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as de Pirque, Character, 2010
하라스는 이날 시음회의 "어르신"격이었다. 특별히 오랜 빈티지라서가 아니라, 이 와인이 유행하던 시절이 "어르신" 시절이었다. 간단히 네이버 검색을 하면 알 수 있다. 이게 언제 쯤 유행했는지.. 강산이 변했을 시간이다. 이탈리아의 빅네임인 안티노리의 투자를 받은 대자본의 와인인데 장사가 영 시원치 않았는지 이 "캐릭터"라는 블렌드는 파문되어 홈페이지에서는 사라지고 말았다.
까르미네르와 까베르네 소비뇽을 중심으로 한 전형적인 칠레 블렌드, 보르도 따라잡기식 칠레 블렌드로 높은 수준의 산도와 함께 녹색 채소, 허브의 향이 무성하다. 높은 알코올 도수까지 가세하니 섬세한 음식의 향은 곧 짓밟을 우려가 제기된다. 65%가 까베르네 소비뇽이지만 19%의 까르미네르, 그리고 7%의 쉬라즈(나머지는 까베르네 프랑)가 더욱 더 또렷할 지경이다.
이러한 "어르신"은 그야말로 칠레의 대기업 와인의 장단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칠레를 읽을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수입 와인업계에서 가장 큰 물동량을 차지하고 있는 게 칠레인데, 그 경향성은 근래에 더 심해졌다. 수입 와인의 1/3이 칠레다. 그러한 인기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있다. FTA 체결에 더해 기존에도 좋은 가격 경쟁력 이야기가 빠질 수 없으며, 저렴하기만 한 게 아니라 그 가격에 맛까지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한다. 그렇다면 그 점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타국이라고 해서 크게 저렴한 와인이 없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같은 가격에서 맛으로 설득력을 더욱 가졌다는 것인데, 이 땅에서 바라는 맛, 기존에 소비되는 주류라는게 무엇이었나. 참이슬을 위시로 한 소주와 카스를 위시로 한 맥주다. 그야말로 죽음의 계단과도 같다. 소주와 맥주 맛과 칠레 와인이 비슷한가? 전혀 아니다. 감미료의 단맛으로 들이키는 소주와 희미한 신맛이나 곡류의 향이 있으나 결국 탄산이 주는 청량감에 의지해 잔을 비우는 국맥부터 서로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그 열쇠는 무엇일까, 바로 맛을 보지 않고 마시는 데 있다. 이들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죽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맛이야 아무렴, 가격 대비 알코올 함량, "알성비"로 밀어붙이고, 음식이 극단으로 향하는 만큼 아주-맛이 없거나, 아주-강렬한 맛인 것이 좋다. 전자는 맥주의 길, 후자는 소주의 길이다. 섬세한 맛은 한식의 강렬한 단맛과 매콤한 자극에 지워지기 일쑤다.
그 속에서 와인산업 종사자들이 찾아낸 열쇠가 바로 이 칠레가 아니었을까. 혹독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래도 이 와인은 개중에서 점잖은 축에 속한다- 강렬한 선은 한식의 고추장이나 참기름과 같이 강한 조미료에 맞서서도 물맛이 아닌 특정한 맛을 보여줄 수 있다. 기름이 잔뜩 낀 고기와의 호흡은 말할 필요도 없으니, 소주가 물러날만 하다. 점차 주저앉는 소주의 도수를 감안하면 앞으로 더욱 승승장구 할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식당에서는 4천원, 강남에서는 5천원에서 최고라고 하여도 8천원 정도의 가격인 소주에 비해서는 경쟁력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와인이라는 이름의 힘을 빌린다.
나는 칠레 와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까르미네르를 축으로 하여 일가를 이룬 이 나라의 산업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철저한 수출용 맛-칠레에서 재배면적이 가장 큰 품종은 파이스다, 세미용과 까베르네 소비뇽은 그 다음-이라고 할지라도 강렬한 녹색 향기는 남미 대륙에서 와인을 재배할 이유를 만들어준다. 칠레 와인의 성공은 한국의 와인 시장의 폭발적 성장을 견인했다. 그러나 칠레 와인의 맛은 우리의 맛으로 자리잡고 있는가 하면 나는 부정적이다. 시장의 의견을 견인하는 애호가층에서 칠레의 입지는 칠레 와인의 수입량을 생각하면 매우 비좁은 편이다. 근래 와인업계를 쥐고 흔들고 있는 유튜브 중심의 "가성비"타령을 생각하면 와인 업계는 양으로 성장했으되 질적으로는 아니올시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어느 나라에나 가성비에 대한 목소리는 있다. 와인 스펙테이터같은 매체가 괜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튜브 추천의 힘이 와인 스펙테이터에 못지 않게 커지는 동안 맛에 대한 담론은 성장하지 못했다. 칠레 와인은 풋내가 나, 한마디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맛의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지 못하고 있다. 와인은 아름다운데, 담기는 잔이 아름다운데 맛보는 이는 아름답게 맛보고 있는가. 칠레 와인은 마트의 주류 코너 한 켠을 당당하게 차지했지만 우리의 주류 문화를 보면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유명 블로거들이 앞다투어 복하는 가게들이 즐비한 몇몇 상권을 거닐다 보면 마주칠 수 있는 것은 그토록 칭송받는 새벽의 안전이다. 더 이상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 어떤 대단한 안주도, 어떤 향기로운 음료도 배를 채우고 정신을 잃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그 사이에서 현명한 이들은 마진을 챙긴다.
하라스의 캐릭터는 대량 생산의 논리가 접목되다 보니 섬세함은 뒤쳐지지만 탄닌과 과일, 그리고 녹색 채소의 굵직한 캐릭터로 강렬한 요리와 강렬한 알코올 속에 지친 혀에도 맛을 전해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 와인의 자리는 필요하며 다양성에도 기여한다. 그렇지만 칠레의 시대가 계속되는 것을 넘어서, 와인 소비자들은 갈라지고 있는 가운데 칠레가 소비되는 자리에는 찝찝함이 묻어난다. "오마카세"니 "내추럴 와인"이니 새로운 칠레 와인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반복될 것이라는 불길이 엄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