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부이용 - 이른바 '부이용 레스토랑'

파리의 "부이용" 같은 식당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메뉴판에서 그렇게 말하더라. "부이용" 레스토랑이 뭔데? 레스토랑에서 열심히 소개하고 있는 만큼 내가 다시 그 내용을 읊고 싶지는 않고, 우리말로 옮기자면 "국밥집" 쯤 될 것 같다. 벽면에 식재료의 효능 따위가 걸려있지 않은 점을 빼면 빼곡한 탁자의 간격과 대량으로 끓여낸 육수가 요리 전채의 얼개가 된다는 점에서 영락없이 국밥집이다. 백여년 전에는 체인화가 되어 도처에 찾아볼 수 있었다니, 참으로 국밥집이다. 많은 국밥 전문 식당의 상호들을 떠올려보면 그 안에 순대국, 해장국 등의 단어가 삽입된다는 점 또한 참으로 들어맞는다. 물론, 그것은 20세기 이야기이고 이제 부이용 레스토랑이 일상에 스며든 사람은 그 근처에 사는 사람들 뿐이다. 국밥집 중에서도 역사가 긴, 이른바 노포같은 종류들을 떠올려봄직하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인 곳이고, 일상적인 요리를 내지만, 그 자체로 그 요리에 대한 일정한 답을 내줄 수 있는 곳. 과연 그런 식당을 목표로 한다니. 마음가짐부터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그렇다면 굳이 한국에서 다른 나라의 국밥집을 따라할 필요가 있을까? 질문에 단편적인 답변을 하자면 안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많은 외국 요리 전문식당들은 전부 코스프레로 시작한다. 코스프레라는 단어를 대체하기 어렵기에 끌어 썼지만, 그 기저에 깔린 부정적인 뉘앙스는 제외하고 보자. 라멘 가게들은 주문의 방식부터 따라하며 스시 카운터 앞에 앉은 한국인들은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렇게 불러본 적 없는 "타치우오"를 찾는다. 공사장에서의 일본발 속어와 다를게 뭐냐 싶은데 차라리 그쪽은 현실속에서 통하기라도 하지 나마 한잔에 남이 발라준 타치우오를 숭상하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게 된다.

하여간 맥락은 그정도로 짚고, 그런 식당이 있는데 심지어 후식으로 세 가지 아이스크림이 메뉴판에 올라와 있다면 우리가 모험할 이유는 이미 충분히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의체험이 곧바로 깨지게 된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메뉴의 요리들은 거의 전부 역을 거치지 않고 음차하고 있는데 비해 이 요리는 그뤼에르 치즈를 속에 채운... 그리고 포크와 숟가락으로 먹기를 권할 때 나는 이 요리의 이름gougére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을 수도 있다. 여긴 부르고뉴 어디께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슈 패스트리 반죽, 초리조, 그뤼에르 치즈,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의혹도 자연스레 이어진다. 초리조를 잘게 다져 반죽에 넣어 굽는 것은 익숙한데, 초리조가 다시 밖으로 삐져나왔다. 열으로 얻는 변화의 이득을 제하더라도, 순식간에 사라져야 할 슈 반죽과 수직 운동을 강요하는 초리조의 질감은 불협화음을 이룬다.

이러한 독특한 시도를 통해 부이용 레스토랑이라는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한 것일까? 부이용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곳들의 구제를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그런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설정으로 이해해야 할까? 초리조를 다지는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급하게 차리는 야식에도 초리조 가공은 거쳐갈 만한 코스다. 물론 썰어서 소테를 하는 것도, 저여서 얹는 것도 모두 가능한 레시피지만, 이 한 입 요리에서는 그러한 선택의 이유가 먹는 즐거움은 아닌 듯 보인다.

부이용 레스토랑답지 않은 가격은 걸림돌이다. 파리의 부이용 샤르티에의 요리는 10유로를 넘지 않는 것들이 절반은 된다. 이곳의 요리는 KRW 20000~40000까지 분포하고 있어 과연 정찬으로 착각해도 좋을 것만 같다. 앤서니 부댕이 나를 비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어쨌거나 당장은 해결하기 어려우므로, 그러한 점을 제외한다면 요리는 무난하게 흐른다. 편안한 레스토랑에 걸맞는 전형적인 요리들로 메뉴가 채워져 있고, 실제로 받아보면 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관자와 딸리아뗄레부터 주문하지 않은 오리와 체리같은 요리들은 안전한 조합에 기대고 있고, 받아든 결과물도 안전한 맛이 난다.

그 반대로, 대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대체되기도 한다. 블랑케트다. 말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하나의 단어처럼, 블랑케트는 송아지의 어깨나 복부 즈음의 살을 써서 블랑케트 드 보blanquette de veau로 부르는 것이 전형적이다. 그러나 송아지를 도축하지 않는 한국의 실정에 맞게 닭으로 대체된다. 물론 닭으로 대체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선택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블랑케트가 무엇인가. 중근세부터 먹기 시작했다는 파리의 대표적인 라구다. 귀족의 잔반부터 중산층을 대표하는 식사로, 이제는 가정식으로도 자리잡은 대표적인 도시 요리다. 레스토랑의 정체성에도 부합하고, 맛도 부합한다. 그러나 부드러운 흰색 소스와 고기를 편하게 조리하는 방법이라면 또 하나가 떠오른다. 프리카세Fricasse다. 언뜻 보면 유사한 요리지만, 핵심이 되는 단백질의 풍미가 옅은 백색육이라면 프리카세가 일견 더욱 합리적이다. 단백질의 익히는 과정에서 풍미를 더할 여지가 있기 때문. 그리고 이 요리에서는 블랑케트를 선택한 대신 전통적인 방식으로 밥을 더하는 대신 퍼프 패스트리에 채워서 냈는데, 언제나 패스트리 반죽은 나를 즐겁게 하지만 닭의 모자란 풍미를 채워주지는 않는다. "송아지를 쓰지 않았으니 전통에 어긋난다" 따위의 주장은 얼토당토않지만,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는 패스트리를 칼로 쪼개 무너뜨리고 있자면 전통이 그리워진다. 블랑케트는 전통적으로 쌀로 밥을 지어 깔아내 곁들이는데, 편안한 식당이라는 컨셉에도, 실제 먹는 편안함에도 들어맞지 않을 요소가 없다. 마침 "소-돼지-오리-닭-생선-갑각류/패류"로 TO를 정해둔 메뉴판에 탄수화물은 "면-감자-빵" 뿐으로 쌀의 자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패스트리 반죽을 이용한 요리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으로도 이미 큰 점수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일견 동의한다. 빵 반죽을 이용한 요리는 파인 다이닝만을 위한게 아닌데, 단지 프랑스의 기술이라는 이유만으로 지나치게 드물다. 이런 요리는 하는 것 자체로 즐거움이 있다.


그래, 아이스크림을 보았다니 어찌 먹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세 종류의 아이스크림은 메뉴에서 버티지 못하고 바닐라의 한 종류만이 남았다. 남은게 바닐라라는 점에서 나는 감동했다. 당연히 그 어디에서도 아이스크림이 단 한 종류만 있어야 한다면 바닐라다. 반발짝 양보해서 피오르 디 라떼까지(서울에서는 우유 품질의 문제로 양보 안한다).

정말 간만에 새로운 바닐라 아이스크림 중 멀쩡한 아이스크림을 맛봤다. 힘을 주지 않아도 그대로 퍼올려지는 질감, 아슬아슬한 당도와 풍성한 지방의 풍미. 좋은 의미로 밴앤제리스의 바닐라가 떠올랐다. 크럼블을 살짝 더해내는 것으로 아이스크림 한 컵은 만족스러운 디저트가 된다.

나는 「엘 불리」부터 이어지는 코치나 테크노에모시오날의 열렬한 지지자이지만, 전통과 관습의 힘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적절하게 위치할 필요가 있다. 훌륭한 답이지만 엄밀하지 못할 때도 있고, 주방에게는 편하게 구할 수 있는 답이 되주는 만큼 식객에게도 지나치게 신격화되어서는 안된다. 「오 부이용」은 이러한 요리의 관습이란 무엇인가를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예약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뺀다면 살짝은 일상에 걸칠 수 있을 정도까지 왔다. KRW 4000의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특히나 찾아갈 만 하다. 맛없는 두 가지 맛을 담는 KRW 5000~6000짜리 컵을 먹느니 이쪽을 열 번은 다시 선택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매장 한 켠에 뒤카스 에디시옹에서 출판하는 「Best Of」가 늘어선 찬장을 보았다. 내가 이 시리즈를 전부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편안한 식당에 어울리는 내용은 아니지 않은가? 일례로 티에리 막스 셰프의 책에서는 데리야키를 형상화한 프랑스 요리를 보았다. 그렇다면 레스토랑이 추구하고 있는 곳은 아주 다른 곳인가? 아마도 이후에 주방의 생각을 읽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물론, 정말 어이없는 요리를 내는 곳들도 종종 보면 책장은 훌륭하다. 셰프들이 해외에 나가면 꼭 책을 사온다거나, 공동구매를 해서 보는 원서들도 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언제쯤 종이에서 나와 내 식탁 앞으로 올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