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바(BAR)의 간략한 역사 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전까지(1859~1945)
I. 왜 바의 역사인가
전통적으로 서양의 식사에서 음료는 요리의 바깥 취급을 받아왔다.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니는 미식학gastronomie의 영역에서도 오래동안 음료는 주로 와인이었으며, 와인은 교역품으로서 객에게 요리를 선보이는 주인이나 주방장이 아닌 지역을 대표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후에도 와인은 주로 별도의 전문가의 손에 의해 다뤄져 요리와는 별개의 영역으로 취급되어, 주방에서는 조리의 재료로 쓰이기는 하나 음료를 요리한다, 혹은 요리를 통해 음료를 만든다는 발상은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미국의 탄생 이후 시작된 바와 칵테일은 이러한 프랑스적 전통에 균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술을 마시기 위해 이것저것 섞는 풍습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음료가 주인공이 되는 공간과 그렇게 바라보는 시각이 정착되면서 미국의 칵테일 문화는 마시는 요리라는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었다. 이 미국적인 전통은 유통 및 보관이 비교적 용이한 주류의 특성을 이용해 빠르게 전세계를 무대로 확산되었으며, 드디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조리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경계를 무너뜨리기 일보 직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어 문화권 내에서 서양 요리와 미식학의 역사가 간략하게라도 문헌상 소개되고 교육되고 있음에 반해 액체 요리의 발전사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는 극히 불충분한 현실이다. 물론 역사를 아는 것이 앞으로 발전하는데 필요조건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발전사를 이해하는 것은 과거의 실행들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먹는 이들에게는 인문적인 상상력을 통해 재미를, 만드는 이에게는 미래로 나아갈 영감을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간략하게라도 이를 정리하여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유용하리라 판단했다.
II. 왜 일본의 역사인가
현재까지도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끈끈히 엮인 범세계적 바&믹솔로지의 시장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가치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서구에 일본식 바텐딩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는 우에노 히데츠구(上野秀嗣)를 필두로 세계에 긴자의 독특한 바 문화가 알려진 이후 서구는 일본의 바텐딩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2006년 런던의 노조미의 바텐더로 취업한 에릭 로린츠(Erik Lorincz)가 일본 연수에서 카즈오 우에다에게 가르침을 받고, 또 스타니슬라브 바드르나(Stanislav Vadrna)가 긴자 텐더에서 10일 연수를 받았으며, 이외에도 에벤 프리먼(Eben Freeman) 등이 얼음 카빙과 하드 셰이크와 같은 기술들을 영미에 소개하게 되면서 일본이 만들어온 바 문화는 서구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왔다. 에릭 로린츠가 이끄는 사보이 호텔의 바는 세계 최고로 명성을 얻었으며, 일본의 서적이 영어로 번역되고 바텐더들이 초청되는 등 일본식 바텐딩은 서구에 새로운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2010년대 이후 서구의 바텐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러한 일본의 영향이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하는가는 이제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에는 커피바 케이를 시초로 하여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바들이 산재해있음에도 일본의 미국식 문화라는게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서는 적절히 알 수 있는 길이 없어 이렇게 작성하게 되었다.
III. 일본의 개항과 호텔 바의 등장
긴자의 바텐더도(道)가 일본의 다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느니 하는 서양인들의 환상 젖은 추측이 있으나 당연하게도 일본의 바 문화는 미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859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함께 서양인들에게 처음으로 개방된 요코하마가 그 진원지가 되었는데, 당연히 그 뿌리가 미국일 거라는 추측과는 다르게 영국인들이 설치한 클럽과 호텔이 그 시초이다(참고로, 이런 영국인들의 클럽 만들기 관행은 전세계에 퍼져있다).
1870년 영국 왕립해군 대위로 전역한 G.T.M. 퍼비스(Capt. George Thomas Maitland Purvis)는 요코하마에 18번째 외국 숙박시설로 건립된 인터내셔널 호텔의 GM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곳이 기록에 나타나는 일본 최초의 호텔 바이다. 물론 1860년대 경마장 등에서 바를 설치한 기록이 존재하나, 전문적, 계속적으로 술들을 섞어 파는 곳은 이곳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퍼비스는 잡지에 광고를 내는 등 정력적으로 바를 운영하였으나, 그는 전문 바텐더가 아닌 군인 출신이었으므로 곧 미국인 바텐더를 초빙하게 되고, 요코하마와 도쿄 등지에 이렇게 미국인 바텐더들이 상륙하게 된다.
IV. 루이스 에핑어와 요코하마 그랜드 호텔
퍼비스의 칵테일이 역사상 최초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나, 그는 전문 바텐더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1880년 사망하여 일본에 많은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다. 이후 일본의 칵테일과 바가 서구에 유명세를 떨치게 된 곳은 인터내셔널 호텔이 아닌 요코하마 그랜드 호텔이었다. 그랜드 호텔은 미국인 자본가에게 인수되면서 바를 설치하고 미국에서 유명세를 얻고있는 바텐더를 초빙하여 홍보수단으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독일계 미국인인 루이스 에핑어(Louis Eppinger)였다.
에핑어는 독일 출신의 이민자로 아주 어린 나이부터 접객업에 탁월함을 보이는 남자였다. 어린 나이라 할 수 있는 24세에 이미 그는 자신의 호텔을 경영할 정도였는데, 1855년 주로 중상류층이 머무르는 인디애나폴리스의 라이트하우스 호텔을 임대 방식으로 인수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경영하였다.
이후 그는 사업을 확장하여 미국 각지에 호텔과 주류 수입과 도소매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게 되는데 가장 큰 명성을 얻은 곳은 샌 프란시스코였다. 그는 이곳에서 작은 술집을 경영했는데, 대단한 투자를 한 장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광업으로 큰 부를 이룬 이들과 증권거래인들 등으로부터 큰 인기를 누렸다. 이러한 그는 돌연 1891년 요코하마의 그랜드 호텔의 바에 부임하게 되는데, 짐작컨대 그의 사업이 항상 순항하지많은 않았던 탓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렇게 그랜드 호텔이 미국에서 초청한 실력 있는 바텐더는 일본에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고 본토에서보다 더 큰 명성을 얻는다. 그의 대표작은 뱀부(Bamboo)와 밀리언 달러(Million Dollar)로, 뱀부의 경우 완전한 그의 창작은 아니라고 보이지만 이것들을 세계적인 칵테일로 만든 것은 온전히 그의 공이 확실해 보인다. 에핑어를 통해 일본은 마닐라, 싱가포르 등과 함께 동방에서 독특한 음료가 있는 곳으로 거듭났다.
V. 긴자의 부흥과 어센틱 바의 등장
요코하마 인터내셔널과 그랜드 호텔 모두 본래는 서양인을 위한 시설로 유명세라는 것도 주로 서양인들을 한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이때 위스키 등이 일본에 처음으로 전래되기는 하였으나 마시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모두 서양인이었다. 이후 차츰 일본인들에게도 서양 문화가 개방되면서 이러한 국면에는 변화가 일어나는데, 여기서 중요한 두 가지가 공간적 배경인 긴자와 주인공인 인물 쇼고 하마다(浜田昌吾)이다.
먼저, 현대와 같은 긴자의 모습은 19세기 말에 그 뿌리를 둔다. 긴자는 당시 대화재로 거의 소실되고 말았는데, 이를 계기로 긴자는 서구화된 도심부로 재탄생한다. 서양 건축가들의 손 아래에서 조지아식 벽돌 건물로 재건축된 긴자는 백화점과 고급 상점 등으로 가득찬 번화가로 변모한다. 당시 긴자를 묘사하는 문헌들은 긴자가 시카고 등 미국 도심을 떠올리게 한다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이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긴자는 다시 멸실되지만, 오히려 1920년대의 아르데코 유행을 흡수하여 부활한다. 이른바 긴브라(銀ブラ)라 하여 긴자를 배회하는 것이 유행이 될 정도였으며, 이때부터 현대까지 긴자는 명실공히 일본을 대표하는 번화가로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긴자는 어떻게 증류주의 중심지가 되었는가? 그 기원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구식 건물에 모던보이와 모던걸들로 가득찬 긴자에 서구를 표방하는 술집들이 들어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긴자를 대표하는 두 가게가 카페 라이온(ライオン)과 카페 루팡(ルパン)으로 전자는 긴자의 에비스 비어홀의 모태가 되며, 후자는 지금도 바 루팡의 이름으로 영업중이다. 이들은 초기에는 여성 접객원들을 내세우는 전형적인 술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미국이 금주령 시기에 들어간 1920년 이후, 몇몇 바텐더와 객들을 중심으로 칵테일에 대한 탐닉이 여성 접객원들을 밀어내고 술집의 주요한 컨텐츠로 떠오른다. 이러한 수요에 맞춰 이른바 어센틱 바(オーセンティックバー)라고 하여, 바텐더를 중심으로 하고 말상대가 되주는 여성 접객원이 없는 바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라이온과 루팡 역시 이러한 방향으로 영업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이즈음하여 마에다 요네키치(前田米吉)라는 바텐더가 일본 최초로 코쿠테루라는 제목으로 칵테일 북을 간행하게 되며, "덴노의 요리사" 아키야마 도쿠조가 카쿠테루(혼합주조제법)이라는 책을 내는 등 칵테일의 주조법의 기록들이 등장하는 등 본격적인 칵테일의 시대가 열린다.
이러한 흐름을 이끈 인물을 대표적으로 한 명 꼽자면 쇼고 하마다(浜田昌吾)이다. 어떤 경로로 이 일을 시작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는 그랜드 호텔의 바텐더로서 최초로 서양인으로부터 바텐딩을 배운 일본인들 중 한명이었다. 이후 그는 그랜드 호텔을 나와 도쿄에서 도쿄 카이칸(東京會舘)에 스카우트되는데, 도쿄 카이칸은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대파되어 1년만에 폐업하게 된다. 그는 전술한 카페 라이온으로 이직하는데, 이곳에서 그는 밀리언 달러와 같은 그랜드 호텔의 칵테일들이 도쿄의 일본인들에게도 널리 알리는 기수의 역할을 맡게 된다. 1926년 일본의 극작가이자 문예춘추사의 창업주인 키쿠치 칸이 요미우리 신문에 "술이라면 칵테일, 칵테일이라면 밀리언 달러, 잡지라면 문예춘추(コクテールならばミリオンダラー・コクテール、雑誌ならばわが文藝春秋)"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대히트, 하마다와 밀리언 달러 칵테일의 유명세는 전국적인 것이 된다. 이 시기 기록을 살펴보면 이미 당시 일본의 문예가들부터 정치가까지 유력자들은 칵테일을 즐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들 중 다수가 하마다의 단골이었으리라 짐작하게 만든다.
또한 일본읜 근대사를 대표하는 호텔인 테이코쿠 호텔 역시 일본 바텐딩의 주요 무대였다. 1920년대 테이코쿠 호텔의 바를 일약 슈퍼스타로 만든 작품으로 "후지산 칵테일"이라는 게 있다. 이는 테이코쿠 호텔의 헤드 바텐더였던 오오사카 노부리후미가 호텔의 GM과 함께 창작한 것으로, 외국인들에게 선보여져 큰 인기를 누려 나중에는 IBA 세계대회에도 출품하게 된다.
이후 때는 불명이나 하마다가 카이칸으로 복귀하고(카이칸이 재개업한 것은 폐업으로부터 4년 뒤이다) 카이칸와 테이코쿠 두 곳에서 본격적으로 일본인 바텐더들이 양성되기 시작한다. 당시를 대표하는 인물들으로는 카이칸의 하마다와 서브인 혼다 요시키치(本多春吉), 테이코쿠 호텔에서는 수석인 오오사카 노부리후미(大阪登章)와 그 제자인 아사쿠라 신지로(朝倉信次郎? 浅倉進次郎?) 등 이들을 중심으로 긴자를 대표하는 바텐더의 계보가 시작되게 된다. 이들은 1929년 일본 바텐더 협회(NBA)를 조직, 1933년에는 마드리드의 세계 바텐더 대회에 참석하는 등 긴자의 바텐딩을 국제적으로 크게 알리지만 중일전쟁의 발발으로 전운이 드리우자 일본 바는 극심한 침체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는 서양 이름으로 가게를 경영하는 것조차 금지되어 라이온과 루팡 등이 모두 가게명을 변경하고, 테이코쿠 호텔과 도쿄 카이칸은 내국인을 대상으로 한 숙박시설이 되어 전후 GHQ의 등장까지 일본 칵테일의 발전은 여기서 잠시 멈추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