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왕돈까스 - 민속

유럽에는 없고 미국에는 있던 식문화중 하나로 서프 앤 터프Surf'n'Turf라는 것이 있다. 근래 한국 웹상 문헌은 물론 식당에서도 무분별한 맥락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있어 마음 속에 글에 대한 욕망이 끓어오르는 가운데 제대로 된 제재를 만났다. 사진을 다시 보시라. '서프 앤 터프'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보이시는가?

물론 이것의 본래 이름은 서프 앤 터프가 아니라 모듬까스에 가까울 것이며, 정확히 민속적인 모듬까스이 되려면 어설픈 햄버그나 닭가슴살을 펴 튀긴 것이 있어야 하므로 형식상 결격 사유가 있다. 물론 이 식당에도 이러한 정격을 지키는 메뉴는 있으며, 사진의 메뉴는 '생선+돈까스'가 본래 이름으로 만족이라고는 주지 못하는 다진고기를 뺀 합리적인 끼닛거리이다.

그럼 '서프 앤 터프'와 이 음식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길래 글까지 쓸 영감을 불어넣는단 말인가. 먼저 이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요즘에야 대충 바다와 뭍의 단백질을 병렬하면 모두 '서프 앤 터프'가 되는 취급이지만, 엄밀하게는 일정한 형식을 지녔던 단어이다. 애초에 음식이라는게 그렇지 않은가? 예컨대 제육볶음의 이름에는 단지 돼지고기와 볶음이라는 조리법만 있을 뿐이지만 이것을 소금으로만 조미하거나 뼈가 붙은 갈비 등을 이용해 만든다면 그 누구도 그것을 제육볶음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서프 앤 터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서프 앤 터프란 좁은 의미로는 1960년대부터 발생한 필레 미뇽 스테이크에 새우 또는 랍스터를 같이 내는 음식을 말한다. 주인공은 소고기 쪽이므로 형식도 더 엄격하여, 쇠고기 스테이크에는 통상 쇠고기와 뼈에서 얻은 주를 바탕으로 끓인 소스와 전통적인 가니쉬를 곁들여야 하지만 해산물은 랍스터 테일을 기본으로 하되 랍스터를 통째로 내거나 지역의 특성에 따라 알래스카 게, 새우 등으로 대체되기도 하였고 조리법 역시 쇠고기를 굽는 그릴에 같이 굽는게 기본이지만 여러가지 변주가 가능한 것이 보통이었다.

까지가 무식한 일반론이고,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이 음식의 정신적인 속성에 대한 것이다. 인류가 바다동물과 육지동물의 단백질을 동시에 섭취하는 일이 1960년대 전에는 없었겠는가? 왜 유독 미국인들의 특정한 전통만이 이름까지 붙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1960년대라는 시절의 사정으로 돌아간다. 흔히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불리는 시절으로 오일 쇼크 발생 이전까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경제는 급성장을 거듭했다. 이에 따라 미국 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된 계층이 있으니 바로 중산층이다. 포드의 선더버드, GM의 말리부, 캐딜락의 엘도라도와 같이 오너 드라이브 지향형 고급 차량이 폭발적으로 쏟아졌을 뿐 아니라 가정에서는 임스 부부의 라운지 의자와 컬러 TV 따위가 보급되었다. 자연히 중산층의 문화적 인정 욕구도 크게 증가하였는데, 재클린 케네디는 이 시기의 미국적 욕망을 아주 잘 드러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식문화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이어져, 유럽적인 것들이 중산층을 대변하는 식문화로 자리잡는다. 보드카가 진과 버번 위스키를 앞질러 미국의 술이 되었으며 주로 상류층에 의해 제한적으로 소비되던 프랑스식 식문화도 본격적으로 미국 문화에 의해 전유되기 시작한다. '서프 앤 터프'는 그러한 흐름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는데, 문헌상 최초로 등장하는 60년대 초만 해도 지역 내에서 가장 값비싼 축에 드는 식당에서 내는 메뉴로 등장했지만 이내 중산층들이 찾을만한 식당들로 빠르게 확산됐다. 그리하여 탄생한 유럽식 미국 요리가 서프 앤 터프이다. 필레 미뇽 스테이크를 중심으로 격조 높은 유럽을 지향하지만, 한 번에 여러 요리를 내는 프랑스식 서비스à la française에서도 한 접시에 요리를 겹치는 만행만은 주저했는데 미국에서는 더 이상 그런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écrevisse를 비롯한 소형 가재 대신 식탁을 차지한 커다란 아메리카바닷가재가 두터운 지갑과는 별개로 유럽의 문화와는 거리가 있었던 미국 중산층들에게 선호된 것은 아닌가.

위의 모듬까스도 비슷한 맥락에서 발생한 요리이다. 1960년대 경양식의 양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밑바닥에서 시작한 만큼 다소 성장이 늦어 보급이 더 늦어지긴 하지만, 경제 성장이 지속되면서 한국인들이 상상하는 선진 문화, 알다가도 모를 서양이라는 환상을 채워줄 음식으로 자리잡았다는 점은 빼닮았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정말 힘있고 돈있는 자들이 즐기는 음식이라기보다는 새로이 대두된 중산층이 종종 문화적 만족을 즐기기 위한 음식으로 찾았으며, 이에 따라 공간이나 서비스 역시 유럽을 모방하되 어느정도 제멋대로였다. 스프로 시작해 각설탕과 커피로 끝나는 한국식 정찬의 눈물겨운 서비스 정신을 여러분도 기억하시리라.

그렇다면 모듬까스와 왕돈까스의 사정도 매한가지 아닌가? 지금도 무관심 속에 엄격한 서비스 양식을 따르는 유럽식 식사는 곧 그냥 음식의 이름만 어렵게 늘어뜨린 뒤 조금씩 준다는 통념이 지배적인데, 이전에는 오죽했겠는가? 그러니 음식은 실제로도 양이 늘어야겠지만 눈으로도 풍성해 보일 필요가 절실했다. 따라서 돈까스는 계속 넓어지고 풍성해보이기 위해 조연들이 구색을 맞춰줘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고기를 크고 두껍게 썰어주면 좋겠지만 미국과 달리 우리는 실제로 매우 부유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 미국의 중산층은 유럽의 부유층을 앞질렀지만 우리는 대통령이나 장관 즈음이나 되야 위스키 맛이나 볼 정도였으니.

그리하여 이 양식이 무식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왜 서프 앤 터프 이야기를 했을까?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형식 내의 아름다움은 만드는 사람들이 찾아가는 것이다. 서울에서 미쉐린 스타에 빛나는 레스토랑에서는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가격 속에 '서프 앤 터프'라는 이름을 이미 종종 사용하고 있다. '모듬' 역시 이 자리에 끼지 못할 이유가 없다 생각한다. 다만 그 누구도 모듬에게 그러한 대우를 해주고 있지 않을 뿐이다. 형식이 가진 가능성만 보면 이미 그 위치에 오른 신라호텔의 짜장면-짬뽕-탕수육에 뒤질 것이 없다. 과장을 좀 불어넣으면 경양식 모듬까스란

서로 다른 단백질의 조리 정도를 같은 조리법을 사용하면서 완벽하게 통제해야 하며, 채수 바탕의 과일과 토마토로 단맛을 낸 소스에(브라운 소스처럼 보이지만 색소라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홀렌다이즈와 유사하게 마요네즈를 바탕으로 한 화이트 소스라는 두 가지 소스를 어울리도록 적절히 만들어 배치하는 요리

가 아닌가? 심미적 고찰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는 형식은 정해져 있는게 아니다.


여기서 그래서 온달왕돈까스와 같이 오래된 가게들이야말로 참으로 이러한 형식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고 있으며, 역시 오래도록 살아남은 가게에는 비법이 있다 따위의 주례사 예찬론으로 마감한다면 인터넷에 나도는 폐지 같은 글을 하나 더하는 꼴이 된다. 감상에 젖어 비평을 감상문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온달왕돈까스의 돈까스는 남산류의 극단적인 두께까지는 아니지만 옷이 두터운 데 반해 전체적인 두께가 얇아 본체가 강한 소스의 맛을 감당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낸다. 밥부터 깍두기까지 보이는 대로 집어먹어야 한 호흡 넘길 수 있다. 타르타르를 얹어도 심심한 편인 생선까스는 조연의 역할에서 빛난다. 돼지고기와 생선 모두 분쇄해서 밀가루랑 섞어 뭉치는 분홍 소시지와 어묵의 시대 음식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호화스럽지만, 현대의 호화로움이란 이런 것이라고 하면 거짓말인 그런 위치에 있다. 그야말로 한 끼 식사이며, 앞으로도 주변의 생활인들에게 그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