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꼬숑 - 2020년 여름

이 블로그는 왜 시작했는가? 한국어권 매체 중 외식에 대해서, 내가 기댈만한 글이 없었으므로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글이 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시작하였다. 음식은 예술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라는 주제에 대해서 답은 "예"라고 했다면, 그에 대한 입증책임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르셀 뒤샹이 하나의 주제를 제기한 이래 이제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예술은 존재할 수 있는데, 여전히 우리는 일부분을 극복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나는 음식을 통해 인간의 삶의 의지를,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시대가 왔고, 또 그렇지 않은 곳에도 그 광명이 비칠 때가 오리라 믿는다.

르 꼬숑은 예술의 다른 형식에 큰 관심을 가진 공간이다. 지나간 메뉴들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다른 장르를 음식안에 녹여내는 것이 이곳의 요리의 방향이다. 소설 등의 문학을 주제로 한 식사부터, 아뜰리에나 도서관과 같이 형식들 담아내는 형식까지 다양하게도 주제들을 다뤄왔고, 이번 여름의 주제는 영화였다. 위대한 이의 죽음의 직전일이었으나 이는 완전한 우연이었다. 음식과 영화라, 영상매체라는 그 형식 스스로도 음식을 완전히 바꿔오지 않았나. 둘의 관계는 몹시나 흥미롭다. 주제를 아주 잘 골랐으므로 곧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내 휴일 하루를 이 식사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전업 기고가가 아니며, 완전히 사비를 들이는데다 일 주일에 대부분을 노동에 투입하는 실정이므로, 내게 가장 우선되는 것은 내 경험의 행복이다. 그 기준에 만족스러운 곳을 찾았을까.

방문 전

전화 예약과 네이버 예약이 모두 가능하기에 네이버 예약을 통해 일 주일여 전부터 공석을 확인하고 3~4일 전 네이버를 통해 예약했다. 예약금은 별도로 수취하지 않으며, 결제는 현장에서 진행된다. 오직 예약 의사만 타전한다. 별도로 요청하는 정보는 없으며, 확인 전화 또한 없다.

메뉴는 미리 선택하지 않으나, 마음에 정해둔 것이 있으므로 메뉴판에 있는 '클래퍼를 든 셰프(감독판)'(KRW 116000)과 두 잔 페어링(KRW 49000)을 선택하였다.

요리

르 꼬숑의 요리의 요리를 하나 하나 미분하는 것은 일종의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고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니까. 그래도 영화 평론은 필연적으로 스포일러를 동반하니까 크게 신경쓰지 말도록 하자. 다만 오늘은 사진과 글을 번갈아 이야기하지 않을 생각인데, 그렇게 편집하는 노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리의 시작은 "클래퍼를 든 셰프"라는 주제에 맞게 클래퍼와 함께 제공되는 일종의 작은 빵(ficelle)다. 통상 이런 식사에서는 커다란 바게트를 썰게 되는 걸 생각하면 다소 의아했으나, 작은 빵임에도 불구하고 맛은 식사에 어울리도록 올곧았다. 나는 곧 이 빵을 반쯤 해치웠는데, 여기서부터 하나의 징조를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사진을 귀찮아서 몰아넣고 말았지만 위를 보시라. 장미 모양으로 말아낸 냅킨이 보이지 않는가. 냅킨 아래의 접시는 식사의 중간까지 방황했다. 버터를 바르기 위한 접시였던 것 같지만 이렇게 생긴 빵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도구를 이용해 버터를 바르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매끈하게 익은 표면에는 버터는 스미지 못하니. 잠시나마 방황하던 접시는 빵이 비워지는 순간 서버와 함께 사라졌고 빵도 접시도 당분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식사에 곁들이는 빵이 또 있겠지. 그러나 빵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빵을 주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다시 나온 것은-저 클래퍼와 저 빵이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번 빵은 빵이라기보다는 불에 가까운 상태였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빵에 대한 무관심은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빵에 대한 앞선 이야기가 이 글의 일종의 총론 역할을 해주므로, 그 감각을 잊지 마시라. 이후에는 영화 촬영의 다양한 기법에 대한 요리의 해석의 향연이 펼쳐지는데, 그 시작에 앞서 오로되브르로는 스크린 바깥, 관객석을 형상화한 영화관의 요리가 나왔다. 아이디어만큼은 높이 산다. 바로 이전 '도서관'처럼, 영화관도 하나의 주제가 될 수 있지 않는가. 주제의 선택은 훌륭하되 해석은 심드렁하다. 오징어랑 땅콩 그리고 팝콘이라. 거기에 여름 트러플을 버무렸으니 십 만원의 식사여도 좋은가. 오징어 튀일이 프랑스 요리의 흔적이나마 부여잡는 가운데 팝콘은 그야말로 팝콘이었는데, 짠맛마저 빈칸이었다. 영화관에서도 캐러멜이니 하는 변종들을 만날 수 있게 된 지가 오래임을 감안하면 지루함을 감추기 어렵다.

론 언덕배기의 비오니에와 맞추어 낸 두 번째 요리는 딜 꽃을 얹어낸 달걀 노른자를 냈다. 서양에서는 으레 달걀 모양 접시에 반숙 달걀을 담아내는 식의 연출이 있다. 이를테면 독일에서 습관처럼 먹는 일요일 달걀sonntagsei같은 것. 그것을 변주한 뿌리는 아마 루이 오티에와 장 조지의 영향을 받은 느낌이다. 물론 형식만. 갑각류를 삶아낸 포타주와 우리식 느낌의 달걀 찜이 뒤섞인다. 알싸한 딜의 향기에 혹했지만 이내 무던해지는데, 달걀 하나임에도 작은 숟가락을 이용하므로 닥닥 긁어먹다보면 맛의 층이 두텁지 않고 개별 요소가 강하지도 않으니 물음표가 남는다. 이러한 약-약의 문제는 이후의 타르타르와 비트에서도 계속된다. 그야말로 "콘트라스트"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비트의 신맛과 소고기의 옅은 맛은 어느정도 합을 맞추어 낼 수 있지만 이는 대비라기보다는 그냥 뭉뚱그려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애초에 대비를 염두에 두었으면 덮어 내고, 가루로 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만 대비이고, 전체로는 그냥 기름기가 적은 고기와 그만큼 신맛도 적은 비트를 반복할 뿐이다. 커다랗게 꽃아낸 비트의 잎사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디졸브"를 표현한 생선 요리는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다. 주제와는 가장 알맞도록 아이디어를 썼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경험하는 것은 식사이지, 영상 관람이 아니었음을 주지하시라. 맛의 구성은 농어와 그 뼈로 냈을 콩소메, 그리고 녹아든 간장이다. 뭐 반드시 루를 쓰거나 아니면 대체품인 울트라 스퍼스같은걸 쓰거나 하여간에 소스를 내야만 프랑스 요리인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콩소메 속에 녹아 하나되는 연출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연출을 하는 이유는 맛이어야 할 것이다. 화면전환을 할 수 있는 무수한 방법중에 디졸브를 선택한 이유가 있듯이, 음식에도 연출은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음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아시리라. 콩소메의 맛은 좋았으되 간장이라는 선택은 간장의 자리를 설득하기보다는, 간장을 사용하되 간장 느낌이 나지 않는 방향을 향했다. 농어의 원산지를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정확히 이게 브란지노인지 토종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맛의 결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일직선적인 가운데 살의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는 요리를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지점이므로 크게 신경쓰지 않지만, 맛의 경험을 조리의 과정이 더해내지 못할때 다시 부각된다.

당근은 이날 내가 가장 기대한 요리였다. 나는 서양 요리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 이 땅에서 자라는 것들이라 생각한다. 당근은 그중에도 가장 절실한 분야이다. 이런 당근을 소개하고 그 맛을 설득하는 것이 10만원, 주대까지 하면 한 사람이 15만원 가량의 식사를 하는 장소의 품격이다. 한껏 뿌려낸 계피가루에 올리브 오일까지 뿌려 완성한 당근 요리는 기대만큼은 아니나 선방했다. 당근과 계피의 궁합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경험을 뿌리로 하면서도 흰 때깔을 보면 아마 당근이 아닌 파스닙parsnip을 썼을텐데, 그만큼이나 좋은 단맛을 냈다. 이 퓌레만큼은 참으로 맛있었다는 기억이 또렷하다. 레스토랑의 소개처럼 검다기보다는 보랏빛이 돌아 제주도에서 또 자색 미니당근이라도 개발했나 싶었는데 맛은 당근보다는 쇠채scorsonère같은 쓴맛이 있었다. 이런 당근을 어디에서 구했나 싶다만 당근의 다양한 맛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영화로 치면 클라이막스에 다다랐을 뵈프 부르기뇽은 애석하게도 사진이 없다. 그러나 있을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여기까지 왔으면 나는 소스의 맛으로 객을 사로잡을 기회가 한 번은 올 줄 알았는데 여기에서도 그런 것은 없었다. 졸여내서 맛이 하나의 덩어리 안에 담기는 요리가 왜 몽타주인지 모르겠다. 샬롯과 표고버섯을 곁들였는데 본래 요리의 플레이팅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몽타주이며, 요리사는 그 요소 사이를 어우르는 조사를 삽입하여 문장으로 완성해야 하며, 프랑스 요리에서 그것은 소스의 역할이다. 그 어떤 설득력도 없는 와중에 맞추어 낸 까오르의 말벡은 병의 거의 마지막 남은 부분이었는데 강렬한 말벡이었음에도 산화의 낌새가 썩 있었다.

치즈와 디저트쯤 오니 글을 너무 열심히 쓴 것 같다. 프로마주와 데세르라는 것만 기억해달라. 미냐디스와 카페는 맛보지 못했는데, 내가 KRW 116000의 메뉴를 선택했음에도 서버는 내가 KRW 98000의, 미냐디스와 카페를 제외한 메뉴(이런게 왜 있는지도 모르겠다)를 선택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와 프랑스 요리의 형식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였다. 그녀가 무슨 죄가 있으랴.


총평: 컨셉에 잡아먹혔다. 메뉴를 구성하는 중책을 담당한 이들 사이에서 요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은 프랑스보다 뒤쳐졌으니까, 굳이 진보하려 하지 않아도 되지는 않을까. 그런 감각이 지배한다. 맛의 황홀함보다는, 음식 자체의 구성에 있어 음식 바깥의 것과 마주치는 경험에 무게를 둔 요리가 반복된다. 영화의 기법들을 주제로 해서, 이런 요리는 영화의 기법으로 치면 이런 기법이 아닐까, 이런 식의 엄밀하지 못한 짝짓기만이 반복된다. 이런 구성은 터무늬없다. 영화로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 않은가? 영화 한 편을 봤는데, 영화의 내용이 "영화의 기법에는 내러티브, 몽타주, 미장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같은 내용이면 그런 영화는 도대체 어떤 자리에 위치하게 될까. 나도 영화 좋아한다. <전함 포템킨>을 만들면서 감독이 중요시한 것은 방법론 그 자체였을까, 아니면 그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반란 장면이었을까? <자전거 도둑>은 사실주의를 어떻게 설득해냈고, <시민 케인>은 은유의 저력을 왜 사용했는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요리를 이렇게 대우하면 안된다. 위대한 작품들은 지금에서야 시대를 떠나 기법에 대한 예시로 수업에 소개되겠지만, 한 편 전체가 명작인 이유는 그 뿐이 아니다. 나는 둘 중 하나라고 느꼈다. 하나는 영화에 대해 생각보다 관심이 없거나, 둘은 요리는 영화에 비해 열등한 형식, 적어도 동등할 수 없는 형식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 주제를 이렇게 풀어낼 수는 없다.

요리를 사랑하던 시절의 흔적들은 여전히 남아 빛을 발하므로, 모든 희망을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 더욱 아쉽다. 비록 불덩이같은 상태로 내오는 것을 보면 그의 손을 떠났을 듯 하지만 빵의 공정은 서울에서는 좋은 축에 속하며, 당근과 갍이 요리 자체가 흥미롭고 맛있는 것도 있다. 사실 제일 기대했던 것은 미네랄이라고 부르는, 높은 산도에서 느껴지는 부싯돌이나 젖은 바위향으로 묘사되는 감각을 재현했다는 쁘띠 푸였는데..(후략)

분위기: 편차는 있는지 모르겠으나 한 번의 방문의 표본으로는 지옥에 근접했다. 특별히 장사가 되지 않는 때가 아닌 이상 언제라도 다시 이렇게 될 객관적인 환경이 더욱 문제인데, 방으로 구분은 되어있되 문을 닫거나 하지 않으므로 차음이 되지 않는다. 둘째로 공간을 관리할 프론트 오피스에 사람이 없다. 주택과 같은 구조에 아마 서비스 테이블 하나당 한 명을 배정하는 듯 한데, 이 날은 내가 앉은 테이블 외에 한 테이블 정도가 있었는데, 음식을 제공한 뒤 그들은 곧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복층 구조에 지하까지 있으므로 갈 곳이 많다) 공간은 방치된다. 이러한 운영 방식이 곧 선을 넘은 객을 통제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식사하는 사람 앞에서 전화받는 객부터 바깥에 볼일이 생겼는지 문을 드나드는 객, 호탕하게 웃다가도 남의 험담을 귓가에 꽂아주는 객 등 영화를 보며 귀로는 한 편의 또다른 군상극을 감상할 수 있다.

서비스: 팀당 한 명의 직원이 담당하는데, 공간이 내는 요리의 기저에 관하여 교육을 받을 여유가 없어보였다. 따라서 미냐디스와 카페가 없는 미완의 한 끼, 보틀의 컨디션 체크가 없는 와인 짝짓기라는 결과가 이어진다. 나는 예의를 갖추기 위해 30도를 넘는 날씨에 공간의 드레스 코드를 정확히는 알지 못하므로 최대한 갖추어 하체를 완전히 가리는 복식에 블레이저, 구두까지 갖추고(타이만큼은 봐달라) 방문했으나 자켓을 걸 수 있는 공간에 대해 안내받지 않았고 의자에 그냥 걸어두라는 안내로 모욕을 받았다. 나는 이곳에 옷걸이가 뻔히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항의 이후 별실에 남는 옷걸이에 내 외투를 보관할 수 있었으나 찾아가는 것 또한 나의 역할이었다. COVID-19때문에 외투를 함께 거는 것을 다른 고객이 싫어하기에 내 외투를 받을 수 없다는 답변은 농담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더 이상의 모욕을 견딜 수 없었다.
식사 도중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준의 객의 소음에 대해 전달했으나 해결되지 않았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첫째로는 산발적인 소음이 식사를 방해한다 이야기했고, 둘째로는 오늘 방문한 객들이 특별한 날(기념일이나 그렇다면 시끄러워도 나는 이해한다)인지, 셋째로는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나보다 중요한, 이를테면 단골이라거나 그런 사람인지를 물었는데, 곧바로 다른 객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말하지 않은 내 과실도 있다는 점을 명시한다.
거기에 카드 결제를 하면서 서명을 받지 않는 등(결제금액도, 업장의 규모도 무서명거래와는 무관하다) 기초적인 부분에서 굴욕적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서비스 직원에게 불만을 표했으나 그녀 외의, 공간의 운영에 대해 할 말이 있는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컨셉트가 중요한 요리를 하는 만큼 서버가 요리의 앞에는 설명을 곁들이지만, 음식의 뒤는 없다. 음식이 어떠한가에 대한 질문도, 답변도 없이 진행되는 가운데, 접시에 남은 의사표시에도 답은 들을 수 없었다.

가격: 대표 메뉴는 점심, 저녁시간 모두 KRW 116000이며, 점심 시간에는 간소화한 코스(KRW 50000 전후)를 운영한다. 다만 KRW 116000의 코스를 주문할 경우 KRW 98000의 코스가 주문되므로, 반드시 작은 과자류와 커피 또는 차를 포함하여 메뉴판이 중간에 끊어지는 참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주문을 해야 한다.

음료: 와인 리스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므로 나도 언급하지 않는 게 순리이겠으나 메뉴판의 맨 뒷켠에 숨겨져있다. 각각 한 페이지, 레드와 화이트 각각 대강 15종이 되지 않는 분량으로, 푸이 퓌메의 소비뇽 블랑과 까오르의 말벡, 론의 비오니에 등 프랑스의 산지의 다양성을 최소한이나마 갖추고 있다. 수입된지 얼마 되지 않은 샤또 보쉔의 비오니에를 페어링으로 받았는데, 보틀의 가격은 소매가의 3~4배 사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레드만, 또는 화이트만으로 구성된 페어링이 있는 등 페어링은 종류는 다양하되 어울림은 적다. 사실상 전체 페어링, 하프 페어링으로 나뉜다고 본다. 주문하지는 않았으나 시드르 세 잔의 가격은 좋았다(KRW 15000). 화이트와 레드 한 잔씩으로 구성된 페어링은 KRW 49000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