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바(BAR)의 간략한 역사 ② 이마이 키요시부터 현대까지
1. GHQ의 등장과 아메리칸 클럽 오브 도쿄
두 차례의 핵투발을 마지막으로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전까지 일본의 지배계급이 이용하던 시설들 역시 대거 미국인을 위시로 한 외국인을 위한 시설로 변모할 수밖에 없었는데, 도쿄 카이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도쿄 카이칸은 중일전쟁 개전 후 대정익찬회의 소유로 넘어가 대동아회관(大東亜会館)이라는 이름으로 쓰이다가, 도쿄 대공습 이후에는 도쿄도청에 임대되어 전시 사무를 처리하는 사무실로 쓰인다. 항복 이후에는 다시 GHQ에 의해 접수되어 아메리칸 클럽 오브 도쿄(アメリカン・クラブ・オブ・トーキョー)라는 이름으로 개칭, 미군 장교를 위한 클럽으로 재개장한다. 그러나 다이쇼때부터 이어지는 운영 인력은 그대로 인수하여, 일본인들을 고용하게 된다. 당시 일본은 폐허가 되어 칵테일은 커녕 제대로 된 주류 자체가 귀한 곳이었는는데, 이 카이칸은 그러한 환경의 몇 안되는 예외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일본은 1949년까지 아예 주류 판매업이 금지되고 있었고, 해제된 뒤에도 외국 술을 쓴 칵테일은 일반인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운영하는 아메리칸 클럽만큼은 그 예외로, 이곳의 일본인 바텐더들만큼은 유감없이 실력을 갈고닦을 기회를 얻었다.
처음 아메리칸 클럽으로 재개장했을 당시에는 인명손실이 많아 칵테일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혼다 한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곧 전전시기 혼다의 오른팔이었던 이마이 키요시(今井清), 아사쿠라 신지로 등이 이곳의 바에 서게 되면서 카이칸의 바텐더들은 빠르게 미군의 입맛을 배우며 일본 칵테일의 새 수도로 거듭난다. 이 때의 일화를 대표하는 칵테일이 카이칸 진 피즈(會舘ジンフィズ)이다. 기본적인 진 피즈를 만들되 우유를 넣고 셰이크하는 이 칵테일은 아침부터 술을 마시다보니 속이 편한 우유를 넣었다는 설, 단순히 우유를 플로트하는 미군의 습관을 보고 창안했다는 설, 상급자들에게 근무중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우유로 변장하기 위해 주문하던 데서 유래했다는 설 등 많은 전설이 뒤따르고 있으나 도쿄 카이칸에서 탄생한 오리지널이라는 점만이 분명하다.
2. 1950년대 일본 바텐딩의 부활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본의 재건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카이칸 이외의 장소에서도 일본의 술문화는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우선 1949년부터 「올 재팬 드링스 콩쿠르(オール・ジャパン・ドリンクス・コンクール)」가 개최되기 시작한다. 이 대회에서 탄생한 작품이 대표적으로 블루 코랄 리프(제2회), 키스 오브 파이어(제5회)가 있다. 그리고 도쿄 바깥에서도 다양한 바가 등장, 발전하는 시기 역시 이때이다. 대표적으로 카이칸의 바텐더였던 야마자키 타츠로(山崎達郎)는 1953년 삿포로 스스키노에 정착, 1958년 「BAR YAMAZAKI」를 개점해 카이칸의 바텐딩을 도쿄 바깥으로 퍼뜨린다. 또한 야마가타에는 이야마 게이이치(井山計一)라는 바텐더가 있다. 그는 1955년 바 「쾰른」을 개점하여 무려 2021년까지 영업을 계속하게 되는데, 그 기둥이 되는 대표적인 작품이 유키구니(雪国)이다. 게이이치는 이 칵테일을 고토부키야(現 산토리) 주최의 칵테일 경연에 출품, 우승함으로서 일본 전역에 유명세를 떨친다. 이외에도 고베에서는 1954년 바 고베 하이볼(コウベハイボール)이 개업, 현재까지도 내려오는 고베식 하이볼의 기원이 되었으며, 고바야시 쇼조(小林省三)의 「BAR SAVOY」가 개업하는 등 전국 각지에 어센틱 바 문화가 정착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후루카와 미치로(古川緑郎)가 있다.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클럽인 고준샤(交詢社) 빌딩의 바 상수시(サンスーシー, 1929년 개업·2001년 폐업)에서 바텐딩을 배웠으며, 전후 1951년 긴자에 바 「쿨(クール)」을 개점, 87세에 은퇴하기 전까지 영업을 계속하여 역사를 쓴다. 이외에도 추후 「BAR 5517」에서 이름을 날린 이나다 하루오(稲田春夫)가 아사쿠사에 「BAR 이나다」를 개업한 때도 이 때이며, 이외에도 당시의 명점으로는 마차실(馬車屋) 등이 있었다.
3. 이마이 키요시(今井清)
전후 한국이 어두운 시대를 보낼 동안 동시기 일본의 바를 설명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이마이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카이칸에서 칵테일의 제조를 담당하는 바텐더 중 한 명이었던 그는 전후 일본의 칵테일 문화 발전사에 있어 절대적인 존재로, 특히 마티니의 절대적인 유행을 이끌어 「미스터 마티니(ミスター・マティーニ)」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앞서 다루었듯 일본에서도 소수지만 칵테일과 위스키 등을 자주 즐기는 애호가들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칵테일을 창작하는 요구가 생기고 있었으나, 이마이 키요시는 고전적 칵테일을 경지에 이른 수준으로 완성시켜 현대 일본식 바텐딩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는 마티니에 쓰이는 기법인 스터에 대한 역발상으로 전국적 유명세를 얻었다. 본래 마티니란 진과 베르무트를 넣고 술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 얼음을 넣고 젓는데, 이마이는 진을 냉동한 뒤 스터를 통해 온도를 올리는 콜럼버스의 달걀과도 같은 역발상을 통해 마티니를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올려놓았다. 당시 미군과 일본인 모두 마티니를 주문하면 진의 캐릭터를 강하게 하는 방식의 주문이 많았는데, 이마이의 제조법은 이러한 니즈를 수용하는데 매우 강점이 있었다고 한다. 이마이는 긴자의 다른 바에서 냉장고에 넣은 진을 마셔보고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하는데, 그는 아예 진을 냉동함으로서 이 지혜를 완성한 것이다. 또한 그는 "세 번이면 손님의 취향을 알 수 있다"는 말로 대표되는, 섬세한 접객을 통해 고객의 기호에 따라 진과 베르무트의 비중을 조절함으로서 많은 고객들을 감동시켰다. 2:1을 기본으로 하는 마티니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드라이를 요구하는 고객들은 늘어나기만 해, 이마이의 마티니 역시 그에 대응하여 진의 비중이 늘었다고 한다. 참고로 「쿨」의 후루카와의 가게에서는 15:1의 주문이 꽤 있었다고 하며, 이마이가 허용하는 한계는 8:1까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이외에는 처칠 마티니니 원자폭탄 마티니니 린스니 웃기는 것들이 있다).
이마이 키요시가 일가를 이룬 곳은 카이칸이 아닌 마루노우치의 팰리스 호텔이다. 팰리스는 개점과 함께 이마이를 영입, 그에게 호텔의 바인 「로열 바」를 맡긴다. 바의 설계부터 전부 이마이의 주관이 반영된 로열 바는 일본 최고의 바이자 일본 호텔 바의 표준과도 같은 곳으로 거듭난다. 종래 도쿄 카이칸은 바 테이블이 곡선형으로 구성된 구조였는데, 이마이는 팰리스로 오면서 일자형의 백바를 채택한다. 또한 형형색색의 술병들, 그 아래에는 잔을 수납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냉장고를 병렬로 두는 구성 역시 이마이의 구상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백바의 구성과 디자인 등은 현재까지도 일본의 모든 어센틱 바의 귀감이 되고있다.
이마이를 유명하게 만든 또다른 에피소드는 어떤 보험회사(전해지기로는 메이지야스다)의 사장이 런던에서 편지를 보낸 이야기이다. 그는 본래 이마이의 단골로, 세계여행 도중 런던에서 이마이에게 "미국에도 가보고, 유럽에도 가보았지만 이마이군이 만드는 드라이 마티니보다 맛있는 마티니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곧 도쿄의 바에 퍼져 이마이의 유명세를 드높이게 된다.
4. 이마이 키요시의 제자들
카이칸과 팰리스 두 곳에서 전설을 써내려간 이마이는 그 스스로만큼이나 유수의 바텐더들을 길러내는데 성공했다. 1984년 그의 은퇴 이후 일본의 바텐딩을 이끌게 되는 그의 제자들 중 일부를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모리 타카오(毛利隆雄)
학비를 위해 도쿄 카이칸에 입사했던 모리는 이마이의 뒤를 잇는 2대 미스터 마티니로 유명하다. 자신의 가게를 내는 것은 1997년으로 다소 시간이 걸렸으나 1987년 이미 로마에서 개최되는 IBA 챔피언십에 일본 대표로 출전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가 정립한 마티니는 이마이와는 또 다른 모리만의 마티니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부들스 진을 써서 100번 스터하는 모리 마티니와 하바나 클럽 7년으로 만드는 하바나 마티니가 있다. 현재는 본인이 경영하는 「모리 바」 이외에도 전일본 최고령 바텐더인 후쿠시마 유조(福島勇三)와 「MORI BAR GRAN」을 경영하고 있기도 하다.
요시다 미츠구(吉田貢)
역시 1952년 도쿄 카이칸에 입사, 1961년 팰리스의 로열 바 오픈과 함께 로열로 이직한 그는 이마이의 수제자로 더욱 유명하다. 이마이의 은퇴 이후 팰리스의 2대째를 맡다가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긴자의 「바 요시다」를 물려받게 되어 팰리스를 나오게 된다. 이후 바 요시다는 입점한 건물의 개축으로 인해 폐점, 은퇴하였다가 위의 모리와 함께 2003년 「Y&M Bar Kisling」으로 돌아왔다. 2014년 사망, 현재 Y&M 바 키슬링의 자리는 모리바로 사용하고 있다.
우에다 카즈오(上田和男)
1966년 도쿄 카이칸에 입사, 혼다와 이마이의 가르침 아래에서 수련한다. 이후 1974년 시세이도의 자회사 시세이도 팔러에 입사하여 바 로지에(バーロオジエ)의 치프 바텐더로 근무하다가 1997년 긴자에 하드셰이크바 긴자 텐더를 개업한다. 대표작으로는 카이칸의 김렛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만든 김렛, 전일본 바텐더 경연 수상작인 시티 코랄 등이 있다.
기무라 후미히코(木村文比古)
본래 미쓰비시 중공에서 근무하던 엔지니어. 그의 어머니는 본래 게이샤로 유시마에서 「코하쿠(琥珀)」라는 술집을 경영했다. 미시마 유키오가 매일 진 토닉을 마시던 장소로도 유명한 인기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자식이 경영을 잇기를 원해, 기무라는 바텐더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바텐더 경력을 시작한 곳은 팰리스의 로열로 이마이와 요시다를 잇는 3대로 활동한다. 이후 가업을 잇기 위해 팰리스를 퇴사, 코하쿠로 돌아간다. 현재까지도 코하쿠는 그의 칵테일과 중후한 여성과의 수다가 뒤섞이는 독특한 방식으로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5. 이후
이마이의 직계라 할 수 있는 위 인물들은 다시 그 후계를 양성하여 이제는 그 계보를 정확히 그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제자들이 일본 각지에서 바를 경영하고 있다. 기억나는 것은 코하쿠 출신으로 「EST!」를 개점한 와타나베 아키오(渡辺昭男), 모리 출신의 쿠사카베 타카하루(日下部隆晴, 2018년 사망), 바 로지에에서 카즈오에게 사사받은 다나카 토시아키(田中利明) 등이 있으며, 이들과 무관하게 20세기를 지켜온 이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JBA BAR SUZUKI」의 스즈키 노보루(鈴木昇), 「에리카(絵里香)」의 나카무라 켄지(中村健二) 등. 일본의 바 문화를 가꿔온 또다른 계보의 바텐더들은 수 없이 많다. 독학으로 바를 창업, 다도와 문학과 칵테일을 결합한 경험을 선보인 오자키 코우지(尾崎浩司), 일본인 최초로 IBA 세계 챔피언에 오른 스타바의 키시 히사시(岸久) 등이 나름의 일가를 이루었으며, 21세기 들어서는 해외에서 더 큰 유명세를 얻은 일본인 바텐더들도 탄생하여 일본의 바 문화를 변화시키고 있다. 몇명을 언급해보자면, 우선은 신고 고칸(後閑信吾)이다. 신고는 20대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바카디가 개최하는 칵테일 챔피언십에 참여, 전미 우승과 세계대회 우승을 석권하여 파란을 일으킨다. 이를 바탕으로 런던 사보이 호텔 역사상 최초로 게스트 바텐딩을 하는 영예를 얻었으며, 현재는 세계 각지에서 바를 경영하고 있다. 그 다음은 나구모 슈조(南雲 主于三). 나구모 슈조 역시 일본에서 바텐딩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노부 마츠히사의 「Nobu」 런던점의 바텐더로 근무하며 국제적 경력을 쌓았다. 이후 도쿄에 「codename MIXOLOGY」를 개업, 호텔 바부터 내려오는 바텐더의 계보가 아닌 믹솔로지스트라는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해 하나의 장르로 만들었다. 이외에도 마티니 그랑프리 최초의 동양인 챔피언인 시노부 이시가키(石垣 忍)의 「바 이시노하나」는 시부야를 대표하는 바로 자리잡았으며, 「리틀 스미스」에서 전국적 명성을 얻은 호시 유이치(保志雄一)가 2004년 개업한 「바 호시(BAR 保志)」 역시 긴자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다.
6. 결어
이외에도 일본 각지에서 누군가에게 즐거운 한 때, 맛있는 한 잔을 제공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바텐더들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 중 누군가는 앞선 이들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그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평가를 내리기보다는, 흘러가는 세월을 함께 맞아가며 잠시 기다려보면 어떨까. 물론 20세기의 바텐더들 역시 이 글에 언급되지 않은 이들 중 많은 사랑을 받고, 훌륭한 서비스로 시대를 풍미한 이들이 적지 않겠으나 분량과 열정의 문제로 아쉽지만 여기서 접어야만 하겠다.
개항부터 현재까지, 이제는 200년을 바라보고 있는 역사를 인물 위주로 매우 빠르게 흝어보았다. 설명하기 어렵고 그다지 알고싶지 않은 일본의 협회간 분쟁(JBA-ANBA-NBA....)같은 것은 다루지 않았으며, 바텐더들에 대한 설명 역시 전반적으로 부실한 감이 있다. 이번 기획의 모자란 점들은 추후 다른 저자들, 혹은 독자 여러분의 지적으로 완성해갈 수 있었으면 한다. 모쪼록 모자란 글을 좇아와주신데 대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