그러다보니 날갯살이나 몸통이 대부분 제거되고 내장만 남은 가운데 두 겹의 오일로 향을 얹다보니 기름의 식감이 앞서나가 균형이 무너진 느낌을 받았다. 격을 위해 조개를 껍질째 내거나 뻔한 수준의 타르틀렛을 낼 일은 없겠지만 준비할 수 있는 무기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전반적인 소스의 점도 역시 최적이라기보다는 세 명의 주방 인원이 서비스까지 동시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낼 수 있는 최선이라고 느꼈다. 좋은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환경 때문에 일부 재료를 꺼릴 수는 있겠지만 소스의 방향이 좋았음에도 점도나 농도의 영점이 잡히지 않아 바라는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는 인상이 강했다. 예컨대 뵈르 누아젯 느낌의 버터 소스를 핸드 블렌더로 완성해 내지만 무거운 인상을 가진 소스를 뒷받침할 디테일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요리 자체의 발상은 아주 놀랍고 또 훌륭했다. 그을린 견과향에서 백합의 기분좋은 단맛과 잘 더해진 짠맛까는데 여운을 타임이 잘라내는 순간 발견하는 상쾌함까지 일련의 내러티브가 아주 즐겁다. 그러나 분명히 더욱 복잡하게, 다단의 내러티브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그 이상을 볼 수 있는 느낌이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또는 그러지 못했다. 하얀 색이 그 맛을 말해주는 튀김 역시도 조리를 대신할 인력이 한 명 더 있었다면, 시설과 동선이 받쳐줬다면 표면을 뻔한 방식으로 그을리는 것이 단맛의 파스닙과 이어지기 위한 또다른 선택지로 존재했을 것이다. 질감으로 먹는 재료인 만큼 그 재미를 다르게 표현하고자 한 아이디어는 좋지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방식으로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기가스는 열악한 내적 한계를 초월적인 발상으로 극복한다. 차라리 그 스타일-지중해?-이 노동집약적인 오트 퀴진의 안티테제를 추구한다면 더욱 그럴싸하게 표현될 것처럼.
초기에는 필-필 소스, 피키요 모두 전형적인 스페인식의 프레젠테이션을 따르고 있었으나 이제는 스페인의 형식은 이 한 접시에 쓸어담아 녹여내고 다른 요리들은 자유를 찾아 떠났다. 고추를 인퓨징해 향을 입힌 듯한 흔한 버터 바탕, 신맛을 얹은 화이트 소스에 새로운 색을 더한다. 역시 소스의 점도를 원하는 대로 잡아낼 수 없어 민어의 감칠맛에 균형을 맞추려면 소스를 한 번 더 부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러한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신맛과 알싸한 향, 그리고 살짝 얹어낸 필-필 소스의 짠맛과 껍질향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단지 스페인을 저글링하는 식당으로 남았다면 글을 당겨서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오징어 요리의 제법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만, 나는 저 검붉은 젤리 한 입에 오늘의 여정을 모두 보상받았다. 캐비어(국산 아님)따위는 불순물이라고 해도 좋았다.
오직 이곳에서만 가능한 발상이다. 재벌의 투자가 있어도, 돈 잘 버는 요리사나 유명인으로 대접을 받는 요리사들의 요리를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주소지는 청담동이지만, 이 한 접시로 기가스는 스스로를 다시 증명해냈다.
방향성은 명확한데, 이 요리마저도 소에 집착하는 한국의 현실을 벗어났다면 훨씬 밝게 빛났을 것이다. 적어도 여기에 투입되는 인적 자원을 아낄 수 있다면. 어차피 사람들이 바라는 그림을 그리기에 충분한 자원은 아니다.
(비둘기니 사슴이니 와규니 들이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디저트 역시 축소를 거듭하고 있는데 치즈 자체가 도매금으로 수입이라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하는 현실이므로 가타부타 따지기가 무의미하다. 다만 요리사라면 소르베랑 아이스크림 구분 정도는 알고 있자.
총펑: 성공하면 모두 청담으로 달려가고 강남에 있지 않다는 것 자체가 요리인의 실패를 의미하는 초소형 도시국가 서울에서 기가스는 드넓은 대지, 드넓은 바다 위에 섰다. 조선시대 상위계급의 요리나 사찰식 등 현대 한식의 숨은 족보찾기에 골몰하는 한국의 한식, 모든 것이 ZEN적이고 NOUVELLE하게만 보이는 서양의 한식을 떠나 기가스의 요리는 자신들이 밟고 선 흙과 바다의 맛을 자유로운 발상으로 그려낸다. 그 삶의 가치를 맛으로 설득해낸다는 점에서 기가스는 유의미한 프로젝트이다. 서울을 떠나 생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면 기가스의 프로젝트는 완성될 것이다. 요리사가 몸담았던 서양 요리 세계에서 드높은 긍지를 가진 레스토랑이 감히 시골에서 도시인이 쫓아오도록 강요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다. 브라, 트루아그로, 헤지스 마콩.. 기가스는 한반도에서 그들의 꿈을 좇는다.
앞서 말한 한국의 질식할 것 같은 현실이 기가스를 도시에 붙잡아두고 있고, 덕분에 기가스는 자신이 추구하는 요리를 갖은 제한 속에서 펼쳐내고 있다. 그럼에도 놀랄만큼 빛난다.
초창기 기가스의 스타일은 유럽 재료, 유럽의 조리방식(특히 스페인)을 이용해 쉽게 한국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이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레스토랑이 되었다. 과연 그럼에도 사람들은 같은 평가를 내릴까?
분위기: N/A
서비스: N/A
가격: 코스 단일 메뉴 16만원. 와인 짝짓기 16 또는 18만원.
음료: 거래처나 커버 범위의 확대가 필요해 보이지만 요리에 맞는 와인을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 같이 보기: 기가스 -소재주의, 신소재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