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가니에르 서울 - 2024년 여름 <프렌치 수프> 한정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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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개봉명 '프렌치 수프', 원제 '도당 부팡의 열정'은 베트남의 트란 안 홍 감독이 제작한 영화로 요리와 로맨스를 다룬다. 영화 평론을 업으로 삼지 않는 본지의 평가를 필요로 하지 않고도 이미 위대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극찬받는 이유는 프랑스의 요리 전통과 서사를 녹여내는 데 성공한 점이 크게 작용한다.

이 영화의 요리는 모두 피에르 가니에르의 손을 거쳤으니, 도쿄 피에르 가니에르에 이어 서울에서도 피에르 가니에르 레스토랑에서 영화의 개봉을 기념하는 특별 메뉴가 준비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이 영화는 본래 11월에 개봉했고, 미국에서도 2월 개봉했으니 사실 겨울에 봐야 하는 영화고, 그런 요리가 나온다. 물론 아직 인생은 한여름이라는 대사가 귓가에 아른거리지만, 요리의 구성을 보면 아무래도 한여름, 그것도 19세기 말에는 조금 어려울 듯 하다.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은 계절과 세월을 거슬러 오른다. 물론 그 시작을 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가니에르 스타일. 첫 전채 중에는 특히 생선으로 만든 리비그(Liebig)의 훌륭한 신맛과 지방의 조화,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질감이 눈에 띈다. 리비그는 에르베 디스와 가니에르의 협업을 상징하는 요리법 중 하나로, 이 레스토랑에 흐르는 혈통을 드러내면서도 한국적 흰살 생선으로 멋진 기교를 자아낸다. 미모사는 영화의 흔적만을 남겼는데, 작게 만든 재미는 좋지만 엄밀하게 말해 나는 이런 요리는 캐비어가 주인공인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서도, 바로 그런 그림을 위해 크림의 비중이 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니에르는 크룩 당보네를 곁들이라고 하지만, 크림 프레슈에 약간의 스타치만으로도 캐비어는 멋드러지게 빛날 수 있다. 이외에도 따지고 들자면 가다랑어-간장, 간토 요리의 뉘앙스와 그렇지 않은 식감의 장어가 만나는 타르트 같은 존재도 평소라면 흥미를 끌었겠지만, 오늘은 주인공이 많다.

외제니의 볼오방은 이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정신을 재현한 것만으로 높이 살 가치가 있다. 촘촘이 쌓인 패스트리 반죽을 베샤멜 뉘앙스의 소스에 잔뜩 적셔 먹는 요리는 현대적인 요리의 문법, 즉 신선한 재료의 개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전형적인 재료의 폭력적인 쾌락을 선사한다. 영화에서는 해산물을 주제로 한 것을 그대로 살려 전복과 가재로 뉘앙스를 살렸는데, 조리법의 특성상 패류나 갑각류의 껍질 맛이 두드러지지 않은 것은 아쉬우나 점도 높은 유지방에 연약한 해산물을 푹 담그어 그 촉감만을 앗아가고 유지방으로 만족해 버리는 쾌감은 죄책감마저 들게 하는 측면이 있다. 다만 재고해야 할 것은, 쁘띠 갸또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균형의 문제. 큰 요리를 작게 만들 때에는 필연적으로 비율이 변한다. 반죽은 많고, 속은 적어진다. 거기에 균형을 갖추기 위한 정원까지 갖추었으니 여름에는 존재감이 부담스러워야 할 소스가 되려 기운을 펴지 못한다.

마당에서 가져온 양상추와 송아지는 흉선과 단호박 벨루떼로 그려지는데, 흉선에서 푸아 그라 라비올리로 이어지는 동물적 감각은 앞선 요리의 흐름을 백에서 적으로 매끄럽게 이어받지만, 흉선과 양상추를 위한 소스의 균형은 두 주인공을 살리기보다는 스스로를 위해 희생시키고 있었다. 흉선은 기본적으로 텍스처를 위한 요리가 되어야 하는데, 팬으로 구웠다기에는 표면이 무르고, 오븐으로 익혔다기에는 겉이 과도하게 굳은 흉선은 신맛-단맛의 주장이 강한 소스를 담아낼 그릇이 되어주지 못했다. 마침 파리의 비스트로노미를 상징하는 요리 중 하나가 예의 볼오방과 흉선 아닌가? 성급함이 느껴졌다. 반면 단호박 벨루떼는 갈고 닦은 듯한 완벽한 질감과 호박스러움의 균형을 갖추면서도 라비올리의 첫 한 입이 주는 대비로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한 입 씹는 순간 입안에 들이닥치는 약간의 육수와 빠르게 녹아내리는 지방, 딤섬의 묘가 녹아들었다.

포토푀는 트러플과 부이용이라는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면서도 가니에르 스타일의 재치있는 변주로 그려낼 수 있는 최선을 냈다. 끓이는 조리법의 위대함을 품어낸 쇠고기와 트러플의 호흡은 간명하면서도 파괴적이다. 물론 영화의 레시피와는 현실적인 이유로 큰 거리가 있으나, 그 사랑의 이유만은 느껴지는 포토푀의 연속이었다. 사랑과 열정이 아니고서는 어려울 만큼 끓이고 또 끓였구나! (다만 함께한 육가공품에게서는 익숙한 느낌이 있었다)

디저트인 '배와 크림', '오믈렛 노르베지엔' 모두 영화의 등장인물이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오믈렛 노르베지엔이었다. 배와 크림은 안전하고 좋은 맛이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가니에르의 이벤트에 어울릴 요소는 아니다. 마지판 대신 인심 좋게 튀일을 올렸지만 이 레스토랑에는 더한 것을 기대할 이유가 있다. 반면 타르트 노르베지엔은 잡다한 기술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앞서의 볼오방처럼, 단지 이 시대 서울에 존재하지 않을, 존재하지 못할 그것의 현현만으로 만족감을 준다. 달걀의 열전도성이 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발명되었다는 뒷이야기가 도는 이 디저트는, 그 당시로서는 최신의 과학적 발명을 찬미하기 위해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르노트르, 프리-에르메 시절 옛스러운 프랑스 제과의 영혼을 보여준다. 키르슈 플람베로 마지막까지 끌어올린 캐러멜의 느낌과 폭발적인 증류주의 뉘앙스, 그 속을 파고들면 역시 냉장고가 없던 시절 보존식의 강렬함을 품은 절인 체리가 맞아주면서 에스코피에의 향수를 더했다. 그 속에서 오로지 아이스크림만이 홀로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적인 간편한 질감을 뽐낼 뿐이다. 새로운 조화, 신선한 재료를 찾는 경쾌한 디저트들에게는 약간 미안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그런 디저트들은 쾌락의 만찬의 끝에 서기에는 연약하다. 결국 탐욕을 위한 인공의 예술이라는 제과의 본질을 관통하는 타르트 노르베지엔, 사실 그 자체로 대단히 칭송할 요리는 아니다. 폭력적인 과거의 요리, 이 역시도 볼오방과 같이 균형마저 머랭에 크게 치우친 부담스러운 존재이지만 그래서 좋은 것이 있다. 체리향을 풀풀 풍기는 불타는 머랭. 그런 시대를 꿈꾸고 살아가는 두 주인공을 떠올리면 이 요리를 결코 미워할 수 없다.

각자에게 이 영화가 사랑받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내게는 무엇보다도 카렘과 에스코피에의 시대 프랑스 요리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영화감독을 부둥켜 안고 싶다. 무엇이든 백 년 전을 따라해서 쉬울 것은 없으리라. 물론 잘 되지도 어렵다, 특히 장소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이런 요리들은 해보는 것, 먹어보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경험이 되고 영감이 된다. 많은 요리사들이 요리학원의 교재 따위에서 어설프게나마 해본 적은 있겠지만, 프로의 수준에서 부딪혀본 경험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주제로 무려 피에르 가니에르와 부딪혀볼 수 있다니, 외지니와 도댕이라면 이런 기회를 마다하겠는가? 심지어 우리는 뜨거운 사랑을 할 필요조차 없이, 그냥 왕자마냥 행차만 하면 된다. 이럴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