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쓸 것인가?
한 달 동안 많은 일이 지나갔다. 모든 측면에 있어서. 그렇지만 때늦은 일기를 쓰고자 함은 아니다. 그저 한 달동안 비웠으니 이제 채워가고자 할 뿐이다.
자리를 비운 시간 사이 나를 옥죄는 질문은 '그래서 무엇을 쓰는가?'였다. 과연 나는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가? 나는 스스로를 철저한 아마추어로 정의한다. 나에게 프로패셔널, 즉 직업의 영역을 별도로 존재하며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사람과 바로 같은 곳에 서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감히 평론을 한답시고는 평범한 사람과 같은 눈높이라, 이율배반적이요 기만적이라고 하겠다. 맥락을 다시 살펴 보자. 나는 아마추어라는 이유를 방패로 삼기 위해 칭하지 않겠다. 부족하고 불행한 것을 이유로 거짓을 말해서는 안된다. 다만 나는 이 도시, 이 나라의 아마추어에게도 삶이, 인간의 의지가 있을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말이 너무 허공을 감도는 듯 하니, 조금 더 편하게 말해 보자. 나는 현재 이 도시의 식생활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 필요를 느끼고 있는데, 그것은 식생활이 위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새로 나온 '실버 스푼'을 마지막으로 올린 것은 나의 한 달동안의 생활에 대한 주제의식이었다. 나의 식생활 예산은 정해져 있고 그동안 나는 거의 나가지 않았으니 원자재를 가공, 즉 요리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였다. 기회비용이 재료에 투입되지만 시간과 인간의 의지를 갉아먹어 결과물은 그야말로 타협의 산물일 때가 많았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경우 만족스러웠다. 다시 외식인으로 복귀할 생각에 두려웠고 걱정스러웠다. 서울특별시는 외식하기 좋은 공간이 아닌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 도시의 외식에서 하루에 두 끼정도로 뽑는 표본 크기에서 으레 평균과 분산은 지옥에 가까운 값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맛없는가, 왜 이렇게 끔찍한가? 우리가 정말 길에서 아무 곳이나, 눈 딱 감고 들어가서 맛볼 수 있는 음식을 구매하고 있는가? 그런 음식을 판매하고 있는가? '배달의 민족'을 실행해서 주문할 수 있는 배달음식의 맛은 어떠한가? 나는 감히 이 도시가 맛없다고 말하고 싶다. 이 도시의 요리는 비극적이다. 가장 밑바닥은 생각보다 견고한 편인데, 프랜차이즈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통일된 맛의 하방 저지선의 덕이다. 배달에서는 치킨집, 길에 나가서는 햄버거집이다. 죽지 않고 도시를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론이다. 그러나 그 위가 없다. 으레 생활공간에 한 곳씩 존재하는 "맛집"은 거짓이거나 우연의 산물이었다. 양이 많아서, 고기를 넉넉하게 주어서 맛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사람이 고생은 하는데 결과물이 산으로 가고 있다. 조미료 때문에, 식자재마트의 싸구려 재료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산업의 능률에 기대야 할 부분이 개인의 손에 쥐어질 때 결핍의 흔적은 커진다. 그래서 나는 글을 시작했다. 이 도시는 조금 더 맛있을 수 있고, 그래야 한다. 나를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뭐가 그렇게 맛없는가? 당장 그 문제에 대해 이 도시의 가장 힘든 이들을 쥐어짜는 방식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일견 추측해 본다. 대부분의 음식이 생존의 논리 아래 우연에 기대고 있다. 이러한 자영업의 굴레에 대해서 맛을 논하기에는 무안하다. 생존하기 위해 살아가는 이들의 영역은 평가절하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더더욱 훌륭한 도구를 쥐어줄 이들 있으니-인간의 지혜에 도전하는 경우이다. 이 도시는 막강한 구매력으로 차분히 요리에 인간의 전부를 쏟아낼 수 있는 공간들을 마련하고 있다. '레스토랑', '파인 다이닝', 무슨 이름으로 부르건 상관 없는 그런 장소들이 존재한다. 물론 그들 사이에서도 생존의 논리는 존재하며 이 관계는 필연적이다만 다소 느슨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서가 아니라, 주제의식의 차이가 있음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도 생계를 위해 모작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예술인패스 하나 쥐고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이가 있듯이. 후자의 경우의 존재의의는 바로 그 자신에 있다. 그를 둘러싼 환경이건 내재적 의지이건. 그는 어쨌거나 표현하고자 하고 그곳에 예술이 자리한다. 이 도시에는 그런 행위를 위한 적당한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 내에서 이 도시의 맛에 대한 주장을 제시하고 우리는 그것을 맛본다. 그 과정에서 이 도시의 맛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성립하고 조용한 전쟁이 오고간다. 결국 맛은 진보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이 도시는 긴 시간동안 나를 실망시켰다. 원하는 만큼 맛있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한국어 언어권이 음식을 대하는 방식은 매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튜브다. 유튜브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먹방'이다. 먹방에서 음식은 철저한 욕망의 대상이다. 산처럼 쌓인 음식, 특히 고기와 치즈 등의 지방. 넘치는 칼로리. 시각적으로 사람의 본능, 즉 허기짐과 칼로리를 채우는 자극을 무대로 하는 영상이 가장 주목받는다. 그 위로는 아예 음식의 색과 먹는 소리를 강조하는 종류도 있었으니 이쯤 되면 음식은 음식일 필요도 없다. 음식은 철저한 노예이자 수단으로 봉사한다. 사람의 머리속에 들어찬 욕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을 거쳐 존재해서는 안될 것으로 변모한다. 산처럼 쌓인 고기와 튀김을 마음껏 먹어치운다. 기대 이상으로 필요 이상으로 먹어치운다. 그렇게 먹어치우면 그것은 행복인가. 누군가는 그렇게 많이 먹어도 괜찮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복제 가능한 행복인가.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래서 그게 좋은 일인가. 우리 모두가 위장을 늘리는 훈련을 해서 치킨 다섯 마리를 해치울 수 있다면 좋은가. 왜 치킨이어야 했는가. 그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짜고 기름진 맛일 뿐이며 사실 닭을 죽인다, 닭을 손질한다, 그리고 요리한다는 행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이러한 음식의 본능에 대한 노역이 한 기둥이라면 반대쪽을 지탱하는 것은 한 단계 위의 욕망, 욕망을 위한 욕망인 돈의 노예로 종사중인 음식의 모습이었다. 부를 과시하는 수단, 슈퍼카와 손목 시계-람보르기니와 파텍 필립의 팬들이여, 솔직해지자-에 다름 아닌 일종의 기호였다. 적당히 유명한 호텔의 식음료 업장을 검색해보라. 그리고 그 썸네일을, 그 제목을 음미해보라. 미슐랭이 몇스타에요, 한 끼에 얼마에요. 모두가 그것만을 말한다. 이 지옥 속에서 그렇게 비싸신 요리는 두 가지의 국면을 맞는다. 첫째는 어렵지 않아야 한다. 어떤 영국인이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계를 바라보라고 했는가? 이 도시의 귀객들은 거인의 엉덩짝을 걷어찬다. 짧은 인생에서 맛본 몇 가지의 정의로 재단할 수 있는, 재단되는 가치들만이 살아남는다. 인간이 가진 어떤 감각도 타고날 때부터 완벽한 것은 없으며 감각의 판단 기준마저도 사실은 그 스스로가 온전히 가진 것이 아니다. 직관적인 아름다움을 주는 그림이 좋은 그림인가? 그런 아름다움은 누가 정하나? 아니 이런 논의는 이미 무덤 속에 들어간지 오래이다. 화가에게는 캔버스는 아름다움만을 위한 도구가 아닐 뿐더러, 사실 캔버스만을 이용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각 예술들은 아름다움만을 좇던 시기보다 결코 못나지 않았다. 자신의 슬픔을 속절 없이 드러낼 때 우리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할 때가 있다. 그 마음이 너무나 잘 느껴지기 때문이다. 열정을 다한 작품을 그려냈을 때 그것이 욕구를 불러일으키지 않더라도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 의지의 산물이 감히 우러러 볼 수 없는 높이에 이르러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그런 것이다. 반드시 오감의 욕망만을 곧바로 자극할 필요가 없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리기능을 자극하더라도, 그 과정에 있어 인간의 의지가 개입한다. 더 나은 세상, 적어도 자기 인생에 있어 더 나은 삶을 위해 인간은 나아간다. 그 과정을 보이고 느끼는 과정에서 예술이 있다. 이 세계의 거시적 구조의 모순부터 접시 한 그릇의 반지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까지, 모든 주제는 예술의 대상이며 그를 예술로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인간이 그에 대해 얼마를 다하였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디어 내에서 음식은 내동댕이 쳐진다. 감히 인간을 드러내다니. 감히 그 요리 한 그릇에 담긴 모든 이들의 정체를 밝히다니. 이 무대의 주인공이 먹는 이가 아닌 요리사, 그 뒤를 켜켜이 둘러싼 위대한 스승들이기를 거부한다. 어서 그를 감추라. 한 눈에prima facie 알아볼 수 있는 가치만이 살아남고 그 이외는 판단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리는 앞서 '먹방'의 포르노그래피와 결합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호텔 뷔페이다. 호텔 뷔페에서 가장 인기있는 것은 역시 바닷가재와 고기 구이다. 나는 호텔 뷔페가 굴러가는 사정을 대충 알고있는데, 여러모로 요리가 살아남지 않는 공간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뷔페의 흥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요리의 가치는 원재료의 원가에 정확히 비례할 수 밖에 없다는, 무신뢰의 현실이다. 요리를 위해 추가로 투입할 비용의 지출을 거부한다. 대량 조리의 논리가 한 끼 10만원을 호가하는 식사의 무대를 지배한다. 둘째로는 조리의 진화를 거부한다. 레스토랑의 얼굴인 수십년 경력의 중장년이 쥐는 초밥만을 요리로 대접하는 하릴없이 높은 장벽의 반대편에서는 대량조리와 효율을 찾아 그를 수행하는 인간의 개성의 영역을 제거한다. 셋째로는 먹는 행위에 대한 부정이다. 더 이상 먹는 행위는 두뇌를 사용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는 내장에서 타고흐르는 본능에 대한 충족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더 배불러야 한다, 더 먹어치워야 한다. 첫 머리로 돌아왔다. 두 가지가 결국 만날 수 밖에 없었던 일이다. 10만원, 아니 백 만원의 식사에도 인간의 자리는 없다. 오직 자연체의 욕망, 채울 수록 더 크게 비어가고 삼킬 수록 더 허기진 중독적 욕망이다. 허상인 것은 음식 뿐이 아니다. 그 욕망도 허상이다. 세상에 비싼 식사가 존재하면 뭐할 것인가. 그것은 단지 비싸다는 것 말고는 어떤 존재이유도 없다. 환상적인 맛이라고? 그것이 환상이라 더욱 불행하고 그 근거가 관능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불행하다. 감각기관은 식도락이 아닌 훈련을 통해 단련하는 물건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감각기관을 훈련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접시 위의 인간의 의지를 쌓을 수 있다. 고전에 이른 요리, 그에 대한 도전, 좌절, 극복, 그 과정에서 요리는 인간의 행복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길거리의 김밥을 보라. 김쌈이니 노리마키니 근원이 경합하지만 둘과는 다른 음식이다. 이 천원 언저리로 낼 수 있는 종국적 결말. 프레스햄과 달걀지단이 짠맛을 부여잡고 단무지의 식감과 신맛, 기분따라 들어가는 나물이 양념에 향을 더하고 밥은 전체의 균형을 맞춘다. 상업 식재료의 불유쾌한 완성도는 참기름의 강렬한 향이 다스린다. 이 나라에서 김밥이 현대의 모습을 갖춘 것은 백 만원짜리 호화김밥의 덕택도 아니요, 김밥의 맛을 가장 정확하게 맛본다는 전문가들의 덕택도 아니다. 정해진 예산에서 더 좋은 음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해온 인간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인간을 드러낼 때 돈자랑 하기가 불편해진다. 인간사회란 잔인한 것이어서 돈만으로는 손쉽게 거머쥘 수 없는 문화자본의 힘굳이 칭하자면 habitus이 버텨서고 있어서 돈으로 전부를 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돈으로도 한 번에 해치울 수 없는 장벽이 문화자본의 치사함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단 폭력이라고 치부하고 무시할 수 없다. 그를 쌓아온 자가 바로 인류 스스로이다. 적어도 존재를 마주해야 한다. 누군가의 일생을 구원할만한 가격의 자동차에서 내렸다고 해서, 손목에 또 다시 그런 금액을 둘렀다고 해서 인류가 쌓아온 위대한 예절과 지혜의 계곡을 자신의 부로 매울 수는 없는 것이다. 오죽하면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려 하느냐"Matt 22:18 NKRV 기록이 남을 지경이다. 外食의 본질이 外飾에 있으니 존중이 없다. 그 존중 없는 위에서 결국 살아남는 것은 "맛보는 능력"과 같은 허상이다. 누가누가 더 섬세하게 표현하는가, 부재료를 얼마나 정확하게 맞추는가. 오늘 재료의 상태가 어떤지 감각하는 일은 즐거울 수 있겠지만 왜 그것으로 줄을 세우고 앉아있는가. 재료의 질을 알고 싶으면 경매장에 가볼 일이다. 심사위원처럼 요리를 갈갈이 발가벗겨 재료 하나하나의 품질을 논하지만 요리라는 과정에 대해서는 몇 가지 용어로 얼버무릴 때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인지 요리의 과정에 대해서 더욱 더 적게 말할 수 있는 요리들이 유행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두 가지 요리에 관여된 인물들이 겹치는 부분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까지, 그래 참 잘난 입장에서 불평을 쏟아냈다. 그렇다면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떻게 다르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다. 불평은 쉽다. 그러나 변화는 어렵고, 그를 말하는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충분한 그림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글은 이러한 작품을 첫째로 작품으로서 대우하고자 한다. 오늘 포를 뜬 광어의 체지방 함량을 측정하는 대신 주방의 광어에 대한 생각을 읽어야 한다. 주방의 의지를 읽고자 주방의 스승들, 스승들의 스승들, 주방에 층층이 쌓인 지혜의 탑의 가능한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둘째로는 평론으로서 작품을 정확한 위치에 재배치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의지를 읽어내는 작업은 밝혀지지 않은 광원에 적절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탈을 쓴 인간 아닌 것들을 배제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소의 살에 켜켜이 낀 지방만을 탐닉하면서도 그 죽음에 희생된 아름다운 일부들은 철저히 외면하는 장면 내에서 흐르는 비인간성을, 꾸밈으로 진정한 요리의 이름만을 훔치고자 하는 악의를 걷어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도시에는 자존심이 없는가. 우리는 피에르 에르메의 노예들인가.(그리고 기왕 노예를 할 거면 적어도 주인이라도 여럿을 섬기면 안되는가?) 요리가 있어야 할 곳에 요리를 자리케 하여야 한다. 허상의 이방인의 이름으로 우리의 혀가 더 이상 고통받아서는 안된다.
궁극적으로 평론은 작품을 그 제작자 스스로마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좌표 위에 존재함을 인식시키고, 그를 정확히 배치함으로서 작품이 우연이 아닌 역사의 필연으로 만들기 위해 수행하는 작업이다. 작품은 평론을 통해 과거에 대한 해석이거나 미래에 대한 방향타로 새로운 자리를 찾을 수 있다. 평론은 결코 인간을 깎아내리거나 숭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인간의 진심을 가장 진심을 다해 마주하기 위한 일이며, 인간이 인간을 결코 영원히 속일 수 없음을 다시금 증명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를 통해 좋은 요리가 탄생할 수 있는 배경을 확장하고 나쁜 요리가 좋은 요리의 기회를 뺏으려는 기도를 근절한다. 좋은 요리의 길까지 제시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으나 한 걸음에 하늘에 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도시인의 한 끼를 위해서, 이미 너무 많은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지 않은가. 그 모든 것에 신의를 다해 임함으로서 한 끼 식사를 신이 내린 선물도, 별 것 아닌 사치품도 아닌 모든 인간의 삶의 결과물임을 입증하고 그를 통해 요리가 다시 인간의 의지를 느낄 수 있도록, 결국 내가 먹는 데 행복한 요리가 더 많아지도록 하고자 하는 데 작은 목표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모든 꿈을 배제하고서라도 이 도시 서울에는 신뢰가 보장되어있는 글이 없다.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식당에 대한 열띤 칭찬의 뒤에는 그의 지분관계가 감추어져 있었다.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평가는 그야말로 선결적 문제에서 곧바로 판단의 이익을 잃는다. 아마추어의 보통인을 자처하는 이유다. 나는 현재 어떠한 식음료사업과도 직접적인 경제적 관계를 맺고있지 아니하다. 몇몇 장소에서 소비자로서 로열티 프로그램에 가입하거나 카드사의 혜택의 대상일 뿐이다. 이외에는 모든 비용을 내가 지불하며, 그러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부터 어떠한 이익을 얻지 않는다. 경제적 대가관계 뿐 아니라 관념적 인간관계로부터도 자유로운 글을 제공할 것이다. 친구 가게, 지인 요리면 사실 글의 내용이 다 알 게 뭔가. 본인이 어떻게 쓰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글의 신용성은 오직 그 상황만이 보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인류의 논리의 종착점이었으며 그것이 내가 배우고 습득한 이치이기도 하다.Fed. R. Evid. 807, 형사소송법 제314조 등 나는 신용성이 보장될 수 있는 환경에서만 글을 쓰겠다. 만에라도 깨질 경우 이를 알리겠다. 곧 절필해야만 할 것이다. 엉터리 환경에서 글은 빛을 잃을 것이니.
그러한 지점에서 익명보다는 실명이 낫지 않은가 하는 고민이 있었으나 이 사회에서 개인을 둘러싼 배경을 불필요하게 글을 가리는 측면이 크다고 판단하였다. 나를 부디 통상적인 도시인의 하나로 생각해달라. 그 편이 나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 추정이 깨질 때까지만 이 상태로 있고자 한다.
결코 편하지 않고 재미없는 길일 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내일의 한 끼가 조금은 더 좋은 한 끼의 식사이기를 바라며 글을 맺는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