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돈 - 직화구이 현상
필요에는 법이 없다(necessitas non habet legem). 남영돈이라는 현상을 목도하는 순간 떠오른 생각이었고, 따라서 본지의 편집 규정은 오늘도 또다른 예외를 남긴다.
여러분은 아케이드를 기억하는가? 지금도 롯데호텔 서울에 그 유산이 남아있는 반도조선아케이드부터 거대한 에르메스 매장으로 대표되는 신라호텔의 아케이드까지, 사치스러운 소비문화와는 유독 친숙한 아케이드라는 형식은 한국에서는 난개발 속 지저분하고 난잡한 지하 식당가의 기억으로 남은 사람들이 더 많을지 모르겠다. 특히 사대문 안의 오피스 빌딩 아래에 있는 번잡한 식당가들, 혹은 여의도 아케이드나 강남역 빌딩 아래 아케이드와 같이 한때 향락을 꿈꾸었으나 그 뼈대만을 남기고 퇴락한 공간에서 우리는 여전히 아케이드라는 형식을 발견하지만, 그 의미도 의의도 더 이상 기억에 가지고 있지 않다.
엄밀하게 아케이드는 영문명으로 이러한 상업건축물의 유래는 프랑스로 올라간다. 그곳에서는 통상 파사주Passage couvert라는 명칭을 더욱 자주 쓰는 듯 한데, 혁명을 통한 정치적 근대의 이행과 산업화로 인한 경제적 근대의 이행이 겹치며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이 이중적인 공간이 탄생하였다. 그 존재에 주목한 인물로 떠오르는 것은 발터 벤야민으로, 그는 이러한 아케이드를 통해 도시의 근대성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려 노력했다(안타깝게도 이는 그의 이른 죽음으로 미완으로 남았다).
벤야민이라는 지성은 어째서 아케이드라는 현상에 집중했는가? 그의 파편화된 메모 속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도 앞선 이유라면 역시 아케이드라는 존재 자체가 주는 강한 인상 때문이 아닐까. 현대에 와서야 리츠의 미로처럼 엮인 아케이드마저 큰 감흥을 불러오지 않지만, 백화점과 함께 산업자본 시대의 정신을 표방하는 공간이 주는 압도적인 인상에서 무언가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얻었던 것은 아닐까.
불판과 생고기로 대표되는 구이 문화는 현대 한식이라는 주제를 두고 이러한 아케이드와도 같은 탐구욕을 불러일으킨다. 먼저 그 형식의 강력함이다. 주로 4인용 식탁-식탁이 4인을 기준으로 표준화된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라, 더 많은 인원을 위한 원형 내지 타원형은 분명 소수설이다-에서 가스부터 연탄까지 무엇이든 한가운데 열원을 두고 먹는 구이 문화는 찌개 문화와 함께 한국인의 외식 공간의 형식을 거의 통일하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서민적 외식부터 고급 외식까지 관통하는 범용성. 소위 가든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간장양념류의 소갈비 전문점부터 반대로 양념육보다 생고기가 압도적인 삼겹살 이하 돼지고기까지, 올라가는 대상과 서비스의 차이 등은 있어도 결국 먹는 형식만큼은 한결같다.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이러한 구이 식당이 서민적인 외투를 벗어버리려는 시도 또한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점원이 구워주는 방식의 서비스-그리고 함께 발전한 갈빗집들만의 독특한 '팁 문화'를 잊지 마시라-에서 바 테이블에서 작은 개인 화로로 세분화하거나 중앙집중된 화로에서 퍼포먼스만 보여준 후 절단하는 속칭 '우마카세' 양식까지 서비스의 방식의 변화와 함께, 가게마다 온갖 다양한 양식의 그릴과 불판-한물 간 가마솥이 뼈 하나 붙들고 서울을 다시 호령할 줄 알았는가?-까지 조리에 있어서도 천편일률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뭇 다양성이 크다.
남영돈은 마치 삼겹살 문화라는 것이 하나의 생물이라면 상당히 급진적인 형태로 진화한 듯한 모습이었다. 결국 직접 불을 눈 앞에 두고 굽는 요리라면 오랜 시간 조리하는 방식은 불가능하고(사람의 인내심을 생각해보라) 빠르게 극적인 상태로의 전환이 필요하니 가능한 높은 온도의 열원에 바싹 익히는 텍스처를 목표로 할 수밖에 없다. 열의 온도가 신통치 않은 가스불에 불판이라면 얇게 썰어 표면적을 늘리는 것이 일감인 이유다. 남영돈에서는 반대로 고기를 두껍게 성형하더라도 감당할 수 있는 강한 불으로 대응한다는 발상에 기초했다. 자르고 나면 평면보다도 정육면체 내지 울퉁불퉁한 원에 가까운 다면체의 형상을 띄게 되는 고기는 어느 방면에서도 얇다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으니 강하게 익힌 표면에 비해 내부적으로는 적당히 익은 단백질의 만족스러운 텍스처를 전달한다. 그 자체의 맛도 썩 빼어난 편이다. 항정살이나 가브리살 모두 이런 방식으로 조리했을 때 약간의 소금만으로도 확실한 만족감을 준다(반대로 인사치레같은 잡다한 양념 중에는 불필요해 보이는 것도 있다). 과연 이것은 한국적 구이 문화의 보편적 진화형이 될 수 있을까?
결과물의 맛만을 보고 판단해서는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전체를 두고 보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 기나긴 대기 시간을 금방 잊게 만드는 강렬한 전면의 열 때문이다. 남영돈은 이상적인 조리를 위해 공들여 숯을 준비하고 훌륭한 타이밍에 세팅한다. 충분한 화력을 갖춘 숯이 평면보다 살짝 솟아오를 정도로 넉넉히 쌓이니 작열하는 열기는 지옥도로 변한 서울 도심의 아스팔트를 그립게 만든다. 물러설 공간은 있지도 않지만 물러서서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아니다.
불판 앞에 옹기종기 모여 먹는 구이 문화, 한식의 정수인가, 극복의 대상인가? 그 관행이 굳어짐으로 인하여 대책 없이 폐기를 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과연 즐거움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는 고민해볼 일이다. 캐주얼한 식사, 서비스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들마저도 일말의 편의성을 고려하지 않는가? 무심하게 놓인 듯한 백반 앞의 반찬도 "한 입 크기"라는 사랑스러운 디테일을 품고 있다. 물론 이유 없이 단지 불편하기만 한 것보다는 합리적 이유 있는 불편함이 좋지만, 과연 맛을 늘리기 위해 불편함도 늘려야 한다면 총합으로서의 즐거움은 양으로 가고 있는가 물어볼 수는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