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제리아 달 포르노 - 절망의 카노토

본지의 방침상 일상에 포함시키기 어려운 경우, 즉 줄서기가 강제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있지만 여느 날의 「달 포르노」는 한산했다. 식사를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줄서는 이 없이 모두가 곧바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제 이야기가 가능하겠다는 마음이 들어 졸고를 게시한다.

이번 글에서는 먼저 글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독자들이 원하는 바는 통상, 그 식당은 어떠한가? 방문할 만한가?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여 만족을 얻을 수 있는가?로 수렴한다. 본인은 그러한 독자들에게 다시 한 겹의 질문을 더하고자 한다.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음식은 무엇인가? 어떠해야 하는가? 맛있는 음식, 행복한 한 끼니를 원한다면 그것의 구체적인 양상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번 글에서는 피자라는 소주제에 관하여 이 의문을 해소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독자들의 호기심, 흥미, 혹은 의혹 등을 해소하기 위해 "카노토" 피자라는 주제에 대한 해명을 우선하고자 한다. 카노토Canotto란 흔히 말하는 카누Canoe와 동일한 어원을 가진 명사이나 카누보다는 주로 고무보트를 칭하기 위해 쓰인다. 고무보트는 물에 뜨기 위해 변두리가 공기로 가득 차 부풀어오른 모양새를 취하고 있어, 피자가 마치 그것을 닮았다고 하여 피자 카노토Pizza a Canotto라 부른다. 이것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 주인공은 현재 자신의 이름으로 피제리아를 경영하고 있는 카를로 사마르꼬라 하겠다. 91년생의 젊은 피자이올로는 가족이 경영하는 나폴리 중앙역 근처의 라 칸티나 데이 밀레에서 피자 만들기를 배워, 그곳의 이름으로 이탈리아의 음식 미디어인 리스토라지오네 이탈리아나가 개최하는 피자 마스터셰프(현재는 마스터 피자 챔피언,MPC) 대회를 우승하여 라 칸티나의 피자이올로인 그의 삼촌보다 유명한 인물로 떠오른다. 그곳에서 그가 밀어붙인 피자 스타일이 바로 이 카노토의 뿌리가 된다.

단순히 모양이 특이해서 인기를 얻은 것은 절대 아니므로, 카노토라는 형식이 기존의 전형적인 나폴리 피자(pizza tradizionale) 혹은 정석으로 여겨지는 나폴리 피자(vera pizza napoletano)와의 비교를 통해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가장 먼저 밟히는 것은 작은 직경, 높은 수분율이다. VPN 피자 도우보다 작고 가벼운(약 30g~50g 차이) 도우는 VPN 규정의 수분율보다도 한층 높은 수분율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반죽은 더욱 다루기 힘들어지고 쉽게 흐뜨러질 수 있다. 그 예시로 사마르꼬의 반죽은 수분율이 80%에 이른다. 하지만 이것은 목적이 아닌 수단에 불과하여, 이러한 반죽을 사용히는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높은 수분율의 반죽은 통상의 방식과는 다른 성형과정을 거치는데, 발효 과정에서 발생한 가스를 보존한다는 느낌으로 끝자락에 모아내기 위함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피자는 빵의 끝부분(Cornicione)이 과잉의 가스로 인하여 크게 부풀어오른다. 생각건대, 이러한 과정의 이유는 피자의 본질인 빵이라는 성질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흔히 카노토 스타일에는 비가나 풀리쉬 등 사전 발효를 개입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를 통해 가스를 확보함은 물론 발효 과정에서 얻는 빵맛을 극대화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사마르꼬 본인이 코르니쵸네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맥락과도 일맥상통하지 않나. 피자는 오늘날 장작을 떼는 전통적 열원을 가진 오븐에서 구워지는 거의 유일한 빵으로 그러한 빵이 가진 재미를 온전히 가지고 있는 독특한 빵으로서 재발견되고 있다. 근래 발매된 「모더니스트 피자」 역시 큰 틀에서 제빵의 연속이며, 카노토 역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피자란 궁극적으로 빵을 맛있게 먹기 위한 레시피라는 점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방식의 피자를 한다는 것은 빵맛이 좋은 피자, 빵맛을 무시하지 않는 피자를 하겠다는 주장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사마르꼬의 아 카노토는 완전히 사마르꼬가 계시한 새로운 무언가라고만은 할 수 없다. 부촌인 보메로의 피자는 원래도 AVPN 규격보다 작고, 잘 부풀어오른 반죽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빈자의 음식이었던 피자가 2차대전 이후 그를 향유하는 계급의 차이에 따라 변화한 것이다(이에 비해 빈민가쪽 피자는 최대한 반죽을 넓게 펴는 방식이 유행한다). 굳이 카노토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유사한 이념을 공유하고 있는 피자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셈이다. 따라서 VPN만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자들 이외에도 아 카노토라는 명명 자체를 작위적인 것으로 보아 그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행은 빵으로서의 피자의 정체성에 대한 발견으로는 이어지지 않아, 사마르꼬를 위시한 젊은 피자이올로들은 적절한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피자 아 카노토는 특히 발효로부터 발생하는 맛을 강조하기 위한 조리의 문법이며, 따라서 그것을 얼마나 잘 보여주느냐가 평가의 잣대가 된다. 플랫브레드를 넘어 적절하게 부풀어 오르고, 표면은 마이야르 반응을 통해 맛을 당겨오고 수분은 적절히 날아가 끈적하지 않고 가벼워 씹는 동시에 그 향이 쉽게 입안을 가득 매워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 촉감에 관하여서는 Puff, Fluffy, Airy라는 표현이 좋은 카노토 피자에 걸맞는 표현으로 통한다. Dense, Heavy와 같은 표현이 떠오른다면 실패로 기울 공산이 크다.

그러한 시각에서, 달 포르노에서 가장 전형적인 피자 두 종류를 선택했다. 첫째는 상단의 피자 마리나라, 둘째는 모르타델라와 피스타치오를 이용한 흰 피자를 골랐다. 가장 구식이자, 자연스러운 형태로 완성된 피자 마리나라와 가장 현대적인 유행의 모르타델라 에 피스타치오라는 양극단의 피자를 모두 메뉴에 올렸다는 점이 나의 호기심을 당겼다. 대표 메뉴라고 되어있는 소시지로 뒤덮인 피자를 감히 먹고싶지 않은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첫 피자인 마리나라의 완성도는 좋지 않았다. 좋게 말해도 좋다고 하기 어려웠는데 피자 도우의 질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소스 바르기와 굽기를 통해 피자가 전체가 하나로 묶이지 않고 여전히 재료의 병렬로 남았다는 인상이었다. 때로는 적당히 가열되지 못한 소스의 신맛이 튀고, 때로는 소스의 부재가 치즈의 존재를 통해 드러난다. 피자 마리나라가 선사하는 편안함, 올리브와 토마토, 남국의 메마른 대지에서 자라는 풀향기에 빠져드는 행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둘째의 모르타델라와 피스타치오는 피자 비앙카가 가진 매력, 풍성한 지방과 어우러지는 짠맛의 가락이 잡혀있어 마리나라의 경우와 같이 하나의 피자가 아니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금과 지방이 선사하는 원초적인 포만감은 거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국내의 두 핵심 재료의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주방은 적절한 대처를 보여주지 못했다. 본래 견과류는 가공육과 환상의 짝으로 특유의 향으로 맛을 당겨오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데, 피스타치오가 놀랍게도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시모네 파도안을 위시로한 북부의 피자 현대화의 움직임의 핵심은 틀에 박힌 레시피가 아닌 맛에 대한 자유로운 추구를 핵심으로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이 어딘가에서 표본으로 보여줄만한 레시피라고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나폴리 바깥이라는 대주제, 시칠리와 볼로냐를 주제로 잡는 요리인데 단지 고기로 덮인 피자로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 반드시 IGP 재료를 사용하라, 브론테가 아니면 이런 피자를 하지 말라 따위의 요구가 아니라, 이곳은 한국이고 이러한 한계가 있다면 무언가 현지 사정에 맞는 조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다. 팔자가 좋아 재료 수급이 원활한 본토에서도 「Pepe in Grani」같은 곳은 치즈를 리코타로 교체하고 레몬 제스트를 더해 신맛을 덮어 붉은 피자와 흰 피자 사이의 간극을 해체하고자 도전하며, 카노토 도우의 왕좌에 오른 Francesco Martucci나 Diego Vitagliano 역시 이 메뉴를 내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다. 좋은 재료는 창작을 위한 좋은 환경이 될 수는 있어도 중요한 것은 그 창작이다. 이탈리아에서도 씬의 리더격인 이들이라고 하여 모든 요소가 다 놀랍고 대단하기만 한것도 아니다. 마르투찌의 피자는 모르타델라를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확실히 새롭지만, 디에고의 피자 "피스타델라"는 피스타치오를 페스토로 쳐서 마지막에 뿌리는 방식으로 간단한 변주를 거칠 뿐이다. 도우가 글루텐 프리면서 카노토라는 점이 매우 특별할 뿐. 후자는 따라하기 어렵고 따라할 필요도 없지만, 전자의 경우는 고민은 해볼만하지 않은가? 피스타치오가 풍성한 곳에서도 어떻게 해야 레시피를 더 낫게 만들까 고민과 경쟁을 거듭하는데, 생 피스타치오의 질이 결코 좋을 수 없는 땅에서는 방법이라도 고민해보아야 하는게 요리사의 책무가 아닐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바로 요리사라는 한 사람의 삶을 보여주지 않을까? 이곳의 피자는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외국의 유행이 맥락 없이 허공에 떠있을 뿐이다.

이야기의 핵이 될 카노토 방식의 도우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는데 그 심정을 이제서야 말하자면 놀라웠다. 그야말로 놀람이라는 감정이 가장 먼저였고, 그 다음으로는 답답함이었는데 외형은 정직하게 카노토가 추구하는 방향을 노리고 있는 듯 보이나 내용이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풀어오른 내면은 거의 한결같이 수분이 충분히 날아가지 못하고 기공 역시 모자랐다. 충분히 익었을 때 진가가 나오는 도우가 그렇지 못하니 무겁게 주저앉아, 공포의 표현인 '쫄깃함'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빵에게는 수여되서는 안되는 표현이 주어지고 만다. 놀란 나머지 매 조각마다 양 귀퉁이를 살펴 기공의 존재를 찾았지만 매번 치밀하게 발달한 글루텐 조직과 마주하고 말았다. 물론 제빵에서도 그렇듯이, 맛없는 빵에 기공만 예쁘게 만드는 방법 역시 있으므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이곳의 피자는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왜 아 카노토인가? 왜 피자인가? 그 질문에 대해 이곳의 음식은 어떠한 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피자 아 카노토를 만드는 피자이올로들의 제품들의 사진 일부를 첨부한다.

https://www.lucianopignataro.it/a/diego-vitagliano-bagnoli/144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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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zzeria Carlo Sammarco 2.0(@carlosammarco2.0)님의 공유 게시물

다시 강조하지만 빵의 기공은 과정일 뿐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그러나 왜 빵에 이러한 요소들이 필요한가를 좇는 과정이 있어야 좋은 빵에 다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