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의 의미, 동문선, 2005
이 책은 본래 예술평론에 가까운 에세이집이나 실려있는 단편 에세이 중 하나인 <먹는 사람과 먹을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 수록한다.
마치 비교적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종종, 그리고 널리 논의되는 '소비 사회'는 적어도 1백년 전에 시작된 경제적, 기술적 과정들의 논리적 결과이다. (...) 소비의 가장 직접적이고 단순한 형태인 '먹기'를 살펴볼 때 이런 필요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세계적으로 부르주아와 농부의 구별은 과다와 부족의 난폭한 대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대조는 전쟁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제한된 목적을 위해서, 배고픈 사람과 너무 많은 사람들 간의 구별이 아니라 음식의 가치에 관한 두 전통적인 견해들, 식사의 중요성과 먹는 행위 간의 구별이다. 처음에 부르주아의 견해에 있는 갈등을 주목할 필요가 이싿. 한편 식사는 부르주아의 삶에 있어 규칙적이고 상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 반면에 그는 식사하는 것에 관해 논의를 벌이는 것은 천박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 글은 그 특성상 진지할 수 없으며, 만약 이 글이 진지하게 간다면 그것은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요리책들은 베스트셀러이고 대부분의 신문에는 음식을 다루는 지면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토의하는 것은 그저 장식이며 (주로) 여성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부르주아는 식사하는 행위를 기본적인 행위로 생각하지 않는다.
존 버거의 부르주아의 식사와 농민의 먹는 행위의 논변은 그 자체로 완전에 가까워 덧붙일 말이 많지 않다. 그가 이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부르주아와 농민들만을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일종의 수사로 이해해야 한다. 식생활을 둘러싼 두 측면, 고상 떠는 부르주아적 식사와 생존의 취식행위. 부르주아는 식사에 자의적인 규칙들을 개입시키는 것을 유희로 삼지만, 농민에게 있어 식사 시간은 평온을 되찾는 휴식이다. 부르주아는 식사에서 지루함의 탈피, 쾌락을 추구한다. 그에 따라 마치 연극처럼 장치들이 둘러싸게 되고, 감각적 과잉이 무대를 장식하게 된다. 버거의 말을 빌리자면 "부르주아는 과식한다. 특히 고기를 많이 먹는다. 이에 대한 심인적인 설명은 고도로 발달된 그의 경쟁 심리가 에너지의 원천인 단백질로 그 자신을 보호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그의 아이들이 사탕으로 감정적인 추위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듯이.)"(p. 56) 생각건대 서방세계에 육류 보급이 보편화된 시대에 접어들어 이제는 육류 아닌 것들이 이 역햘을 겸하고 있다. 예컨대 한국인들에게는 "3대 진미"가 그렇다. 그것을 먹는 행위의 중요성은 "내가 즐겁게 그것을 먹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여기서 지금 이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버거도 나도 부르주아의 식사를 비판하기 위해 이러한 글을 쓰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양자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생활하지 않는-적어도 그렇다고 믿어지는- 오늘날 누군가는 어떤 때에는 농민의 식사를, 어떤 때에는 부르주아의 식사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농민의 식사가 스스로 수확하고 준비한 것에서 나오는, 환상 없는 현실이라면 부르주아의 식사는 만족될 수 없는 쾌락을 좇는 여정이라는 점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길지 않은(10쪽도 안된다) 내용인 만큼 나머지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여러분이 읽어보시면 좋겠다. 다른 글들도 썩 재밌지만 주로 뒤러, 고야 등 회화 작가들에 관한 내용이라 다루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