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가니에르 서울 - 2022년 가을

방문 전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의 예약은 전화, 이메일 및 호텔 웹사이트나 서드 파티 예약 시스템 등으로 가능하다. 예약 확정시 확인 문자가 발송되며 방문 1일 전 다시 확인 전화가 있다. 당일에는 확인 전화를 하지 않는다.

요리

그랑 메뉴에 혼쭐이 난 경험이 있으므로 이날은 레스프리 피에르 가니에르(舊 쁘띠 에스프리)를 선택했다.

가니에르 서울은 본인의 긴 공백도 공백이지만 어느정도 레퍼토리로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긴 고민에 빠져있다. 물론 나는 이러한 피에르 가니에르의 한결같음은 단점보다는 장점이 크다고 생각한다. 서울의 뭇 호텔들이 (광화문의 포 시즌스를 포함해서) 나름대로 계속 신선한 인선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지만 피에르 가니에르는 기본적으로 더 이상 이룰 것이 마땅히 없는 입장이므로 꾸준한 서비스와 일관된 스타일 유지가 중요하고 숙련된 근무 인력의 보존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물론 호텔 오트 레스토랑의 특징상 필연적으로 끊임없이 교체되는 부분이 있으니, 관리자들의 근속이 유지되는 선에서 그들의 어깨에 QC에 대한 무거운 책임이 주어진다.

이날의 오로되브르들은 레스토랑 내의 명암을 전부 보여주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커다란 그림부터 세세한 부분으로 나아가자면, 첫째로 나름의 완결된 흐름을 가진 구성은 굉장히 탄탄하여 잘 준비된 인상을 주었다. 키르 로열로 시작하여 피냐 콜라다-육회의 단맛으로 끝내는 구성이 잘 정돈된 맛의 논리를 따르는 가운데 트러플과 배를 통한 계절의 조화, 동서의 조화를 동시에 그려내는 재치가 엿보인다. 그러나 개별 실행의 사정은 조금 복잡하다. 먼저 키르의 샴페인은 질감에 치중한 나머지 알코올의 부즈가 먼저 다가오는 문제가 있었다. 레시피는 크게 바뀌지 않고 있으니 온도의 변화에 따른 차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파니니는 그릴 자국의 선명한 시각적 기호와 더불어 그뤼에르와 트러플 향이 겹겹이 쌓여 얻어내는 향이 발군으로, 시트러스로 한 숨 쉬어가고 다시 트러플로 이어지는 흐름이 조화롭다. 다만 트러플 피낭시에는 좋은 실행을 감안하더라도 개념적으로 잘못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맛과 짠맛을 넘나드는 설정, 트러플이라는 주제 모두 좋고 트러플을 한 장 밀어올린 모양까지도 괜찮지만 특유의 페트롤 향을 강조하기 위한 오일까지 올렸을 때에는 과유불급의 지경에 이른다. HACCP 업장인 호텔 특성상 사용할 수 있는 트러플이 경쟁력을 가지기 어렵긴 하지만, 그럼에도 트러플을 주제로 삼은 만큼 그 자체에 도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트러플을 빛내는 조연으로 트러플 오일을 다시 사용함으로서 좌초한다. 쉬운 방법이지만 정서적인 정동을 일으키는 방식은 아니다. 이런 곳에서도 재료의 선택지가 좋고 나쁨이 아닌 있고 없음 수준을 고민해야 하는 현실이 보이는 듯 하다. 단맛으로 끝맺음을 담당하는 피냐 콜라다와 육회는 물성에 있어서의 정교함에 차이를 보이는데, 아삭거리는 것부터 물렁거리는 것까지 비슷하게 녹아드는 놀라운 일체감을 보여주는 육회와 달리 피냐 콜라다는 끈적이는 코코넛 밀크를 크게 변형하지 않은 차이를 보이지만 기분 좋은 쪽은 피냐 콜라다 쪽인데, 확실한 코코넛 향 덕분이다. 육회는 질감은 절묘하게 맞췄으되 육회라는 음식의 만트라를 구현하지 못하고 좌초한다. 육회란 설컹거리는 것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날고기의 고소한 맛-그리고 썩 만족스럽지 못한 질감에 쉽게 부서지는 배의 crunchy한 질감으로 변주를 주는 음식으로, 결국 생고기는 같은 수준의 것을 쓰는 국내 환경을 감안한다면 차이는 향신료 등 맛내기에서 보여줄 수 밖에 없음에도 딱히 신경쓰지 않는 맛이다. 정서로서는 합일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작 맛으로 보여주는 비전이 없으므로 반 쪽 짜리 성공이다.

feuilleté: verrine de champagne et noix de coco, panini et mousse de Gruyère, jamón serrano et citrus "Hallabong", financier à la truffe, verrine piña colada, brochette "tartare de boeuf coréen"
Galette de chatâigne moelleuse et sauce "Apicius", julienne de cèpe des bois assaisonner d'une vinaigrette Khalua, Mousseline de Saint-Jacques; jus de cresson de fontaine émulsioné

전채인 세 요리는 참으로 "피에르 가니에르" 다웠다. 날송이를 커피 리큐르에 적셔 밤-커피 리큐르로 이어지는 단맛을 내세우는 파격이, 모로코를 내세우는 파스티야와 "아피시우스"를 내세우는 또 하나의 파격이 두 번 나를 주저앉힌다. 물냉이로 덮어낸 가리비 무슬린의 바닷내음을 맡을 때 쯔음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절경이었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하지는 않겠다. 역시 동아시아 사람으로서 송이에 색다른 향을 입히는 것이 낯설고 어렵게 다가왔지만, 팔레트를 입히는 역할도 역할이고 송이와 밤을 이어냈다는 점을 높이 산다. 특히 이 밤은 거의 식사 내내 주제로 등장하는데, 밤이라는 선택 자체도 마음에 들고 다양한 활용을 보여주는 기법 역시 나름의 솜씨를 뽐내는 측면이 있어 즐거움을 더한다.

파스티야는 양질의 비둘기는 커녕 양질의 오리도 구할 수 없는 국내 가금류 시장의 현실을 반영해 파테 비슷한 것을 채워 궁여지책으로 마무리한 듯 보이지만 아피시우스 소스의 절묘한 조화가 현실의 어두움을 씻어낸다. 아피시우스, 그래, 그 아피시우스다. 로마의 요리사. 가룸까지 쓴 티는 나지 않았지만 꿀 바탕에 향신료를 다양하게 넣고 만드는 자극적이고 달콤한, 그리고 끈적거리는 아피시우스의 만능 소스였다. 역시 앞선 깔루아-밤의 단맛의 뉘앙스를 이어받아 가을 정취를 살리는 한 편, 공간이 아닌 시간으로도 열려 있는 가니에르 특유의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이 가리비 무슬린은 솔직하게 말해 먹는 순간에 기분 좋기로는 셋 중 으뜸이었지만 완벽할 여지가 남아있다는 느낌도 진하게 남아 평가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좋은 방법을 택한 만큼 결과의 만족도 역시 보장되는데, 패류의 향이 썩 선명하게 살아있는 가운데 풍성한 지방이 충실하게 전달하는 맛의 완성도에 더해 적절하게 배치해넣은 크럼블의 바삭거림이 그림을 완성한다. 전형적인 프로의 작품인데,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면 온도-그리고 그 온도에 설정되어있는 질감에 대해 의문을 남긴다. 기본적으로 버터와 크림 파티시에라는 바탕은 바뀌지 않기야 하겠지만, 달걀을 더해 크넬 느낌을 낸 다음 조금 더 뜨겁게 내는 방식이 곧바로 떠오를 만큼 온도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일단 취식 순서에서 뒤로 밀리는 만큼(제공 순서가 그렇다) 설정과 빗나갔을 수도 있겠으나, 용기 끝부분을 긁어내는 듯한 느낌이 살짝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실크와 같은 질감을 충분히 형성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프로가 선택할 일이지만 분명 다른 길은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나게 맛있었다. 한 차원을 넘어서면 이렇게 버터 지짐이의 표면을 따져대지 않고도 즐거운 세상이 있다.

이렇게 세 요리에 맞춘 와인으로는 슈냉 블랑이었는데, 무조건 프랑스라는 컨셉-요리와는 정반대다- 속에서의 선택이라는 느낌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요리의 진한 단맛에 무뎌지지 않고 버텨 납득했다.

Paupiette de sole garnie d’une farce fine aux escargot petits gris, fondue d’épinard; hollandaise à la truffe noire

앞선 '밤-아피시우스'가 단맛이었다면 홀렌다이즈와 알자스 리슬링으로 꺾어들어가는 다음 요리는 당연히 신맛이었다. 기본적으로 포피에트란 이탈리아어로 미트볼polpetta에서 따온 요리인데, 주로 육고기의 문법을 이런식으로 엎어놓는 것은 재미나긴 하지만 실익이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덩어리가 작긴 하지만 루이지애나의 가자미 요리Stuffed flounder가 생각나기도 하고 혀가자미(sole) 파르시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하여간 큰 틀에서 가자미 종류에 안팎으로 맛을 덧대는데 혀가자미는 단맛이 강하고 이 가자미는 딱히 그렇지 않아 맞아떨어질지는 의문이었다.

정작 먹는 도중에는 홀렌다이즈의 신맛이 거의 전부를 이루고 시금치의 녹색 맛이 보조를 이루는 실정으로 단백질의 맛은 무대 뒤로 후퇴한다. 어느 쪽이라도 단맛이 조금 선다면 다른 그림이 아니었을까. 우리 가자미보고 지중해 풀 뜯어먹으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날이 추워져 시금치에 단맛이 돌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트러플은.. 홀렌다이즈와 전형적인 짝이지만 역부족이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여기도 빵을 주면서 식전빵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전하므로 이제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Tournedos de bœuf coréen grillé terminé dans une sauce de vin rouge au cassis, feuille de chou grillée, navets braisés 

쇠고기는 덩어리 크기부터 기함을 할 정도라서 사실 속으로는 탄식을 뱉었다. 방금 빵을 두고 "먹고는 살아야지" 생각을 했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이토록 어려웠나. 나는 덩어리가 작아서가 아니고 커서 탄식했다. 에스프리 피에르 가니에르가 가장 짧은 코스임을 감안하면 더 긴 코스들도 있을텐데 더 작아져야 옳다. 고기 포식 따위는 이런 식사의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거니와 디저트마저 썩 긴 프랑스식 정찬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문제는 그럴 경우 아마 소비자가 가만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비자부터 정신 좀 차려야 한다.

하여간 그런 문제를 뒤로 하면 정말 뻔하고 뚜렷한 방향성-그렇다. 고기 요리라서-, 그리고 좋은 방향성을 드러낸다. 우연치 않게도 롯데 수입의(정말로 우연이다!) 로장-세글라의 세컨드를 짝으로 내는데 너무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역시 보르도 블렌드-그리고 보르도 블렌드에 헌상하는 수준의 전형적인 소스의 짝으로 맞춰낸다. 그릴 무늬가 주장하듯이 그윽한 그릴 향은 담배향에, 쇠고기와 카시스는 보르도 블렌드의 정열적인 팔레트에 자연스레 연결된다.

Royale de morille pralinée et sésame noir

여기서 반전이 하나 있다면 보르도-그릴로 이어지는 검은 계통의 향에 모렐에 흑임자로 제동을 건다는 점이다. 제동이라기보다는 급반전으로, 입안으로 들이닥치던 운동 에너지가 강렬했던 만큼 꺾여 나가는 힘 역시도 강렬하다. 아마 작정하고 지루하게 만들자면 이쯤에서 적당히 만들다 만 것 같은 투르느도 로시니로 트러플-트러플-트러플이라는 정서적인 요리를 완성하고 물러날 수 있었을 텐데, 흑임자와 모렐의 견과, 흙향으로 당기는 지방 뉘앙스를 급작스레 불러옴과 동시에 흑임자의 단맛으로 다시 한 번 흔들어놓는다.

glacé ananas, confitur de abricot
Verrine chmapange et hibiscus
gateau de mousse de chatâigne; tuile chatâigne
mignardises; canelle, geleé aux pomme verde; gateau Opera; Verrine de chatâinge

디저트와 미냐디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마지막에 전부를 묶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일단 하나 미리 말하자면 수플레는 알라카르트로 예약하여 추가했다(KRW 30000). 피에르 가니에르 본인이 완성한 역작이기도 하고 레스토랑에서나 낼 수 있는 디저트라는 설정에도 가장 부합하므로 추가를 선호하는 편인데, 이날은 중차대한 문제가 있었다(후술).

디저트는 여러모로 피에르 가니에르가 보여줄 수 있는 유희를 마무리하는 역할에 충실하다. 하나 하나가 맥락 속에서 재미를 지녔으니 따로 떼어 따져드는 것이 무익하다. 디저트 베린은 오로되브르의 베린과 색상 배열까지 똑같으나 또 다른 맛-히비스커스-으로 재미를 더하고, 밤 무스에 이어 미냐디스의 밤과 코냑으로 만든 베린까지 먹고 나면 그야말로 밤의, 밤을 위한 밤무대다. 밤의 사랑스러운 섬유질과 단맛에 흠뻑 취하는 가운데 파트너를 계속 교체하여 밤의 자리를 만드는 영리함이 있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최고의 밤은 마지막으로 한 입 푹 떠먹은 베린이었다. 부드럽기나 향의 조화까지 단순하게 만드는 베린의 모범이었다.

문제는 여러 디저트에 다 같이 쓰이는 것으로 보이는 파인애플 소르베 크넬이었는데 표면을 보면 단박에 알겠지만 크넬을 떠 둔 다음 영하 18도쯤에서 얼려버린 것이었다. 구체적인 수치야 틀릴 수 있지만 방법은 반쯤 확신한다. 크넬을 바로 뜬다면 이렇게 딱딱하기가 불가능할 뿐더러(크넬을 만드는 도구는 칼이 아니라 숟가락이다) 표면이 마르지도 않는다. 가니에르 수플레 위의 아이스크림은 그가 즐기는 온도 대비의 복잡성을 상징하는데 정작 한 때 그를 상징했던 정교함과는 가장 먼 방식으로 제공되어 적잖이 당황했다. 지방이 있는 아이스크림과 그렇지 않은 주스 소르베의 차이라던가, 영하 18도에서의 빙점을 계산하지 않는 등의 기술적인 문제는 실은 부차적이다. 피에르 가니에르 본인이 말하듯이, 그의 레스토랑에 근무하는 요리사의 자격은 기술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그의 레스토랑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스크림 산수 계산법보다도 자신이 하는 요리를 만드는 이유를 보여주는 마음이다. 이 크넬에는 바다 건너편에 있는 무슈 가니에르와의 공감, 그리고 이 요리를 받아들 손님과의 공감이 모자랐다.

사족으로는 기왕이면 「위대한 수업」방영을 기념해서 오리지널 초콜릿 수플레를 내면 더 좋지 않았을까? 베네수엘라 초콜릿 따위는 없지만 가니에르가 말한 '코냑과 달걀으로 에멀젼을 만든다'는 언급을 소비자들이 직접 경험해보면 좋지 않았겠는가?


총평: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의 2022년 가을 메뉴는 특유의 진취성과 개방성을 드러내면서도 유머러스한 감각을 잊지 않아 큰 만족을 주었다. 서울에서는 피에르 가니에르만이 할 수 있는 요리를 한다는 점에서 이곳의 존재 가치는 특별하다. 조리 방법에 있어 한 차원 높은 창의성과 다양성을 보여주는 피에르 가니에르 특유의 요리 방식은 여전히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한국 땅에서 나는 냄새를 까먹을 정도로 이곳을 방문한 지가 까마득함에도 불구하고 장기 근속에 빛나는 현지 직원들의 손길에 힘입어 한국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를 더하는데 성공했다. 가니에르가 맨 처음 만든 레시피였을 생강/인삼 수플레보다도 이날의 흑임자나 밤 베린이 더 기억에 남을 정도였다. 인간 피에르 가니에르와 그의 팀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하는 요리라는 점에서 그의 요리는 위대하다.

서비스:

가격: 에스프리 피에르 가니에르 17만원, 오마쥬 아 세울 26만원, 그랑 메뉴 34만원. 아직도 이 가격을 유지중으로 매우 큰 박수를 보낸다. 잘했다 못했다를 떠나서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 점에서.

음료: 글라스 샹파뉴가 계속 바뀌는 정도를 제외하면 리스트의 큰 맥락은 유지되고, 짝짓기 역시 큰 틀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세세히 따질 기력이 없다. 이날 굴이 포함된 메뉴를 주문하지 않았지만 아마 주문했다면 분명히 샤블리 퍼미에 크뤼가 나왔을 것이다.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