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스 - 소재주의, 신소재주의
조리 분야에서 대부분의 철학으로 포장된 무언가들은 수입산이다. 분자미식학부터 발효에 이르기까지 그랬다. 서구에서 유래한 것은 좋았으되 왜 주목받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없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곧 잊혔다. 여러분은 아직도 TV 스타 셰프를 보며 그의 자연과학에 대한 도전정신을 떠올리는가? 그것은 피에르 가니에르와 그랜트 애커츠의 것이었다. 서울을 수놓았던 새로운 한국 레스토랑들은 우리의 발효문화에 무엇을 더했는가? 가만히 되짚어볼 일이다.
기가스를 둘러싼 정체성에 대해서도 이러한 의심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정식 오픈과 함께 제시한 메뉴를 보고 마음을 고쳐먹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자리에 앉았다.
기본적으로 기가스의 요리는 바스크를 완전히 표방하고 있다. 레스토랑의 소개부터 몇몇 웹상의 게시글들까지 지중해를 논하지만 흔히 프랑스 미식에서 말하는 지중해보다도 더 서쪽이다. 예컨대 메뉴의 가장 위를 장식하고 있는 에스칼리바다. 에스칼리바다를 단순히 제재로 채용한 것이 아니라 매콤함과 단맛을 이끌어내는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문어의 조리는 의도적으로 뻔한 갈리시아식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여기에 방점을 찍는 구성은 치즈다. 치즈 요리를 낸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침몰하고 만 서울의 무수한 프랑스식 표방 레스토랑을 앞질러가지만-서울에서 파리의 셰프를 내세운 두 레스토랑 역시 치즈를 포기했다! 이곳은 그런 도시다- 치즈마저도 바스크의 색이 묻어나는 옥시타니의 오소-이라티를 내세운다. 컨셉트는 한결같다. 스페인, 정확히는 바스크. 물론 바스크 레스토랑이 아닌만큼 최소한의 보편성 역시 갖췄다.
이러한 바탕에서 식사는 어떠한 경험을 제공하는가? 개별 요리 하나하나에 대해 논평하는 대신 떠오르는 인상 위주로 정리해보자(따라서 이날 먹은 음식 중 일부는 누락했다). 레스토랑이 앞세우고 실제로도 가장 처음 묻어나는 것은 소재주의다. 다행히도, 전형적인 한국식 음식의 소재주의, 예컨대 3대 진미니 하는 가짜 블록버스터부터 단지 수식어를 길게 늘어뜨릴 뿐인 허풍선과는 조금 다른 방향성을 보인다. 무엇이 다른가. 첫째의 방식으로는 조명의 방향을 비트는 방식이 있다. 예컨대 무 카르파초와 에스칼리바다의 두 요리로, 보편적 감각을 위한 최소한의 매개체와 균형을 갖추는 가운데 조명을 야채에 보낸다. 한껏 말라 맛이 응집된 무를 씹는 감각은 무라는 야채를 두뇌에, 감각에 새긴다. 에스칼리바다는 문법 그 자체에 덧댐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유사한 경험을 구성한다. 이들 야채가 선사하는 맛은 일견 고귀한 면까지 있다. 바스크 요리에 피키요Piquillo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을 리 없으니 자연스러운 성공이다. 둘째로는 맛의 조합(flavor combination)을 통한 쓰임새의 발견이다. 그냥 당근에 구좌당근 이름표를 달아주는 싸구려 방식보다 진보했다. 크럼블 위의 가지 아이스크림은 찬 크림으로서 홀로 서기에는 역부족이지만 푸름 당베르의 풍성한 지방, 견과 뉘앙스와 어울려 혀 위의 짠맛과 단맛 양쪽 모두를 완성한다. 그 순간 바바 가누즈가 단박에 떠오르지만 이방인에 대한 친절함이 더해지니 즐겁다.
이러한 의도들은 어울러 하나의 그림, 그간 요리사로서의 삶을 보여준다. 영화에도 장르가 있고 배우가 있듯이 재료가, 특정 식문화가 소재로 쓰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소재 뒤의 셰프가 있다. 그 즐거움이 아직 극에 다다랐다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애초에 그림이 이런 방식이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시도가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먹는다는 행위가 줄 수 있는 전형적인 경험으로부터 벗어난 무언가를 기억에 새긴다는 점에서 기가스의 요리는 그 의도에 비추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영업의 형태는 현실로부터 지나치게 억세게 엮여있다는 고민이 들며, 치즈와 디저트, 빵 등의 분야에 있어서는 의도 바깥의 한계를 느낀다. 외주를 준 빵은 신맛은 그럴싸하되 밀가루로부터 반죽, 굽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의 빵의 본질적인 즐거움의 공동이 지나치게 큰 가운데 그마저도 뜨거운 요리에만 곁들이도록 설정되어있어 겹겹이 쌓이는 자극에 맞서지 못해 곤란하다. 디저트의 무스는 아이스크림까지 곁들여 맛의 켜가 쌓였음에도 전체를 아우르는 흐름이 없었는데, 일반적인 무스에는 쓰지 않겠지만 이런 경우에는 최소한의 바닥판 따위가 떠올랐다. 밤과 배의 과육이 촉감으로는 가장 전형적인 파트 사블레의 빈자리를 메꿀 듯 느끼지만 맛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았다.
조리의 기초와 뚜렷한 의도를 지니고 있는 주방이므로 가능성이 크다. 카르파초는 촉감이 카르파초이며 단백질에 스며든 염분은 먹는 즐거움을 일깨운다. 마땅히 그래야 할 것들이 그렇다. 빵 같은 예외 역시 있으나, 감각으로부터 가능성을 엿본다. 가장 기억나는 것은 껍질로, 문어와 닭 두 가지 단백질의 껍질로부터 감각의 섬세함과 날카로움을 느꼈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주방, 준비된 주방이 아닌가! 그러나 그를 온전히 포용할 수 없는 도시에서 과연 어디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이곳의 요리는 썩 드러나는 주장을 지니고 있는데, 도시의 답변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