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가니에르 서울 - 2021년 봄

지난 글으로부터 반 년동안 피에르 가니에르를 다시 리뷰하지 않으며 고민했다. 다른 프렌치 레스토랑을 써야 하는가. 아니면 피에르 가니에르도 쓰지 않는게 맞는건 아닌가.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가.

그래서 의, 업스케일 파인 다이닝으과는 다른 격조를 지향하는 레스토랑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이 부분을 보완하고 나서야 다시 피에르 가니에르를 다룰 의지가 생겼다.
서론으로, 여러분께 파인 다이닝과 피에르 가니에르가 각각 어떤 의미인지 묻고 싶다. 롯데 호텔의 홈페이지에서는 요리계의 피카소, 식탁의 시인이라는 경칭으로 그를 추켜세우는데 대체 이게 누가 붙인지는 몰라도 피에르 가니에르의 요리가 뭐가 그렇게 다른가. 둘째로 이 레스토랑은 프랑스식 파인 다이닝이라는데 그게 대체 뭔가.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아보고자 한다.

요리와 조리에 대해서 코스의 흐름의 위치에 따라 이야기할테니, 그 이전에 이 피에르 가니에르적 요리가 대체 뭔지 좀 알아보자. 그는 스스로를 피카소로 칭한 적이 없고 누가 소문을 내기 전에는 피카소로 별로 불린 적도 없다. 그가 내거는 표어는 "Tourné vers demain, mais soucieux d'hier"인데, 과거를 존중하며 미래를 마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거 완전 여느 레스토랑에서나 이제는 많이 볼 수 있는 문구가 아닌가? 그러나 그의 선언만으로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피에르 가니에르는 실제로 자신의 요리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많은 인물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말을 하지만 그의 컬리너리 히어로는 요리사가 시인이나 문학가, 회화 화가도 아닌 건축가 루디 리치오티(Rudy Ricciotti)라고 말한다. 둘은 절친한 관계로 둘의 이름이 담긴 와인을 만들기도 하고, 쇼에서 리치오티가 요리를 하고 가니에르가 조형을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리치오티에게는 답이 있을까? 리치오티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마르세유의 MuCEM에서 가니에르의 요리철학을 읽을 수 있을까? 그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MuCEM은 바닷가에서 건물을 관리해봤을 이라면 알 해풍의 공포와 그것에 불구하고 건물이 존재할 자연의 장관, 그리고 역사적 중요성과 소재의 발달이 기여하는 건축물의 질적 우수성 등 다양한 가치들을 대변하지만, 그것을 통해 가니에르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다시 누가 붙였는지 모르는 "피카소"로 돌아가자. 근래 한국에서 전시까지 한다는 피카소. 피카소의 몇 마디를 인용하겠다. 첫째로, 그는 "찾지 않고 발견한다." 정확한 원문은 Yo, por mi parte, trato de representar lo que encuentro, no lo que busco로 전하는 문헌도 있으나, al pintar, lo que pretendo es mostrar lo que encuentro no lo que busco이른바 "Marius de Zayas에게 보내는 선언". 출처 확인 실패.가 원문이다. 독일 문헌에서 유사한 취지로 Beim Malen bedeutet ‚Suchen‘ meiner Ansicht nach gar nichts. Auf das Finden kommt es anSchifferil, P.(Hrsg.) (1957). Pablo Picasso. Wort und Bekenntnis. Die gesammelten Dichtungen und Zeugnisse. Übers. Elisabeth Schnack, Paul Celan. Ullstein.라는 문장도 발견된다. 각각 옮기자면,
첫 문장은 "내 역할에 있어, 내가 (우연히) 찾은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시도하는데, 이는 내가 (의도적으로) 찾은 것이 아니다."
두 번째 문장은 좀 더 어려워보이지만 거의 같은 말이다. "그림을 그릴 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내가 (우연히) 찾은 것을 보여주며, (의도적으로) 찾은 것은 아니다."
마지막 독일어는 "내 그림에 있어서 내 생각에 '(의도적) 찾기'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림은 (우연히) 찾는 일에 달렸다.auf etw. ankommen의 뉘앙스를 구글 번역기는 이해하지 못하므로 오해 없길 바란다-역주"
내가 이거 다 찾고 여러분을 위해서 출처 확인을 위해 뉴욕 MoMA에 피카소 전문가에게까지 확인을 받아서 말하기를, 이 문장의 원문은 1923년 The Arts에 실렸으며, 원문은 스페인어이고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영어 번역본이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What one does is what counts and not what one had the intention of doing.

이러한 피카소의 문헌들은, 그 다음 문장에 의해 의미가 명확해진다.
We all know that art is not truth. Art is a lie that makes us realize truth, at least the truth that is given us to understand.
이는 확실한 출처를 가진 문헌Zervos, C. (1935). Conversation avec Picasso. Cahiers d'Art. Volume 7-10.을 통해 그 의미를 거의 확정할 수 있다. 유명한 문구인 "나는 찾지 않고 발견한다Ich suche nicht, ich finde 또는 I don't seek, I find"로 알려진 문구의 원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Yo no busco, encuentro. Todos sabemos que el arte no es verdad. El arte es una mentira que nos enseña a comprender la verdad, al menos la verdad que —como hombres— somos capaces de comprender.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의도적으로) 찾지 않고, (우연히) 찾는다. 우리는 모두 예술이 진리[Verdad/Wahrheit] 아니라는걸 안다. 예술은 거짓말이지만, 우리가 진리를 이해하도록 가르치거나, 최소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친다.

왜 이렇게 피카소의 말 몇줄을 두고 따져댔는가? 이러한 피카소의 세계관의 배경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그 다음 니체 선생님 입장하세요. 피카소의 이러한 (의도적)-(우연적) 찾기의 문제는 곧 니체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비로부터 추출되며, 아폴론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을,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전개되는 니체 철학을..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쇼펜하우어가, 쇼펜하우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그리고 니체의 바탕이 되는 고대 그리스 문학과 신화들이. 이러면 오늘 안에 피에르 가니에르에 닿을 가능성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충 설명하자면, 니체는 이상적인 것이 존재하고 그걸 어떻게든 가져보려는 시도로서의 기존의 예술을 싫어했다. 요리로 치면, "이 스시 샤리가 이상적이다"라고 말하지만 당신은 이상적인 스시 샤리를 먹어볼 수 없다. 그리고 그게 가능할 것 같다는 욕망이 당신을 파멸로 이끈다. 요리사가 밥을 천만번 짓고 일억번 쥐어도 상상속의 이상적인 밥덩이라는건 현출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저 형이상학적 밥덩이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는 이러한 지옥을 전복한다. 그냥 있는대로 즐기고 가는대로 취한다. 이상적이지 않은 밥덩이를 긍정한다. 우연을 긍정한다.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언젠가는 그 방식으로 필연마저 손아귀에 넣는다. 그 유명한 영원회귀인데, 아직 거기까지 가기 전에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한바탕 한다. 음악사적으로는 바그너나 슈트라우스의 불협화음의 전격적 채용부터 쇤베르크의 불협화음의 해방과 같이 고전 음악에서는 단지 나쁘거나 이상에서 먼 것으로 취급되던 것들이, 불안과 우려, 비극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덧없는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삶의 즐거움으로 뒤집힌다. (모차르트 4중주 얘기는 말아라-니체는 이미 알고 있다.)
상세하게 따지자면 엉터리인데 대충 뭐 이런 배경이다. 이상을 좇을 것이냐, 아니면 이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인생을 살 것이냐?

요리에는 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현대 요리에 이 배경이 다 필요하다. 현대 서구의 주방에서, 특히 냉전이 시작된 이후 "Fine dining"이나 "Gastronomy"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요리에도 이러한 철학이 개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리는 고전의 유산을 온전히 이어받은 조각이나 회화, 오페라 등과 달리 "아폴론"부터 제대로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객관적으로 좋은 요리의 기준이 자연과학의 손을 타고 빠르게 발전했다. 전근대적인 평가의 기준들이 과학에 의해 재편되었으며 그 요구에 부합하기 위한 기술들이 놀랍도록 발전하였다. 이제는 그 이후다. 저 철학자가 남쪽나라를 끌어와서 기존의 문화권의 가치체계를 깨뜨리듯이, 어떤 문화권의 요리의 탁월함이 다른 문화권의 요리의 결핍을 비추며, 결핍을 비추는 만큼 그것을 메워줄, 혹은 초월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바로 삶의 감각이 주제로 등장한다. 이를테면, 비빔밥의 이상향에 도전하는 대신 비빔밥을 해체하고 재조립한다. 비비는 행위가 크게 그려진 비빔밥, 달걀을 둘러싼 색이 맛을 전복해버리는 비빔밥과 같은 놀이에 가까운 요리들의 경험은 이상적 비빔밥을 좇지 않으면서도 비빔밥의 즐거움을 현실에 상륙시킨다.

셰프 피에르 가니에르의 요리는 이런 배경을 두고 이해된다. 그의 요리를 두고 "클래식"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가 과거를 잊지 않을지언정 그의 요리를 고전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과거에 프랑스의 식탁에는 오를 수 없었던 것들, 정찬에는 감히 오르지 못할 재료와 요리들이 마음껏 뛰논다. 그러나 온전히 디오니소스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요리라는 장르의 현실상 조리의 기본적 훌륭함에 구속된다. 피에르 가니에르의 요리는 객관적인 조리에 대한 가치평가의 체계를 긍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앞서 한참 논했던 미학의 시각에서 온당하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직 정찬이 완전히 개념적인 예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서, 이는 현재-삶과 미래-삶의 싸움이다. 현재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현재를 겪은 미래의 객의 생각에 변화마저 일으켜야 한다. 그것이 요리사-예술가의 목표이다.

혀가 길었다! 그 이야기는 식사를 진행하면서 이어나가보고자 한다.

방문 전

피에르 가니에르의 예약은 유선상, 온라인 어느 쪽을 통해서도 모두 가능하다. 별도의 예약금이 존재하지 않으며, 문자로 예약 확인을 받을 수 있다. 유선상 예약 전화가 한 번 있으며, 당일날 방문 확인 전화는 없다.

요리

글이 이따위로 길어질 것을 예상해서 이 날 메뉴는 가장 간소한 쁘띠 에스프리 피에르 가니에르를 선택했다. 참고로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의 점심 메뉴는 저녁과 다른데, (일부만을) 음미하다, 맛보다 (그래서 감정을 형성한다)라는 의미를 지닌 degustation을 위한 메뉴는 생각건대 테이스팅 메뉴Menu dégustation만이라고 생각한다. 점심 메뉴도 물론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만, 구분되있는 메뉴에서는 테이스팅 메뉴의 철학을 읽어야 한다. 엘불리 테제 22번. El menú degustación es la máxima expresión en la cocina de vanguardia: la estructura está viva y sujeta a cambios. Se apuesta por conceptos como los snacks, las tapas, los avant-postres, los morphings, etc. 외국말을 너무 많이 소개한 관계로 번역 생략.

Bollinger, Special Cuvée Brut

기억속에 글라스로는 두세 종류정도 주문이 가능했고 카트에는 모에 샹동도 있었다. 과거에는 돔 페리뇽의 그 해 기준 가장 최근 빈티지를 글라스로 리스트업하기도 했었는데 많이 풀이 죽은 모양새다.

그 이유는 몇 시간뒤에 알게 되었는데, 역시 뻔한 이유였다. 이날 내 테이블을 제외하고 단 한 팀만이 식전주 카트(Chariot? 마침 그 발음이 "샤리요"다. 편의상 그냥 카트로 칭함)를 곧바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카트는 이미 이 후퇴에 익숙한지 가장 빠른 경우는 단 한 번의 손사래만에 뒷걸음치기도 했다. 얼음이 다 녹아 물이 된 채로 홀을 배회해도 아무도 모르겠다! 멀쩡한 이스트향과 더 멀쩡한 과실미가 합쳐져 과일 파이나 비스킷과 같은 풍미를 연출하여 좋은 복잡성으로 식사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동시에 입맛을 한껏 다시는 식전주로 멀쩡히 기능한다.

"Feuilletés - welcome dish", "jam" soupe de tomate, gésiers confits, terrine de foie gras aux pistaches, beignets de fluers de courgettes, "Houmous" aux fromage, kumquat et vermouth

이 피에르 가니에르의 메뉴판에도 없는 전채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나머지를 제대로 이어나갈 수 있다. 일단 배경을 다 지우면, 보편적인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피에르 조리법의 다양함이다.
안내된 취식 순서대로, 잼, 콩피와 퓌레, 테린, 반죽만 이용한 튀김, 무스, 다시 퓌레. 피에르 가니에르의 아뮤즈는 이 레스토랑의 존재 의의를 우선하여 밝힌다. "서울의 재료-서울의 기억과 감각을 더해서"라고 하지만, 그 기반을 닦는 것은 프랑스의 조리법이라는 점이다. 앞선 논의가 살짝 떠오르시는가. 하나하나 그 조리법은 지극히 프랑스적이다. 단지 재미가 있다고 해서 튀김을 함부로 텐푸라로 내거나 하는 일은 앞으로도 잘 일어나지 않을 듯 하다.

그 다음으로, 그 위에 펼쳐지는 요리 세계를 보면 역시 피에르 가니에르가 "클래식" 프렌치 셰프가 아님을 보여준다. 정확하게는, 이 한 상에서 프랑스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가 무너진다. 하나하나 짚어나가보자.
처음 먹도록 안내받는 것은 토마토 잼(?) 위의 처빌과 크루통이다. 잼부터 시작이라는 설정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크루통을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나빠서가 아니고, 처음부터 어떻게 생각하면 물구나무를 서서 환영인사를 하는 것과 같은 유희라고 할까. 토마토, 처빌, 크루통 셋을 합치면 보통은 수프가 나오는데, 수프의 본체를 빼 영혼만 남겨놓은 모습이다. 가즈파초나 살모레호 등 스페인 계통의 수프부터 영국-미국의 토마토 스프까지 그림이 그려지는 가운데, 처빌이 프랑스를 가리킨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종종 처빌을 쓰지만, 처빌의 이명이 프렌치 파슬리가 아닌가. 장난기가 돋보인다.

gésiers confit avec purée de fèves

그 다음의 닭 근위(똥집) 콩피와 잠두 퓌레 또한 프랑스적인 맥락을 이어간다. 앞선 인사가 조금 낯설었다면 이번 인사는 친절하다. 프랑스의 대표적 조리법 중 하나인 콩피에 더불어 잠두가 나왔다. 보통 소금만으로 간단하게 간을 한 잠두콩 요리fève à la croque au sel는 식전주의 짝으로 나오곤 하는데, 조금 더 정성을 더해서 신선한 채소를 곁들여 샐러드로 하는게 낫다는 셰프도 있다. 어린 잠두는 입안에서 쉽게 부스러질 뿐 아니라 구수한 맛이 있어 빵 향기의 샴페인과 적절히 이어질 뿐 아니라 콩피와 이어져 시작부터 충분한 지방질로 식사의 기대를 한껏 높였다. 다만 재료 혹은 조리의 한계를 본다. 어차피 이정도 크기의 요리를 가정했다면 섬세하게 잘라내어 겸사겸사 근위의 탄력을 좀 죽였어야 한다. 잠두콩의 퓨레 또한 일반적인 잠두콩 요리가 가지는 폭발력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단지 콩 자체의 품질 문제로 보인다.

세 번째로 먹게되는 것은 병아리콩 무스에 치즈를 넣은 것이라는 소개를 듣는데, 세상에 병아리콩 갈아서 만들 요리는 후무스밖에 없다.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후무스가 아닌가. 여기서부터 가니에르적 손길이 서서히 드러난다. 후무스를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을 떠올려보라. 가니에르는 벌써 지중해를 건넜다. 이제는 사실 북아프리카 요리는 그냥 프랑스 요리의 일부로 부속되었다고까지 할 수 있다. 피눈물이 겹겹이 쌓인 역사의 증인들 덕분이다. 가니에르는 그 심부를 건드린다. 프랑스 요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후무스다. 그리고 가니에르는 이런 요리를 합니다.
여기까지에서 끝난다면 가니에르는 요리사가 아니라 정치인이다. 그 다음이 더욱 중요하다-우리는 아폴론을 잊으면 안된다. 서울의 후무스들의 못되먹은 질감을 경험해보았는가. 후무스가 아닌 프랑스의 무스로 소개하면서 콩이 일정하게 갈리지 않거나 애초에 지나치게 대충 빻아져 graininess를 연출한다면 무스로서는 망한 요리다. 그러나 후무스는 병아리콩의 바디는 온존한 채로 무스의 질감으로 연출된다. 아주 완벽하게 무스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해냈다는데 큰 의의를 둔다. 그보다도 사실 큰 지점은 짙은 치즈향이었다. 후무스의 풍미를 구성하는데 버릇처럼 깨 페이스트 내지 소스인 타히니를 쓰는데, 그 자리를 치즈로 채워 짙은 치즈향을 내는 식전 요리. 부르고뉴식 구제흐gougère bourguignonne를 연상케 한다. 이는 후무스도 아니요, 구제흐는 더욱 아니지만 후무스인 동시에 구제흐다. 두 가지의 풍미 모두 충분히 풍성하게 피어올라 후퇴하지도 않는다. 이토록 요리를 비튼다면,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방식은 높은 차원의 재미를 선사한다. 구제흐의 해체와 재구성, 그 사이에 밝혀진 레반트 문화의 아름다움.
재치와 도발이 돋보이는 가운데 그 도발은 성공했다. 후무스같지 않으면서 병아리콩이 혀를 메우고 치즈가 향을 메워 둘 사이를 두고 지중해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찌 이리 갈라져 살았나이까. 이렇게 아름다운데.

네 번째의 피스타치오와 푸아그라 테린은 다시 바다를 건너 프랑스로의 귀국이다. 견과류를 박은 테린은 안전에 기대는 설정이고, 설상가상으로 푸아그라는 쾌락을 선사하지 못한다. 피스타치오의 짙은 향이 전체를 지배하는 가운데 사실 잘 볶은 피스타치오에 비해 비교우위를 보여주지 못한다. 보통 이 작은 수저에 가공한 동물성 재료를 배치하는데, 푸아 그라는 그런 재료들의 상징적인 동물의 맛을 표현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다섯 번째는 주키니 꽃 튀김이다. 여기서 잠시, 앞선 요리들의 흐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전체는 감칠맛이라는 주제의식으로 또 다시 묶인다. 토마토부터 잠두콩, 치즈, 비록 성공적이지 않았으나 푸아그라까지 풍성한 감칠맛으로 전채로서 입맛을 다시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주키니 꽃 튀김은 그에서 빗나가 보인다. 주키니 꽃은 그렇게 풍성한 감칠맛을 지니지 않거늘.
컨셉트 자체는 높이 산다. 지중해에서 봄이 한창일 즈음부터 여름에 절정을 맞는 재료인 주키니 꽃은 계절감을 살리는 동시에, 지중해-이탈리아의 요리Fiori di zucca fritti와 프로방스 요리Beignet de fleur de courgette가 공유하는 지중해적 공감대를 떠올리게 한다. 지중해 요리에 대한 사랑이 이어지는 가운데, 애석하게도 튀김의 실행의 어설픔이 그 아름다움에 대한 의지를 부러뜨린다. 튀김의 시간부터 문제였는지, 휴지를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머금은 기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마지막 금귤과 베르무트. 어찌 생각하면 전채에서 이미 디저트가 존재하는 셈이다. 다만, 역시 실행이 뼈아프다. 식전주를 곁들이는 사람에게는 단맛의 역할이 다르게 다가오는 가운데 무엇보다 금귤이 신맛과 단맛 사이에서 방황한다. 베르무트까지 곁들였다면 시트러스의 다양한 얼굴들 중 한 쪽은 크게 드러나는게 맥락에 자연스러운데 갈피를 잡지 못한다. 금귤의 켜를 두 종류로 변주하고 베르무트까지 더해 꿈은 컸는데 맛은 그에 비해 납작하게 표현되어 큰 아쉬움을 남긴다.

전체적으로, 프랑스 북부부터 남부, 스페인을 거쳐 북아프리카까지 지중해까지 복잡하게 얽힌다. 이는 알랭 뒤카스와 같은 선상에서의 주제의식으로, 과거 뒤카스는 지중해 요리사전 "Grand Livre de Cuisine Méditerranée"를 편찬하면서 서문에서 주장하기를, 그간 프랑스 요리가 지중해의 일부분에만 머물고 있는데,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요소들이 많아 이러한 지역주의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또한 지중해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이 프랑스 요리가 가야할 길이라고 말한다. 스페인쪽 레시피를 떠올리게 하는 차가운 토마토부터 후무스까지를 아울러 이러한 범지중해적 요리의 가능성을 제안하면서도, 마지막 극동의 맥락을 지닌 금귤로 요리가 펼쳐지는 아시아에 대한 확장으로 나아간다. 이는 가니에르가 지중해에 대해 느낀 주제의식을 세계로 확장하고자 하는 그 큰 배포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개념은 썩 괜찮게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희의 지점들이 공격적이지 못한 것은 오히려 주방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나쁘다고만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행에서 엇나가는 부분들이 보이며, 이는 미학적 경험으로서 도취-그 복잡함에 대해서는 생략-로 나아가는데 발목을 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서울에서 완전히 잘못 이해되고 있는 전채 문화의 현실을 감안할 때, 전형적인 식전 요리만 해도 풍성한 선택지를 지니고 있다는 가능성, 또 적어도 전채는 한 입과 한 입 사이에 겹치는게 없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이해가 있는 구성은 높이 산다. 결론적으로 "괜찮은 개념과 안 괜찮은 실행"의 대립이다.

Domaine Pascal Jolivet, Sancerre Blanc "signature" 2019

이후 다루기보다는 지금 다루는게 낫겠다 싶어, 언젠가부터 자리잡은 가니에르의 와인 페어링을 이야기해보자. 먼저 밝히건대, 가니에르의 와인 페어링은 지난 여름 묶음으로 보여주었다면 이번에는 요리마다 잔술로 짝을 지어 선택의 재량을 넓혔다.

그보다도 페어링이 생긴 것 자체가 반가우면서 반대로 걱정이 되는데, 이게 그냥 생존의 몸부림일까-마진!-, 혹은 와인과 요리의 짝짓기를 통한 발전을 꾀하는 걸까?

가니에르는 격에 맞춰 이미 풍성한 잔술을 구비하고 있지만, 다행히도 짝짓기는 단지 잔술 와인들을 갖다붙혀 팔아먹는 식은 아니다. 무슨 의도가 있어도 있을까. 정말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소믈리에를 호출하지 않으려는 서비스 방식덕에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물어보지 않고 파악해보는 재미도 있을 듯 하다. 다만 지금 얘기하지는 말자. 이 와인은 이 요리의 짝이 아니다.

양파와 파프리카로 속을 채운 주키니, 허브 샐러드 Courgettes farcies à la Provençale et salade, 블랙커런트 겔과 샴페인 그라니테 gel de cassis granité champagne

첫 요리부터 기존에 제공되는 메뉴와는 다른 요리를 소개하게 된 점은 양해를 구한다. 개인적 사정이 있었다. 본래는 이 자리에 녹색 피망을 넣은 거위의 테린이 자리한다. 보통 서울에서 그렇듯이, 이렇게 기존에 준비된 요리에 구멍이 생길 경우 보충역으로 소집되는건 보통 그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완전한 채식 요리다. 이것도 딱 그렇다.
다행히도, 테린이 전형적인 만큼 이 요리도 전형적이다. 주키니 속을 파서 소를 채워 익히는 이 요리는 전형적인 프로방스식 요리인데, 속을 무엇을 채우냐에 따라서 육류 등 주요리로 나아갈 수도 있다. 캐러멜화한 양파가 전형적인 야채 요리로서 이 요리를 배치한다. 시계열의 앞부분이라서 샐러드 형식이라는 컨셉트는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빵가루를 올리는 등 이 요리의 기본적인 부분들이 잘 구현되어 이 잠깐만큼은 "클래식"이 떠올랐다. 그에 더해 살짝의 큐민과 같은 뉘앙스가 볶은 양파에 간문화적 요소를 더해 재미를 그리기도 한다. 그러나 풀잎들로 두르는 대처는 임기응변 수준에 그친다. 개인적 사정이 개입한 요리이므로 크게 따질 것은 없지만 명백히 가니에르적이지 않다. 다행히도 양파의 캐러멜화의 정도는 멀쩡했고 주키니도 썩 부드러웠다. 전형적인 방식대로 치즈를 더하지 않았음에도(이 또한 채식 요리라 그렇겠지) 양파의 단맛만으로 나름의 설득력을 갖춘 점은 높이 산다.

그 다음의 샴페인와 그라니테는 내가 요리를 음미하는 사이에 녹아버려 그라니타의 질감에 대해 논하기는 어려운데, 사실 보기만 해도 논할 필요도 없이 그냥 얼음 알갱이였는데 크기가 만족스럽게 작지 않았다.
다만 이 요리에서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는데, 샴페인과 카시스라는 조합을 보면 떠오르는 맛이 팔레트에서 어떻게 구현되느냐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린가? 애주가들은 이미 알 것이다. 키르 로열Kir Royal 아닌가? 과연 다시 분리된 이 멋진 식전 칵테일을 가니에르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앞서 말한 이유도 있지만, 겔과 그라니타 자체가 재빨리 섞이지 않고, 특히나 카시스 향이 충분히 피어오르지 않아 가니에르적이라 보기 어려웠다. 단지 실행에 붙잡혀 있을 뿐이다. 다만 샴페인 그라니타의 농도만큼만은 살아남는다. 짙은 발포주의 뉘앙스가 식사의 여흥만큼은 돋군다. 그러나 칵테일을 요리한다는 데 있어서는 재미가 크지 않다. 굳이굳이 끌고 들어오자면, 디오니소스적 실패다.

부드러운 달팽이 / 앤쵸비와 샐러리 Escargots crémeux / anchois céleri, 

주로 달콤한 요리를 떠올리게 하는 Crémeux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를 짠맛으로 변주한다. 멸치와 샐러리의 조합은 샐러드를 떠올리게 하는데, 일종의 샐러드 아닌 샐러드인 셈이다. 이번에는 에스카르고를 통해 지중해에서 벗어나 프랑스 북부로 향하는데, 달팽이를 이용한 샐러드가 맛의 설계의 바탕이라지만, 시각적으로 흰 크림 위의 달팽이, 그리고 푸른색이라고 하면 부르고뉴식 달팽이 요리Escargots à la Bourguignonne이 떠오른다. 마치 두 가지 요리를 합쳐놓은 것만 같다!

예상과는 달리, 염장 멸치가 제공하는 강렬한 바다의 풍미가 지배하지 않고 지방이 제공하는 무게감을 바탕으로 외려 전형적인 부르고뉴식 달팽이 맛이 나서 또 다시 놀랐다. 이 방향이 맞는지. 달팽이라는 재료를 설득해내는 것을 넘어 프랑스의 맥락 안에서 유희를 추구할 것 같은 설정인데 풍미의 연출에서는 한국에 빗대어 낯선 재료라는 맥락 속에서 전형적인 풍미만을 보인다. 단백질의 조리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을 바탕으로 전반적으로 혀 위에서 쾌락적이지만, 파인 다이닝이 지향해야 할 방향. 주관으로부터 나오는 쾌락은 모자라다.

랍스터 마티뇽과 과일 커리 Matignons de homards lièe d'un curry de fruits

이러한 조리의 의구심은 이 요리에서도 이어진다. 리에종Liaison으로 물성을 잡았다는 커리의 맛은 아름답다. 파인애플까지 더해진 커리는 흐르지만 맛이 묽지 않은데, 주로 코코넛이 바디를 형성하는 동남아 커리가 떠오르다가도 지방의 뉘앙스가 그쪽 방향이 아니고 프랑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짙은 단맛에 모자라지 않은 지방은 쾌락적이다. 그러나 갑각류의 조리는 객관적 완성도의 최소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냥 커리 요리였다면 나았을 지도 모른다. 바질이 전체를 감싸는 한 순간만큼은 황홀했는데, 계속 단백질이 도취로부터 현실로 이끌어내린다.

식전 빵 pains / pain au lait, 

그래, 이제는 이 빵에 대해서 우리가 해소할 때가 되었다. 일단 식전빵이 아닌데 레스토랑에서도 식전빵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긴 테이스팅 코스를 감안해서 객들은 빵에 손대기를 주저한다. 그럼에도 빵은 코스가 시작된 이후에도 치워지지 않는데, 대체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빵은 코스 요리의 매개체vehicle 역할을 톡톡히 한다. 기본적으로 지방과 단백질을 바탕으로 맛과 향의 쾌락을 풀어내고 있는 가운데 이 경험은 탄수화물의 존재로 더욱 극대화된다. 꽉찬 코스는 아예 탄수화물 요리를 호흡에 더하기도 하지만, 빵은 이러한 요리를 맛보는 기틀이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빵으로부터의 도피를 추구하고 있는 한국 문화권에서는 빵 설명도 이상해졌다. 몇 년 전부터 정해뒀는지 모르겠는 이탈리안 브레드, 호밀빵이라는 표현들이 아직도 쓰이고 있는데, Pain italien과 Pain de seigle인가? 실제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다. 일단 전자, 이탈리아 빵이 한 두 개인가. 우유를 섞은 이탈리안 브레드가 아니라 그냥 Pain au lait이라고 해야한다. 이탈리아의 맥락을 강조하고 싶다면 Panini al latte라고 하고 싶지만 레스토랑이 이탈리아어의 자리가 없으므로, 차라리 의미라도 쉽게 동하는 영문명 dinner roll이나 bun, 혹은 한국명 모닝빵은 어떨까. 물론 이러면 애석하게도 언중들이 디너빵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기에 적합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름보다는 나아 보인다. 호밀빵이라고 부르는 것도 호밀을 포함했을 뿐, 빵의 산도가 없음에도 발효가 된 것을 보면 그냥 Pain de Campagne가 아닌가.
아, 참고로 세 번째 빵은 살구와 무화과를 넣은 캐러멜 브레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큼직한 기공들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Pain de mie를 기반으로 개수한 것으로 추측한다. 단맛의 빵의 역할이 크지 않은 식사인데 그나마도 과거에 비해 하나 줄었다는 걸 생각하면 존재 자체에 의미가 있다. 물론 대부분 식사의 파트너는 호밀빵 쪽.

이름 타령은 잠깐 멈추고, 빵의 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각각 빵은 잘 만들어져 있는가? 그리고 코스의 흐름에서 역할을 수행하는가?
한국의 빵도 이제는 썩 기댈만한 곳들이 생겼다 말았다 해서, 기본적인 빵들은 자칭타칭 아티장으로 불려도 뭐 괜찮은가 하는 빵들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의 빵은 무난한 수준이다. 캄파뉴 껍질의 두께를 보라. 얼마나 든든한가. 시허연 빵의 지옥인 서울의 파인 다이닝 사이에서 빵껍질이 가장 두터운 축에 속한다. 껍질 풍미가 대단히 칭찬할 정도로 완벽하다고 생각도 들지 않지만 껍질이 두텁고 멀쩡한 온도에 구워나온데 큰 의미가 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그래 빵껍질에서 구운 향이 좀 나야지. 이에 반해 껍질을 형성하지 않는 번은 번 나름대로 부드러움의 미학을 지니고 있다. 무화과 살구 빵 쪽은 단맛때문에 유보한다.
다시 이름 타령으로 돌아와서, 그래서 이런 빵들의 설정이 요리와 어떻게 어울리는가? 사실 이 빵의 설정은 피에르 가니에르적인데-매우 타협한 결과물이다. 피에르 가니에르는 파리나 두바이에서도 영어 서비스 멘트로 프렌치랑 이탈리안 브레드라고 소개하게 하곤 했는데(지금도 그런지는 모른다), 그의 빵 접시에서는 맛의 관점에서는 밀가루와 발효를 주제로 하는 빵과 우유와 버터를 넣어 유지방이 개입하는 빵으로 풍미와 질감의 대조를 형성한다. 그와 동시에 굳이 가니에르가 저런 이름을 붙이는건 외국인에 대한 모욕보다는 다문화적, 범문화적 프랑스 요리를 추구하는 그의 요리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변명을 대신하고 싶다.
그러나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말로 옮기면 말이 너무 웃겨진다! 최소한 브레드 대신 빵이라고 해야 좀 괜찮을 것 같다. 매번 너무 힘들다.

미니 바게트 petit baguette

앞선 두 빵이 그러한 유희를 구성하고 나면 식사와 함께 빵은 바게트로 교체된다.
바게트를 썰어서 제공하지 않고 작게 만드는 것은 기술적 도전이기도 하므로 큰 불만이 없지만,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의 바게트는 역시 껍질이 얇다. 구운 온도와 시간은 좋고, 발효 상태는 기공이 크지 않고 속이 촘촘한 채로 남아있는 편이어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보통 한 개보다는 더 먹는데 구운 껍질 풍미로만 어찌저찌 식사에 즐겁게 곁들일 수준은 된다. 그러나 가니에르적 빵에 대한 꿈에는 닿지 않는다.
가니에르의 바게트는 보다시피 전세계 어딜 가도 꼬다리quignon를 꼬집어둔 모양이다. 끝부분의 껍질맛에 살짝 그을린 풍미가 더해지면서 그 맛의 복잡성이 더해진다. 물론 끝을 둥글게 빚은 바게트도 끝부분을 맛있게 구울 수 있고 애초에 가운데만 맛있어도 나는 괜찮다. 그러나 가니에르의 바게트는 가운데가 충분히 맛있지 않다. 두터운 껍질, 적당히 부풀어오른 속이 각각 충분한 풍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더 잘 할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크게 만들면 표면적 비중이 확 줄어드는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의 절묘함을 기술로 극복해낸다던지 하는 놀라움이 없다. 라스 베가스부터 도쿄, 파리까지 가니에르 레스토랑에서 이 작은 바게트는 거의 항상 나오므로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굳이 뭐 가보지 않더라도 네이버만 찾아보시라. 느낌이 오실 것이다. 특히 파리 본가와는 빵 색부터 다른데, 밀가루가 수입이 안되기도 하지만 기술적 한계도 있는게 아닌가.

로즈마리와 큐민을 더한 감자튀김, 사라왁 흑후추향 버터에 익힌 벨리노 스타일의 옥돔 Pomme frites "Hash Browns", dés d’Okdom juste effrayés dans un beurre mousseux au poivre de Sarawak façon Bélino

이 요리에를 먹는 내내 페어링을 전부 선택하지 않은걸 후회하면서 후회했다. 적어도 와인과 짝을 지어 메뉴를 만드는 이유를 알고 만든다. 풍미의 깊이가 와인을 찾도록 만든다. 앞선 쌍세흐가 원래 이 요리의 짝이었는데, 앞서 반 잔에 조금 더 비웠을 뿐인데 와인이 모자라서 정말 너무나 아쉬웠다. 바다 요리에 소비뇽 블랑의 선택이 지나치게 안전한데 머무르는 것 같기는 하지만 뻔한 쾌락부터 튼튼히 다져야 그 다음도 있다.

이 요리도 개인적인 사정을 담아서, 본래 파리식 감자Pommes Parisienne를 응용한 오징어 요리 대신 다른 감자 요리로 교체한데 양해를 구한다. 역시 감자라는 점에서, 그리고 가니쉬 역할이라는 점에서 맥락은 통한다.

개인적 사정에 의한 감자보다 사실 훨씬 중요한 쪽은 옥돔이다. 생선 요리에 흔히 어울릴만한 버터와 크림 바탕의 소스에 굵직한 주제로 사라왁 흑후추가 자리한다. 그에 더해 크넬로 올린 소스와 뼈를 우렸을 주, 그리고 팬에 익힌 생선이 모여 가니에르의 >>벨리노<<를 표현하고 있다.

우선 가니에르의 벨리노부터 시작하자. 이는 그의 창작물의 고유명사로, 반 년 전 글의 <대지의 향기>와 유사하게, 가니에르 카탈로그 요리에 해당한다. 원작은 노랑촉수Red Mullet, Rouget라는 생선을 이용하는데, 노랑촉수의 살은 따로 익혀내고 부이야베스에 토마토와 파프리카 등을 더한다. 이 요리에서도 그러한 루제 벨리노의 양식은 그대로 차용된다. 다만 필렛 째로 익히지 않았고, 부이야베스를 점도를 잡아 크넬으로 내는 과정에서 파프리카는 빠져나왔다. 파프리카 과육의 감각이 필요했던 것일까. 천천히 짚어보자.
우선 부이야베스 소스는 아주 훌륭했다. 짙은 감칠맛과 풍성한 지방을 바탕으로 전체를 한순간에 휘어잡는다. 다만 옥돔에서 부러진다. 수분이 많은 옥돔을 아슬아슬하게 조리해냈는데, 여름 옥돔의 모자란 지방은 루제의 역할을 해내는데 역부족이었다. 강렬하게 아름다운 소스에 비해 옥돔의 단맛은 연할 뿐이어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현지에 머무르는 제자들이 스승의 손발이 되려면 재료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데, 옥돔이 여름과 겨울 모두 어획되는 생선이다 보니 오해를 빚은걸까?

이렇게 되다보니 상황이 거꾸로 되고 만다. 조리의 탁월함의 우연들이 나중에는 영원회귀적 필연으로, 전자가 이 옥돔이라면 후자가 가니에르의 벨리노의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뒤만 있고 앞이 없다. 벨리노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 의도를 상상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 와중에 빛나는 것은 사라왁 후추였다. 그야말로 후추 자체가 주제가 될 수 있는데, 애석하게도 후추 소스라고 부를 정도로 소스에서 사라왁 후추 특유의 싱그러움과 강력한 매콤함이 소스에서는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운좋게 후추 알갱이를 이로 으깼을 때, 놀랄 만한 즐거움을 겪었다. 좋은 향신료의 힘을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직접 받는 재료로 알고있는데, 그 힘을 더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다면 무언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러기에는 요리가 이름값을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사족으로, 나는 아직도 왜 그가 이 생선요리에 "벨리노"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모른다. 이탈리아식으로 Bellin을 부르는 셈인데, 살아있는 사람의 생각을 추측하는게 틀릴 가능성이 높아서 부끄럽지만 생각건대 브르타뉴의 Olivier Bellin에 대한 샤라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보통 메밀로 널리 알려진 셰프지만 그의 상징적인 창작품은 "Kig Homardz"도 있는데, 본래 육상동물로만 만드는 브르타뉴 요리를 해산물 요리로 바꿔내며 파인 다이닝의 격식에 맞게 재탄생시킨 요리다. 그렇다면 바다에 비치는 얼굴이 바다를 주목하고 사랑해온 요리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전히 이탈리아식의 표기는 해명되지 않은 미스테리로 남지만... 토마토가 그 연결고리일까? 역시 사족이다.

Maison Joseph Faiveley, Ladoix, Côte de Beaune Rouge 2018

이 와인의 경우 본래 짝짓기로 맞춘 것이 아니고 잔술로 주문한 와인인데, 본래 흉선 요리에 짝짓기로 제공된다. 짝짓기로 연결된 와인은 생테스테프였는데, 보르도가 안전한 선택이지만 안창살이면 그래도 육향이 진한 편에 속하는 부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격이 좀 너무했다. 소매가를 알고있는 물건인데 알병값의 턱밑까지 쫓아온 잔 가격을 보니 아무리 파인 다이닝이지만 심술이 났다.

한우 안창살과 플로란틴 폴렌타, 허브향의 스노우피, 쥬드비프 주스. Pièce du boucher à la plaque, polenta florentine pois gourmands aux aromates, jus corsé 

메뉴에는 안창살로 표기하지만 사실 안심도 선택 가능한데, 이는 서울의 고기를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강제되는 소 속에서 그나마 주방의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안창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음은 물론이다.

먼저 와인과 짝짓기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내 선택이므로 구체적으로 논할 이익은 없으나, 기존의 짝짓기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꼬뜨 드 본과 짝을 맞추기에는 단백질의 동물적인 향이 생각보다 진하지 않아서, 소스를 담뿍 곁들이지 않고서는 짙은 과실미와 겨루기에 적합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 소믈리에의 짝짓기가 허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업보가 아닌가.

요리로 돌아와서, 먼저 가벼운 재치를 느낀다. 정육점의 고기라는 불어 표현은 자주 쓰이지는 않지만 Merlan, Surprise, Hampe, Onglet 등의 부위를 칭할때 쓰이는데, 고기의 무른tender 성질에 대한 기호로부터 나온 표현이다. 가니에르에서는 눈 앞에서 고기를 자르는 퍼포먼스를 통해 이러한 표현에 재미를 더한다. 그러나 이는 불어를 읽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에서 반 쪽짜리가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물론 두고보고 있으면 안심 쪽에 쏠리는 객의 선택을 보고있자니 애초에 신경쓰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지루하게 조리된 단백질과 조리 상태는 좋으나 역시 가니에르로부터는 거리가 있는 주 드 뵈프와는 달리, 매개체vehicle 역할의 폴렌타와 슈거 스냅 피로부터 쾌락으로의 길이 열린다. 콩깍지 안에 콩이 있는 슈거 스냅 피와 시금치의 소금간이 절묘하게 입맛을 돋군다. 특히 시금치에 이정도 간을 더할 용기가 있었다는 점을 높이 산다. 줄기째로 먹는 한국과 달리 잎만을 소테해서 냈는데, 시금치의 소테라는 점에서는 광동 요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다만 소테의 상태는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맛이 오를 정도로 열을 가한 것은 옳았으나 기름이 너무 많이 남았다. 폴렌타 또한 지방의 감각이 풍성했으므로 이는 잉여였다.

시금치는 폴렌타에서만큼은 활약한다. 플로랑틴이라는 표현이 핵심인데, 폴렌타가 이탈리아 요리라는 이유로 피렌체에서 이 말의 광명을 찾으려고 하면 헤매기 십상이다. 프랑스 요리에서의 플로랑틴이라고 하면 보통 시금치 잎이나 퓌레를 쓴 요리를 뜻한다. 비슷하게 이탈리아 이름을 달고 있는 에그 베네딕트와 에그 플로렌틴의 차이를 보면 쉽게 눈에 들어온다.
폴렌타는 전체적으로 하나로 엮인 듯이 끈끈하게 질감을 잡은 가운데 묵직한 치즈와 크림 등 유지방의 뉘앙스가 훌륭했다. 거기에 시금치의 맛을 더하니 마치 한식의 밥-나물-고기반찬의 그림이 떠오르면서, 그 바탕에는 프랑스의 맛이 깔리니 그야말로 재밌다.

소사태콘소메 계란찜과 성게알. «KyelanChim»de boeuf aux langues d’oursin

이러한 설정은 계란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플랑을 바탕으로 했다는 요리에 개인적으로 여러 기대를 했는데, 아쉽게도 다 달성되지는 않았다.

계란찜과 플랑 사이의 <불협화음>에 주목해보자. 계란찜은 무엇인가. 울퉁불퉁 솟아오른 한국식 계란찜의 질감. 향신야채들이 마지막에 올라가 형성하는 매콤함과 새우젓의 고유의 감칠맛과 짠맛 그리고 향. 이런 것들이 모두 아폴론적으로 아름답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존재한다.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의 계란찜은 이중 향신채만을 채택했다. 단맛을 뺀 프랑스식 커스터드로 주 드 뵈프가 앞선 접시와 이 반찬을 연결해서 한식상을 연상케 하는데, 앞선 요리처럼 프랑스를 통해 승화하지 않는다. 분량이 잘못된 성게는 안일한 가운데 날것에 가까운 파, 특히 의도가 다분한 파뿌리가 매콤한 자극을 전달할 때는 한식과 프랑스식의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이것이 전적으로 의도라면 "피카소"라는 스승의 별명에 내가 박수를 보내겠다. 그러나 솔직히 반쯤은 의도가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다. 그런 방식은 여기보다는「무가리츠」에 어울리는데, 물론 무가리츠는 이런 표현을 첨단 기술을 빌려 표현하기를 즐기는 데서 파뿌리와는 차이를 지니지만, 이런 방향성이 지속된다면 그 의도성을 인정하겠다. 파뿌리가 형성하는 불협화음은 한식이라는 이미지 형성에 기여했음은 물론, 우리 식탁에 대한 문제제기였다고. 그러나 그 경향성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쓸데없는 고퀄리티" 한국식 계란찜이다.

여기까지가 식사 끝. 이후로는 디저트와 미냐디스가 있다. 치즈가 없는건 그러려니 해야 한다. 총평은 후술.

La Dessert Pierre Gagnaire: Crème brûlée au gingembre, glace au whisky, popcorn caramélisé
La Dessert Pierre Gagnaire: Baba exotiques au rhum Zacapa 
La Dessert Pierre Gagnaire: "Verrine" Glace au caramel, pain de épice, cerise au kirsch, royal icing.

크렘 브륄레-바바 오 럼-베린의 3연타로 이어지는 고전적 디저트들은 전형적인 그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가니에르가 디저트에서는 고전적인 프랑스풍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과연 그때문이기만 할까? 글쎄.

전체적으로 디저트들은 모두 짙은 단맛과 풍미로 앞선 식사의 여운을 끊어내는데는 완전히 성공한다. 건강한 디저트의 나라에서 디저트가 아주 건강하지 않은 맛이 난다.

첫째의 크렘 브륄레와 아이스크림은, 위스키로부터는 캐러멜이나 바닐라, 피트나 알코올 등 증류주의 선택 이유중 여느 것도 크게 다가오는게 없는 가운데 정직하게 만든 크렘 브륄레만이 빛났다. 사실 압도하는 바닐라와 캐러멜향을 감안하면 복잡성이 높게 구현된 디저트라고 평가할 수 없지만 정찬의 후식으로서 기능이 작동하는데 의의를 둔다.

둘째로 높은 신맛을 지닌 바바 오 럼은 과거 서울에 다른 셰프들이 내린 진단과 유사해서 놀랐다. 물론 단순히 여름이라서 이렇게 했을 수도 있는데, 이 블로그에도 이미 바바에 대한 글이 두 개가 있고 이게 세 개 째인데 전부 바바 오 럼에 과일을 더한다. 럼 대접이 시궁창이라서 그렇다. 다행히도 최근 정식 수입되기 시작한 론 자카파를 쓴다니 기대가 되면서도 원가가 걱정되었는데, 너무 걱정해준건지 반죽이 한껏 럼을 빨아들여 적신 느낌은 들지 않았다. 촉촉하게 잘 빚은 도우이지만 재수없는 론 자카파 23의 가격 때문일까? 럼의 향기는 진하지 않았다. 물론 23이라는 숫자로 말장난을 하는 론 자카파의 향이 꼭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실상 주제는 럼이 아닌 망고와 패션프루트 퓨레, 그리고 파인애플 콤포트 쪽에 기운다. 이 조합의 시너지는 이미 다뤘으므로 크게 논하지 않겠다. 럼에 있어서는 특히나 소식이 늦는 서울에서 할 수 있는 바바는 보통 이런 형태라는 점을 새삼스래 확인했다.

베린은 기초 이론-매개체의 개입, 숟가락으로 떠먹는 물성-은 훌륭히 수료한 듯 보이나 역시 고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친다.

Château Suduiraut, Sauterene "Lions de Suduiraut" 2013

짝짓기로 드라피에가 정해져 있는데 굳이 항상 구비된 스위트 와인을 두고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와인 짝짓기는 거의 따르지 않은 셈이 되어버리는데, 오랜 시간동안 비공식적으로 짝짓기의 역할을 해온 잔술들도 제나름 역할을 한다.

Mignadises. "흑임자" île flottante(Floating Island), gel violette, financier, purée de poire

솔직히 이곳의 커피와 차에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 다만 다시 전채 접시를 사용하기 시작한 미냐디스에는 은근한 기대가 있다.
미냐디스인만큼 전체를 다룰 생각은 전혀 없고, 첫째 플로팅 아일랜드만 잠깐 짚고 넘어가자. 솔직히 흑임자와 인절미의 유행은 두가지에 대해서 모욕적일 만큼 다양성의 세계는 커녕 엉망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이 흑임자는 그 갈래에서 벗어나 있어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일단 적어도 물성과 형태에서 다양성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가운데 흑임자 풍미가 꽤 설득력이 있다. 전체 식기가 수입산인 가운데 유일하게 신토불이인 숟가락으로 퍼먹다보면 전채에서 보여주었던 "도로 한국으로" 금귤이 떠오른다. 작은 컵 속에서 취할만한 즐거움이 있다.


총평

한 번 총평을 길게 작성하였으므로 더 할 말이 많지는 않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은 여전히 피에르 가니에르의 면모가 돋보이는 요리들을 선보이고 있다. 다만 그것을 접시 위에 현출하는 조리의 상태에 있어 하자는 경미한 수준이라고 볼 수 없다. 맥락과 배경, 궁극적으로 문화에 대해 무관심한 서울에서 무언가 시작할 수 있으려면 일단 조리부터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간문화적 측면의 요리, 합일의 가능성과 같은 기존의 요소들에 더해 만일 그것이 의도라면 <<칸딘스키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맛의 설계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계란찜이 등장하는 점은 추락이건 승천이건 추후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어느 쪽으로든 주방이 어느 순간 기울어버릴지 모른다.
쁘띠 에스프리 메뉴였기에 다루지 않았지만 에스프리에서는 캐리비언 요리를 바탕으로 한 요리가 추가되는데, 이를 더하면 가히 그의 요리 세계는 마치 세계일주와도 같은 모습으로 드러난다. 금귤-커리-계란찜-흑임자로 이어지는 아시아 요리의 측면이 꾸준히 제시되는 등 서울에서 현대 프랑스 요리의 담론을 재치있게 제시하는 점, 지방과 소금, 설탕 등 기본적인 조미에 있어 사람의 참을성을 시험하지 않는 점, 프랑스의 조리기술에 더해 프랑스 요리가 가지고 있는 맛의 훌륭함을 바탕으로 삼는 점 등을 전체적으로 고려했을 때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은 쾌락적인 파인 다이닝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 쾌락의 크기는 피에르 가니에르가 담아낼 수 있는 크기에 비해 모자라 보인다. 또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조리 뿐 아니라 요리에서도 지루함의 단서들이 포착된다. 과연 이 두 가지가 서울에서 특히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쉽게 손볼 수 있을 지점일지는 의문이지만 그 이름을 어깨에 건 이상 손을 보기는 해야한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쾌락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요리를 내고, 또 피에르 가니에르의 팬보이라면 찾아갈 이유들도 있다. 어쨌거나 서울에서 현대 요리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 가장 가까운 곳들 중 하나이며, 쾌락의 경험을 무대로 하고 있어 (우연히) 찾는다면 좋을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라고 할 수 있다.

서비스: 경험에서 우러나는 여유로움이 밴 서비스. 그러나 서비스에 있어 와인에 대한 열정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뼈아프다. 단지 따르는 것만이 서비스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FOH의 요리에 대한 기본 사항의 숙지 정도가 불균형한 점은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이 유지해왔던 서비스의 하한선을 돌파하려고 하는 듯 하다. 피에르 가니에르의 방한이 없어진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인지?

가격: 테이스팅 메뉴 17만원부터 34만원까지. 와인 짝짓기를 포함할 경우 인당 KRW 300000~500000의 예산을 추천.

음료: 여전히 보르도 그랑 크뤼를 주문할 생각이 있다면 무한한 선택지가 존재하지만 남부, 남서부, 부르고뉴로 눈을 돌리게 된다. 잔으로 제공되는 와인은 통상 종류별로 3가지인데, 단지 가격 차이가 아닌 역할군이 적절하게 선별되어 있어 높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