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스 - 덕산탁발화
글쓴이이기 전에 한 명의 독자로서, 음식 블로그와 후기에 기대는 소비자로서 고백하건대 나는 두 가지 유형의 글을 곧잘 피한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정보를 소비하는 나의 행태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는 딴소리형이다. 보통 가게 이름이나 특정한 요리, 와인 등의 키워드로 검색을 해서 들어갔더니 그것과는 무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경우이다. 어떤 식당에 간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프로야구 이야기로 가득하다던지, 그날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던지. 그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그것이 음식 블로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대형 포털의 플랫폼에서 운영하는 모든 블로그는 결국 조회수를 신경쓰기 마련 아닌가. 둘째는 저렴한 비유형이다. 나를 슬프게 하는 표현으로만 점철된 글은 누군가에게는 재미있고 재치있게 느껴질 지 몰라도 나에게는 아니다. 어떤 요리는 맛없없 이었고, 디저트는 고급진 누가바 맛, 전체적인 평가는 그날 나온 고급 재료나 식사의 양, 아니면 화장실의 손세정제 브랜드로 결정되는 글이다 싶으면 나는 조금이라도 빠르게 자리를 피한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닌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물어보지도 마시라. 당연히 이번 글은 그런 구차한 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가스의 늦겨울과 이른 봄의 흐름을 따라 두세 번의 식사를 하였고, 완성된 형태의 비평을 게시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 없는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겁하게도, 다른 이야기를 끌어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선종의 가르침 무문관의 이야기이다.
어떤 절에서, 하루는 아직 공양 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덕산 선사가 발우를 들고 식당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설봉이 묻기를, 어찌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가지고 어디를 가느냐 하니 말없이 방장으로 돌아가버리는 것이다. 설봉이 사형인 암두에게 이 이야기를 하며 묻자 암두는 천하의 명성 높은 암두도 말후구(末後句)를 모르는구나 하였다. 덕산이 이 말을 듣고 암두를 불러 네가 노승을 부정하느냐 묻자 암두는 조용히 덕산에게 무언가를 귀띔하였다. 그 다음 날 덕산이 다시 법상에 오르는 데 전날과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그것을 보고 암두는 드디어 덕산이 말후구를 얻었으니 천하가 그를 어찌할 수 없으리로다, 하지만 그도 3년 뿐이겠구나 하였다.
뒤에는 무문의 평창과 송이 이어지지만 하략.
이 이야기에서 덕산은 공부를 끝낸, 경지에 오른 삶을 보여준다. 절에는 공양의 때가 있고 그것을 알려주는 규칙도 있지만 덕산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단지 먹어야 한다 생각하기에 발우를 들고 식당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제자 설봉이 그에 의문을 표하매 설봉은 그러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더 재밌는 것은 뒤의 암두의 말이다. 스승이 되는 덕산이 과연 말후구를 몰랐다고 하니 정말 모르는 것 같아서 몰랐다고 하였을까? 제자인 암두가 스승에게 몰래 귀띔한 말, 이른바 암두밀계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말이었기에 하룻밤에 사람을 바꿔놓았던가? 생각건대 그것은 설봉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한 두 사람의 희극이요, 가르침을 위해서라면 스스로 암두의 꾀에 넘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덕산의 자비이다. 깨달음을 얻은 덕산의 삶은 너무나도 자유롭기에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버릴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깨달음은 단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니 제자의 깨달음을 위해서라면 스스로 암두에게 가르침을 받는 역할 또한 자처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자유로운 인생, 스스로 낮은 곳에 서더라도 무엇 잘못 될 게 있겠는가?
대뜸 선문답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본 정하완 요리사의 요리가 바로 그 덕산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역적인 레퍼런스를 띄는 요리, 예컨대 (노랗지만) 흰 치즈와 루꼴라, 염장육으로 이어지는 중북부 이탈리아-"한국식" 이탈리아의 뉘앙스, 식물성 오일과 인퓨전 기법, 명태의 껍질을 살린 필필을 필두로 바스크의 해리티지를 약간 더한,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향한 집착과도 같은 열정과 덧없음은 코치나 테크노에모시오날 특유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느낌을 준다. 핵심이 되는 것은 기가스가 단순히 어떤 기술을 쓴다는 데 있지 않고, 어떠한 표현을 위해서 그 기술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사용한다는 데 있다.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면 그렇기에 사용하지 않는다. 널찍한 고기의 단면 위에 가감 없이 올라오는 저 뿌리의 당당한 자태를 보라.
물론, 기가스의 요리는 스스로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완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몇 배는 되는 사람과 예산이 있어야 완성 근처라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기가스가 가진 포부는 크고, 근처에만 다가가도 느껴지는 엄청난 중력이 있다. 기가스의 요리는,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무나도 선명하고 자유롭다. 마치 요리라는 행위, 외식이라는 행위, 그리고 만찬degustación이 가져야 할 의미에 대해 기가스는 자신만의 그림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으며, 그곳만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덕산이 설봉을 위해 자세를 고쳐 잡았듯, 기가스의 요리 또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한 편의 춤을 추는 듯 그 변화가 흥미롭다.
고민해볼 지점이라면 질감이다. 기가스는 여느 식당보다도 질감에 대한 일관성과 주관이 선명하기에 감히 논할 수 있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하나는 뵈르누아젯 소스에 담근 생합. 대비를 강조하려면 아주 약간의 크루스티엉이 있어 뵈르누아젯의 그윽함을 호밀이 이어받음과 동시에 생합에 약간의 질감의 대비를 더하는 식으로 가능했을지 모른다. 어차피 몇 차례 씹어 내장을 터뜨려야 하는 조개를 쓰는 만큼 씹는 감촉을 더해도 좋지 않은가. 이전에도 지적한-여전히 깊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클라푸티 위의 우엉 아이스크림도 현실 속 좌표에 있다. 섬유질 덩어리인 우엉을 쓴다면, 그리고 뜨거운 파이 위에 올리는 실정이라면 아이스크림은 훨씬 안정적이고 밀도 높은 질감을 가져야만 한다. 마침 아는가, 우엉의 탄수화물 중 거의 절반은 이눌린이라고 한다. 아이스크림의 텍스처를 잡아주는 마법 같은 그 이눌린! 물론 이눌린만을 추출해서 분말로 쓰는 것과는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겠지만, 섬유가 풍성하여 한껏 끈적하게 우엉의 맛을 끝까지 가져오는 아이스크림, 나는 고민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파코젯 2를 사용하는 현실 속에서 생각처럼 나오지 않겠지만, 첫 한 입 이후에 주저앉는 모습은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이런 것은 결국 비용, 장비, 사람 어느 쪽에서건 더한 수고를 의미하는 법이고, 핵심적 사상의 전달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이러한 물리적인 기쁨에 대해서는 다소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이지만, 도전할 가치가 있는 식당이라 생각하여 감히 고개를 들어본다.
오늘 나의 글이 여러분께는 이상하게 느껴졌을 수 있는데, 참고를 위해 최근 NOKSU에 대한 피트 웰스의 비평을 제공한다. 뉴욕 타임스의 문화면에 실리는 기사로, 대 킴에게 옥동식과 같은 2스타는 분명 어린 요리사에게는 큰 축복이어야 하는데도 이런 느낌이다. 원문을 씹어보면 맛이 이렇게 복잡하다. 'Very Good'에도 이런 말이 섞여있는 현실이 놓여있단 말이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이 웹사이트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서구권의 표준 수준을 상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