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의 새 시대를 위하여

한식의 새 시대를 위하여

한식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어령 선생의 말마따나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위대한 조리법 '비빔'에 있을 수도 있고, 떠나간 유행처럼 고귀하다는 궁중 음식과 양반집의 비법서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생각건대 구한말 이후, 일제시대와 6.25라는 민족의 비극과 함께 변화한 현대 한국 요리는 이들과는 적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현실적으로 한국인이 먹는 식사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나? 맵고, 달고, 뜨겁다는 양념에 있을까? 짜장면(우리는 이렇게 부를 수 있다)부터 프라이드 치킨에 이르기까지, 여러 외래 문화와 만난 곳에 있을까? 지역별로 다른 김치와 장의 삼신기에서 나타나는 발효에 있을까? 나는 우리가 빼놓지 않아야 할 지점이 하나 있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개인의 경험차는 있겠지만, 바로 유사품의 개입이다.

지나치게까지 말하자면, 한국인의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바로 트롱프뢰유Trompe-l'œil이며, 식탁에는 항상 모조품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그것이 한식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국인의 식탁에 존재한다는 점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고기와 야채, 두부로 만들던 만두소부터 돼지의 내장이나 피, 야채를 채우던 순대는 모두 속에 당면만 잔뜩 물고 있으며, 색소로 갑각류의 모양을 흉내낸 게살, 마찬가지로 밀가루에 어육, 색소로 빚은 어육소시지 등 냉동 어육으로 생선이 아닌 무언가를 창조한 제품들 역시 당당히 메인스트림에 올랐다. 그나마 원자재의 흔적이라도 알 수 있는 어묵은 밀가루 함량을 규제하는 법규에 의해 하한선이 지켜질 뿐으로 여전히 백라벨 확인이 필수이다.

이처럼 삼백산업의 발달, 관 주도의 혼분식 장려 등 식문화의 발달을 저해하는 저질 식품의 시대를 거치며 한국인의 식탁에서는 밀가루나 어육으로 만든 가공품, 그리고 당면이 개입된 요리를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니더라도 순대를 돈장에 피와 야채를 섞어 빚는다 치면 냄새가 나니 빼달라고 하는 객들이 많다. 순대에서 순대 냄새가 나지 않아야 하는 시대가 왔으니 진정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만 같다. 당면이 잔뜩 들어간 소는 한국식 만두의 정체성이 되어버려 아예 당면만 넣고 만드는 지역 특산품이 있기도 하다. 현대에는 당면을 배제하지 않되 원래의 모습을 살리고자 하는 절충안의 가공품도 보이지만 이미 어육과 당면이 휘어잡은 헤게모니를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어느 날 제주도를 찾아 아슬아슬하게 늦은 점심을 먹었다. 유독 제주도에서는 낮에만 먹을 수 있는 해장국. 국물은 참으로 사랑스럽지만 관성의 불행을 본다. 하나는 불덩이 속에서 갓 꺼내져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상태의, 어쩌면 빠르게 먹기 위한 한 그릇 요리의 본질에 반하게 마지 삼겹살의 역순처럼 보는 앞에서 레스팅-이것도 분명 하나의 조리 과정이다-을 거쳐야 하는 온도, 둘은 아름다운 국물과 선지를 가리고 있는 당면의 산이다. 넉넉하니 인심이라 해야할까? 국물 맛이 거의 배지 않는 당면이 이 국밥에서 해야 할 일은 없다. 만 원 언저리의 해장국이니 까다롭게 굴고 싶지 않지만 무의미한 당면의 존재에 반문하고 싶게 말들었던 수많은 탕국들이 지나간다. 서울에서 이삼 만 원 하는 쇠고기 탕국을 먹어도 아래를 들추면 습관처럼 남아있는 당면이 그 품격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잦다.

마찬가지로 관 주도의 질서로 규격화된 밥공기의 한켠에 당면을 한데 모아 걷어놓고 놓으니 이 시대를 청산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당면 없는 한식, 밥공기가 아닌 그릇에 담긴 밥을 먹을 수 있는 한식, 미묘하게 이전에 유행한 여자 연예인이 붙은 플라스틱 물통이 나오지 않는 한식, 수저통에서 식탁 서랍으로 퇴화하지 않는 한식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목놓아 부르짖는다.

게시글에 대한 최신 알림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