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쿠텐 라멘 - 맛있는 라멘의 안팎
「하쿠텐白天」이라, 아무렴. 크게 관심이 가는 이름은 아니었다. 본래도 라멘을 팔던 가게가 위치한 곳이었는데, 그 연남동의 반지하에 있다. 연남동, 가끔은 질식할 것 같은 동네를 굳이 갈 이유가 있겠는가. 있다면 역시 식사를 하기 위해 가는 일이다.
간만에 잘 만든 라멘이었다. 그 완성도의 뿌리에는 역시 레퍼런스가 있다. 다행히 숨기는 대신 이름부터 써있다. 이에케(家系)다. 얼마나 유명한지 마이크로소프트 일본어 입력기에 자동완성이 되는, 이런 시금치가 올라가는 라멘을 칭하는 말이다.
당연히 시금치만 올라간다고 끝은 아닐 것이다. 직업 특성상 일본 전역을 오가던 이가 돈코츠와 간장이라는, 존재하지 않던 조합을 상상했으니 두 가지가 일단 잘 어울려야 한다. 간장을 쓰기 시작하는 것부터 고민이다. 간장은 그냥 짠맛으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소금과는 확실히 다른 요소이다. 같은 분량 기준으로 짠맛을 만족스럽게 더하지 않으며, 단맛 또한 가지고 있다. 특유의 감칠맛은 매력적이지만 소금에게는 없는 요소이므로 통제는 고민이 필요하다. 간장의 종류 또한 무수하게 많으니, 소금이 말돈이니 암염이니를 따지는 차이보다도 아득하다.
가장 기본이 되는 국물의 두 가지 요소만을 벗어나면 성공적인 이에케 한 그릇의 디테일의 세계는 더욱 확장한다. 만족스럽게 기름지고, 짜고, 달고, 감칠맛 넘치는 국물은 그만큼 강렬하고 부담스럽다.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마셔주어야 하는 한 끼의 여정이 벅차다. 그리하여 감각을 열어재껴주는 마늘과 같은 강렬한 조미료가 한 축, 그리고 맛의 오각형을 다듬어주는 식초가 또 한 축을 붙잡늗다. 이에케의 본가에서는 마늘을 침 형태로 만든 것 등을 곁들이지만 어쨌거나 마늘과 식초, 두 가지가 핵심이다. 처음 제공된 형태가 맛에 있어서는 완벽한 형태가 아니라는, 다소 본질적으로 이상하다 느낄 수 있는 음식이지만 완성하는 경험(과연 이것이 필요한지는 나는 여전히 의문을 제기한다)을 더할 수 있다. 조금 더한 식초와 마늘은 곧 한 그릇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완성해낸다. 맛있다. 기름에서 오는 열량이 차오르는 만족감. 감칠맛이 제공하는 계속되는 식욕. 뜨거운 것이 몸에 감도는 감각과 면을 씹는 데서 가장 기초적인 대사량이 채워진다는 신체의 만족감이 전체를 휘감는다.
고명들의 역할 또한 놀랍도록 훌륭하게 잘 재현해냈다. 시금치와 달걀, 김과 돼지고기. 백화점같이 쌓아둔 것이 아니다. 제 나름의 역할이 있다. 제 나름의 맛이 있고 각자 국물과 면 사이에서 어울린다. 비록 바깥의 절임(즈께모노)이나 디테일이라고는 없는 김치가 아쉽지만 청량음료나 맥주를 곁들인다면 한 끼의 마스터피스를 경험할 수 있다.
자, 여기까지 한 그릇의 라멘에 대한 찬가였다. 너무나도 훌륭한 한 끼를 먹었기 때문에 나는 우울했다. 왜 이렇게 잘 만든 요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레퍼런스에 의존해야만 서울에 존재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서울 중심부를 손쉽게 넘나들 수 있지 않았다면 이 라멘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 다시 내가 있을 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맛에 있어 어떤 경험적 확장을 불러오지 않는, 철저히 레퍼런스에 기댄 복각 제품이므로 이 요리의 적합한 위치는 일상이다. 이런 요리를 하면 부도덕이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요리는 공공재다. 하지만 아우라는 없어지지 않는다. 일본에도 돈코츠에 간장을 섞은 라멘은 차고 넘치겠지만 여전히 많은 순례객들이 요코하마를 찾는다. 기술복제시대에는 나름의 룰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불만이 있는가? 바로 라멘의 이러한 독주가 가져오는 불균형이다. 서울의 라멘은 놀랍도록 훌륭하게 발전하고 있다. 첫째로는 면이 발전하고 있다. 확실하게 먹는 재미가 있다. 둘째로는 국물에 대한 발전이 있다. 국물 요리란 단순히 재료의 양을 늘리는가, 그것을 넘어선다. 먹을 수 없는 것-바로 뼈-을 녹여내는 근성으로 액화된 음식의 맛의 어떤 경지에 도달한 것들을 만나볼 수 있다. 액체이기 때문에 입안에서 느낄 수 있는 경험이 있고 특색이 있다. 그 안에 씹는 것들을 배치하여 경험은 더욱 진화한다. 셋째로는 그 문법의 다양성이 발전하고 있다. 서울은 하나의 대도시일 뿐이지만 일본 최북방부터 최남방까지 존재하는 라멘의 양식이라면 누군가는 찾아내서 소개한다. 우리는 그냥 쉽게 소비하고 비교할 수 있다.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매니아를 양산하고 있는 라멘의 마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잠깐 뒤돌아볼 수 있다. 매일 라멘만 먹을 수는 없다면, 우리가 다른 일상 속 음식에 대해서도 이렇게 열정을 다하고 있는가? 라멘을 먹지 않기로 작정한다면 그 대단한 연남동에서도, 관성과 악의의 산물을 마주볼 가능성이 크다. 당장 국물 요리만 살펴보아도, 우리 땅에는 우리 나름의 문맥이 있다. 머릿고기와 내장 등을 삶아 밥을 말아먹는 국밥이 그것이다. 라멘인들만큼 특정 계층의 지지또한 열성적이고 일상적으로 접하기도 어디보다 쉽다. 그러나 우리 국밥 문화의 현주소를 돌아보자. 맑으니까 고굽? 라멘이 웃는다. 라멘의 고명과 면, 그리고 국물을 돌아보라. 언제부터인지 다들 세계적인 요리사들만큼 까다롭다. 국밥의 건지와 밥, 그리고 국물에 대해서는 우리는 과연 국밥에게도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는가. 국밥은 다르다고? 나는 우리 국밥이 일본의 라멘에 뒤쳐질게 하나도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국밥도 맛있을 수 있고, 어드밴티지를 부여하는 것은 국밥이라는 요리에 대한 모독이라 믿는다. 정선은 곧 하수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에도 라멘 매니아들은 지겹도록 많다. 내가 즐기는 표현으로, 이런 요리는 영혼을 적셔주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리라. 기준도 모르겠으나 참으로 까다롭거나, 끝없는 낙관주의에 기대기도 한다. 어느 방향이건 상관은 없으나 '씬'에 어울리고 싶지 않은 것은 테이블 매너는 뒷전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본고장에서도 문제는 다르지 않은지 라멘을 먹는 사람들의 몰상식한 매너에 대해 다룬 책도 있었고, 또 그런 내용을 풍자하듯 서울에서 굳이 만화의 행동을 재현하는 이까지 있었다. 개인의 삶이야 자유지만 라멘을 가끔만 먹는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깊은 심연에 발을 담그는 대신 고민의 그릇을 조금 덜어내도 좋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