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리 살롱 - 요구자(Pretender)
케이크의 레시피가 절대 변하지 않는 시그니엘 서울 제과점의 몇 메뉴가 바뀌고 다시 또 시간이 흘렀다. 그나마 계절 메뉴라고 부를 수 있는 두 가지. 밤 바바와 국산 배-피칸 앙트르메를 모셨다. 기존 시그니엘의 냉장고를 채우고 있었던 오페라 등은 오늘 논의의 대상이 아니므로 생략한다.
공간 이용시와 포장시 가격에 한 번 차이가 있지만(KRW 3000, 기억하기로는) 전용 포장용기는 다시 KRW 2000을 받기에 이 간극은 다시 메워진다. 그 돈을 받고 하는 포장은 솔직히 처참하다. 링은 커녕 바닥지에 테이프 하나로 버티는 꼴인데 저렇게 무너지지 않고 들고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알고 대비를 했기 때문이다. 젊은 직원들은 케이크를 포장할 경우 보냉제가 필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KRW 15000+의 가격으로 쁘띠 갸또를 판매하는 곳의 현실이다. 호스피탈리티의 본질을 모독하는, 서울의 진면모가 드러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제각기 창가에서 자신들을 찍고 있으니 아무렴이다.
그래, 이제 제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첫째로는 홀에서 취식한 밤 바바에 랍상 소총까지 KRW 30000+를 단 하나의 경험에 밀어넣었다. 첫 인상은 긍정적이었다. 바바 반죽의 내부의 그물망 구조가 적절하게 꼬냑 유사의 과실 껍질의 단맛을 빨아들이고 있었고, 밤 풍미는 첫입에서는 향에 가깝게, 내부로 진입할수록 깊어지는 구조가 쁘띠 갸또로서 바바를 적절히 재미나게 풀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광의의 휘핑 크림인 상층부의 크림은 지방을 더하며 전체를 감싸기보다는 반죽의 단맛-향과는 단절되는 느낌으로 바바의 문법을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가격에 걸맞는 복잡함, 그리고 조화로움은 전혀 아니었다. 여덟 번째 바바가 신맛을 이용하지 않았기에 다행이라고 해야하는가? 안느 소피 픽이 십 년도 전에 만들었던 2가지 크림의 바바 레시피보다 이게 나은 점이 있을까? 국내의 식재료 문제를 떠나서, 레시피를 두고 보았을 때 완전히 기호품의 영역에 올라선 가격을 만족시키는 요소가 없다.
국산 배와 피칸을 사용한 케이크의 사정도 낙관적이지 않다. 전체적으로 질감의 밀도가 괜찮은 무스지만, 배의 향을 느끼겠다고 단단히 각오해야 스쳐지나가는 배의 느낌은 얄팍하다. 배의 가공을 전적으로 수분의 감소, 당분의 증가의 측면에서만 접근했는가? 피칸의 사용은 흥미롭긴 하나 여타의 외래 견과류가 그렇듯이 다른 것들도 불만족스러운 현실에서 적당히 골랐고 적당히 가공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반드시 아메리카 대륙 식으로 파이를 굽거나 캐러멜, 소금의 풍미와 짝지으라는 교조주의적 발상이 아니다. 무스, 파트, 배, 피칸. 질감과 풍미를 왜 이렇게 선정했고 배치했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재료가 보여주는 주제의식은 이미 나와있는데, 정작 기억에 남는 것은 배와 피칸이 아니라 크림과 반죽이다. 누군가는 그래 낯선 것들을 넣고도 프랑스의 맛이 난다고 하겠지만 그렇다면 왜 이 두 재료를 내세우겠는가? 프랑스의 일상품이 왜 서울에서는 기호품이어야만 하겠는가?
제과는 설탕과 유지방을 통해 무한에 가깝게 창작이 가능한 인공의 세계이다. 그렇기에 생각을 읽는 행위의 재미가 있는 요리이고, 생각을 넣는 행위가 즐거운 요리이다. 짠맛 주방의 요리에 비해 시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우니 박봉의 견습생 군단을 통해 파리로부터 동아시아의 대도시까지 발을 넓힐 수도 있다. KRW 12000+의 가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재미를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시그니엘의 제과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호텔들은 어쩌니 저쩌니 하는 글로 이어지지는 않으니 안심하시라. 이미 자주 사먹는 여러 종류의 케이크들에 대해서도 블로그에 게시하지 않고 넘어간 바 있다. 사진을 보면 호텔 제과 주방의 현실이나 떠오를 뿐 논의할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홀케이크는 이제 수정을 거쳐 주문하는게 일상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