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수 서울 - 2023년 가을
지난 모수 서울 리뷰에서 모수 이야기는 당분간 끝을 맺으려 했지만, 바뀌는 것과 바뀌지 않는 것을 다루기 위해 바뀐 메뉴에 대한 언급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지점에 집중해서 가타부타를 간단히 따져보고자 한다.
식사 전
모수 서울의 예약은 캐치테이블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식사
모수의 가장 큰 힘이 되는 것 중 하나는 와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모수의 전략은 굉장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업스케일을 추구하지만 업력이 길지 않고 국내의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는 점도 있기 때문에 소믈리에의 선택은 일관성을 보이게 된다. 몇몇 생산자는 모수라는 레스토랑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이며, 이 프로방스 와인 또한 그렇다.
모수가 계절을 요리하는 방식을 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위 요리인데, 기존의 틀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부재료의 변주를 가져가는 방식이다. 여건상 같은 사람이 여러 번 방문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식당으로서는 안전한 선택이지만, 퀴진의 이름에마저 혁신적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오늘날 혁신에 걸맞기 어려운 방식이리라는 우려도 있다. 물론 이 경우에는 기우라고 부를 수 있었다. 적당한 쓴맛의 아마란스 잎은 한식의 나물과 같은 감각을 주면서도 간장과 좋은 호흡을 가지고 일본식 고마도후가 가지고 있는 씹는 감각에 대한 약점을 상호보완한다. 봄의 아쉬움을 간단한 방법으로 털어낼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요리가 나아질 가능성은 진작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가을에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실망스러운 일일 것이다.
식물의 계보학을 이용하는 아이디어는 부추속에 비해 고추속에서는 그다지 의미있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요리가 가진 정신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현재 서울의 각종 요리가 가장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주제가 무엇인가? 바로 매운맛이다. 도처에 깔린 매운맛과 단맛에 용기있게 부딪히는 요리사를 보기 어렵다. 한식의 정수라고 칭송받았던 다양한 장류가 외면받는 것은 서양의 조리 기술에 기반하기 때문이라는 변명이 가능하지만, 현대 한국인의 자부심이자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음식의 붉은빛은 직업적인 도전 의식이 가장 강하게 드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그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모수는 분명 다른 주자들보다 발상적으로 앞서 있다. 물론 실행에 있어서는 분명한 한계도 있었다. 여러 겹으로 소스를 둘러내는데 그림처럼 강렬한 통각보다는 실제로는 야채가 가진 단맛이 섞인 느낌에 가깝다. 한식의 고추장 자체가 단맛을 포함하기 때문일수도 있지만, 고추장이 해산물에 사용될 때의 맥락-열에 예닐곱은 매운탕 아니면 조림-을 고려한 뉘앙스는 아니다. 그런 요리에 사용되는 생선의 성질과 금태의 차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결국 좋은 주제 선택과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행으로 정리가 가능한데, 그 원인은 결국 식당이 가진 형식에 아이디어가 편입되는 방식이라고 본다. 작은 부분의 조정은 많이 일어나겠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큰 틀이 흔들리지 않는 이상 이런 방식의 요리에서 바라는 자유분방함의 장점은 축소되고 만다.
이는 같은 형식 안에서 성공을 거두는 경우에도 문제가 되는데, 사진의 가지가 그랬다. 초당옥수수에 비해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데, 기존의 조리 방식이 가진 강점이 그대로 드러나면서도 재료 간의 이색적인 조합에서 나오는 시너지까지 두루 갖춘 완성형의 한 그릇이다. 속을 파내고 다시 채워 굽는 지중해식부터 덴가쿠까지 북반구의 가지를 정말 다양하게 맛보았지만 전통에서는 이런 발상과 즐거움을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다시 바뀌어버릴 요리라는 생각이 아쉬움을 남긴다.
우엉을 대신한 장어의 경우도 큰 틀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공유하는데, 우엉과 비교하면 단점이 두드러진다. 큰 틀을 가져가면서 장어의 조리법은 일본식을 개수한 한국식을 취한 형태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푀이유테를 사용했다는 점 외에 장어에 대해서는 이런 레스토랑에 기대할만한 단계에 있지 않았다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장어의 질 따위를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뿌리가 되는 일본식 장어 조리법을 생각해 보면 관동과 관서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조리 과정에 기름이 많이 빠지는 재료의 특성은 양념을 덧바르는 특유의 스타일의 근거가 되며, 이는 낮은 열에 오래 익히는 방식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단백질의 조리 상태를 감안했을 때 통째로 오븐에 처음부터 구워낸 것이라기보다는 조립하여 마지막에 완성한 느낌에 가깝지만, 어쨌든 이러한 전형적인 조리 방식과 비교하였을때 앞서 나간다고 할만한 점은 뚜렷하지 않았다. 타르트나 파이라는 요리의 문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쉘을 사용하는 파이는 인류의 역사에서 익히기 어려운 속재료를 뭉근히 익히는 방법으로 인류 역사의 오랜 시간 동안 그 껍질은 취식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반죽으로 파트 푀이유테를 이용하게 된 이후로는 반죽의 취식을 전제하게 되면서 요구하는 맛의 강도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올라왔다고 생각한다. 영국식 미트 파이부터 베트남식 파테 쇼(pâté chaud), 광동 요리의 홍콩식 전복 타르트까지 분명한 흐름이 있다. 타르트는 파이와 달리 오픈톱이기는 하지만 결국 같은 본질을 가진 반죽은 동일한 운명을 띈 재료라 느낀다.
주방이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기다리고 있는 모수이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두고 더 이상 깊이 따져드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러한 큰 틀의 정형화를 전략으로 가져간다면 그 이유에 대해서는 사유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결국 모수가 원하는 요리는 무엇인가? 그 형식에는 명확한 부분도 그렇지 않은 부분도 혼재되어 있는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