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러 서울 - 도산대로17길 33
한껏 홀쭉해진 미켈러의 리스트에는 더 이상 마실 것이 없었다. 가장 먼저 자리를 채우고 있는 더부스의 맥주들-노티드 콜라보 맥주가 가장 위에 있다-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맥주는 대여섯 종도 되지 않는데, 그나마도 미켈러가 자랑하는 특이하면서도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는 맥주들 사이에서는 선택하는 고민이 아닌 코너에 몰려 강제당하는 고민을 겪어야 한다.
미켈러가 나쁜 브랜드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미켈러 서울은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쁜 공간이다. 논할 이유가 없는 음식을 제외하고 맥주로서도, 미켈러에는 미켈러 맥주가 정말 없다. 다들 한국의 외식업계는 분야를 불문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고 하는데 미켈러만큼은 퇴보의 흔적이 역력하다. 물론 이유야 대자면 왜 없겠나. 물류 문제부터 미켈러가 주력하는 맥주와 한국인들의 맥주에 대한 인식의 갭 등 핑계거리는 있다. 그러나 미켈러는 이해 가능한 정도를 넘어서 나빠지고 있다. 어째서일까? 근래의 불편한 시장 상황을 탓하기에는 종가세 도입 등과 맞물려 편의점을 무식하게 잠식해온 크래프트 맥주의 존재를 무시하기 어렵다. 공장을 확장한 한국 회사도 더럿 있는데 세계적인 거인 미켈러는 한국에서 계속 작아지고만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만약 만족시켜야 할 사람의 수가 굉장히 적다면 오늘날의 미켈러의 모습은 납득이 간다.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겠으며, 나 역시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