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의 미래를 위한 용퇴
이어령. 황교익. 허영만. 20세기 한식의 이미지를 만든 이들에 의해 한식의 발전은 가로막히고 있다. 이들의 입김을 일선에서 제거하지 않는 한 한식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한식을 위해, 한국인을 위해 당장 이들을 멈춰세워야 한다.
디자인하우스 출간의 「K FOOD」는 본래 몇 권짜리 책이지만 첫 한 권으로 족하다. 이 한 권에 대한 주석을 통해 나는 이어령으로부터 한식을 지켜내고자 한다.
이어령은 가장 먼저 한식의 장점이 무미(無味)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밥은 맛이 아주 싱거워서 무無이며, 텅 빈 공허다. 그래서 빵처럼 밥 하나만 먹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짜고 매운 여러 반찬과 어울리면 밥은 새로운 맛을 띠게 된다. 밥은 국물 음식, 마른 음식, 매운 것과 짠 것, 딱딱한 것과 약한 것 등 온갖 반찬의 맛을 차별화하면서 동시에 융합한다. 말하자면 밥을 먹는 것은 입을 씻어 맛을 지우는 지우개 같은 역할을 한다. 매운 음식을 먹었어도 일단 밥이 들어가면 입안에는 언제든지 새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백지白紙가 마련되고, 그 백지 속에서 모든 음식이 제맛과 제 표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밥은 동시에 그 맛을 합산한다. 반찬은 밥의 텅 빈 맛 덕분에, 그리고 밥의 반찬의 맵고 짠 맛 덕분에 싱싱하게 살아난다. 한국의 음식은 이 관계의 틈새에서 존재한다. 흰떡의 맛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 안에 내재된 이 무미의 맛은 아직 맛이 형성되기 직전의 맛이자, 뭔가 결여돼 채우고 완성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맛이다. 또한 만월 직전 약간 이지러진 달 같은 맛, 막사발처럼 조금 더 손이 가야 하는, 완성 일보 직전의 맛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맛이다. 그림으로치면 한국화, 그 여백의 미학이다"라고 주장한다(p. 26). 초장부터 얼토당토않는 주장이다. 가장 먼저 일단 서양식의 빵 역시 언제도 홀로 선 적이 없다. 이어령은 빵이 하나만 먹는 것이라고 하지만 도대체 언제 빵이 홀로였단 말인가? 가장 흔한 방식인 햄버거와 샌드위치부터 정찬에서 제공되는 빵에 이르기까지 빵은 언제나 짝과 함께 제공된다. 하다못해 중세의 식탁에도 적어도 묽은 수프나 비쩍 마른 고기라도 나왔다. 한식을 숭상하기 위해 짐짓 모른 체, 아니 타자의 문화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지와 무례함을 견지하기 때문에 이러한 대조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빵과의 비교를 별론으로 하더라도 논지는 여전히 형편없다. 맛이 희미한 밥이 반찬 간의 가락을 연결한다고 하는데 이는 단지 병렬의 흐름일 뿐 선으로 연결된 경험이 아니다. 한국의 미식을 하겠다고 하는 서울 한식당 그 누가 무미의 흰 밥을 내는가? 뭇 사람들이 칭송하는 미쉐린 가이드에 따라 떠올려보자. 라연***, 육회비빔밥과 솥밥. 가온***, 솥밥을 내되 간장과 비벼먹도록 안내. 권숙수**, 솥밥. 주옥**, 스테이크에 양념한 밥을 곁들여 내는 식. 그가 칭송하는 흰밥과 반찬들의 오케스트라는 찾아볼 수 없다. 찬의 가짓수는 모두 제한적이며 그마저도 신맛을 담당하는 절인 야채, 김치류를 제하면 반찬 오케스트라의 단원은 남아나지 않는 수준이다. 이어령과 요리사들, 누가 옳은가? 한국화 운운하는 무미 찬양이 과연 왜 한국적인가? 이리 톺고 저리 톺아도 無作の作、無味の味 운운하던 로산진의 아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막사발 찬양하는 뒷 텍스트를 이어붙이면 이러한 아류 미학의 인상은 더더욱 짙어진다. "금이 가거나 옆이 터져도, 유악이 아래로 흘러도 상관하지 않는다. 일그러지면 일그러진 대로 저마다 쓰임새가 있다는 믿음으로 만든 그릇이다. 그저 꾸밈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빚어낸 자연스러운 그릇인 것이다."(p. 31)라니, 야나기 무네요시가 기자에몬 오이도를 보고 읊조린 문구랑 판박이, 참으로 판박이다. 미를 추구할 새 없이 실용적이고 투박해서 좋다는 야나기의 글조가 표현만 바꿔서 눌러앉았다. 야나기 무네요시와 기타오오지 로산진은 조선 미학을 두고 펜 끝을 겨눈 사이로 결론은 다르지만 이 일본인들의 조선관을 수용했다고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화룡점정으로 말미에 이내옥은 한국 그릇을 찬양하면서 "20세기 초, 이런 소반을 처음 접한 몇몇 일본 미학자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그들의 표현대로 '경악'하고 말았다. 소반에 담긴 조선 사대부의 미의식과 그것을 만든 장인의 이른바 '무기교의 기교'를 알아챈 것이다."(p. 144), "20세기 일본을 대표하는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자기와 목가구를 세계 최고라고 열광하면서, "어찌 이리 평범하단 말인가!"라고 말했다(p. 145)는 언급은 야나기 무네요시 메니페스토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다. 이어령은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하려 했을까? 야나기 무네요시는 옳았다? 그래, 한국 단색화의 큰스승이 아닌가!
서양인은 주어진 차림대로 받아먹는데 비해 한국인은 능동적으로 선택한다는 다음 페이지의 주장 역시 얼척이 없다. "서양의 음식 문화는 분리가 핵심이다. 그들은 고기에는 고기만, 채소에는 채소만 먹는다."(p. 34)고 주장하는데 그런 서양인이 세상에 존재는 하겠지만 그게 어디 보편인가? 단지 야채를 섬유질 상태 그대로 내는 경우가 비교적 적은 것에 대한 완전한 오해이다. 애초에 파르시와 같이 이러한 주장에 전면으로 배치되는 음식도 있거니와 육수의 재료로 쓰이는 등 보이지 않는 것으로 승화하는 경우에 대해 이해가 없으니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먹는 사람이 음식 맛을 만드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음식의 문화는 '되다' 'becoming'의 상태이며, 생성론의 개념이다."(op. cit.), 이런 주장은 이제 뭐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참고로 이 문구는 아주 자랑스러운지 몇 쪽 뒤에 커다랗게 다시 써놓았다.
서양에 대한 맹렬한 반감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서양의 육식 요리는 불로 구운 정도(rare, medium, well-done)로 맛을 차별화한다. 이와는 반대로 서양 음식에서 채소는 수프를 제외하면 대부분 날것 형태로 요리한다."(p. 44)는 언급은 스테이크와 햄버거밖에 모르는 아이의 치기어린 주장이며 "서구인은 채집 문화를 망각했으나, 유독 한국인만은 채집 세대의 흔적인 나물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p. 50)는 주장은 한국인이 마치 서양인의 반대개념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들린다. "옛날 한국의 여인네들이 집 밖을 나설 때 손에 들려 있던 것은 크리스찬 디올이나 입생로랑 같은 핸드백이 아니었다"(op. cit.)는 그의 일갈에는 현대 한국 여성에 대한 고까움마저 느껴진다. 이어령은 생 로랑이 마그레브 패션을 서양의 무대로 올린 위인임을 아는가? 빈 바구니 찬양하는 그가 같은 출판사 디자인하우스와 나눈 '럭셔리'에 대한 장고한 대담은 스스로 어쩌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급작스러운 동양 철학의 전개는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중국, 일본인들은 수저를 병용하지 않는데 한국인은 둘을 함께 사용하므로 음양의 조화가 있다느니, 국물 음식은 음양의 조화를 상징한다느니 하는 주장은 이리가라이가 고체 역학은 남성적이라고 한 것보다도 급진적으로 조악하다. 여기에 하나 더하자면 "오래 끓여서 만든 한국의 국물 음식은 원재료의 깊은 맛을 우려내는데 집중한다"라고 하는데 나는 이어령과 함께 파리의 플레니튜드를 가보고 싶어졌다. 꼭 보는 눈 앞에서 찬물에 날 것을 넣고 불을 떼야 국물을 내는 것인가? 오히려 한식의 찌개는 재료의 텍스처를 보존해야 하는 문제로 오래 끓이지 못하는 문제가 많다. 가정의 냉장고에 두 세번씩 드나든 찌개가 데울 때마다 맛이 달라지는 이유이다.
이런 사상 위에서 한식을 조립하려고 하니 그 뼈대가 찬란도 하다. 한복려 선생님부터 정관까지 다양한 필진을 모았지만 이미 의도가 뻔하므로 내용도 뻔하다. '한국의 특별한 맛'으로 궁중 음식과 사찰 음식, 세시 명절 음식이라는 세 키워드를 꼽았는데 이 사이에서 앞서 찬양해 마지않았던 '막' 음식-바로 보통 한국인의 음식은 사라졌다. 분명 책의 절반을 할애해 수렵 채집한 것으로 커다란 솥에 넣어 찌개를 끓이고 푸성귀들은 천편일률적인 양념에 무쳐 막사발에 담은 밥을 먹는 정경을 장광설로 늘어놓고는 두 페이지만에 왕과 왕후 이름부터 나온다. 그리고 바톤을 이어받은 반가 음식은 정혜경이 말하기를 "'시원하고, 담백하며, 맛깔스럽고, 깔끔한' 맛이었다"고 한다(p. 83). 無味는 어디갔는가? 정관의 "건강에 해로운 화학조미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는 언급은 내가 지금 허영만의 백반기행을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p. 104).
양반이 남긴 음식을 아녀자들이 먹기 때문에 생선 토막 하나도 잘 뒤집지 않았다며 봉건 사회의 윤리를 칭송하는 이어령의 밥상 문화 변호(p. 154)는 이제 아련하기까지 하다. 이런 상물림 문화의 끝세대로서 여자와 아이들을 몰아넣는 변두리 자리가 소외, 피지배의 역할이라는 것을 나도 얼추 안다. 먹고 남긴 생선 쪼가리 준다고 감사한 마음이 들겠는가? 잔반 줘서 참으로 고맙다. 그는 이를 '극기 훈련'으로 언급하지만 근대 부르주아들의 식탁 예절은 공수 훈련이라도 되는가. 애초에 조선은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이지 봉건 사회도 아니었는데 봉건 윤리라니 우스운 일이다. 언제부터 조선이 토지를 분봉했나? 신분제와 봉건제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 그러면 프랑스 제2제국과 프랑크 왕국도 같은 국체라 하겠다.
책 중간에 나오는 지긋지긋한 비빔밥론 따위는 생략했는데도 한 권에 벌써 이지경이다. 이 민족주의의 구태를 몰아내야 한식이 산다. "한식이니까 위대하다"고 목표를 잡고 근거를 덕지덕지 바르지만 한 두 장 벗겨보면 한 켠에는 일본 미학이, 한 켠에는 20세기식 반미주의가 뒤섞여있는 아말감이라는 본체가 드러난다.
이제 이어령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가 남긴 국수주의식 한식 비평과 그 영향력은 여전히 여기저기 비산하여 있다. 이제는 그와 함께 그의 애국정신 투철한 한식 이론도 보내줄 때가 되었다. 서양에 대한 안티테제로서만 존재하는 한식, 일본에 대한 남모를 사랑으로 가득한 한식은 이제 필요 없다. 랑벤이 교육자로서 렘브란트Rembrandt als erzieher에서 역설한 독일민족의 자연 친화적인 속성, 프랑스 문명과 대비되는 독일 민족의 문화 운운과 크게 다른 것도 없다. 민족주의라는 사고의 근본이 다 비슷한 배경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民以食爲天라는 고사성어는 한국의 사자성어가 아니라 중국의 사자성어다. <사기>, <한서>에 기원을 두고 있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