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페셰 미뇽 - 진짜 소르베
KRW 6000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현금으로 지불했기에 정확한 기록을 찾기 어려운데, 하여간 한 컵의, 그것도 한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으로서는 엄청난 비용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서울의 아이스크림 가격은 전반적으로 엉망진창이다. 좋은 우유가 없는 상황에서, 파인트 한 통의 정가는 KRW 10000을 초과한지 오래다. 묶어서 구매하는 등 꼼수를 써보지만 바다 건너 대륙에서 $2정도로 후려쳐지는 물건들이 만자리를 넘보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나마 이 안에는 철저한 위계질서가 있다. 정가는 비슷하게 매겨도 비수기일 때나 창고형 매장에 진열될 때면 각자 적절한 할인폭을 갖게 된다.
일상적 아이스크림의 외측한계인 베스킨 라빈스 바깥은 어떤가. 비례라는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넘어 거의 복불복이다.
많은 아이스크림 가게들이 제각기 아이스크림을 내세우지만 자신들의 아이스크림의 역할을 정해놓았다고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선상의 소비자들이 원하는 어떤 모습으로 빚어져갈 뿐이다. 그저 베스킨 라빈스와 파인트의 대체재부터 소셜 미디어상의 농담거리까지 그 소비의 형태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나는 이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다. 생각건대 컵 단위로 팔리는 아이스크림은 오후의 짧은 여유가 되는게 바람직하다. 철저한 생활인, 즉 아이스크림의 기술이니 혹은 주방 사람의 인생 철학이니에 무관심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준에서 그렇다. 커피나 차와 같이 시간이 길게 할애될 필요도 없고, 지금은 벤 앤 제리스만이 수급하고 있는 일회용 생분해 숟가락 이상으로 격식을 차릴 필요도 없다. 빠르게, 하지만 진하게 풍미와 단맛을 전달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마스크 착용덕에 길에서 취식은 어렵지만, 이렇게 무더운 날이면 나중에 손을 다시 닦을 각오를 하고 취식보행하기에도 좋고, "인증샷" 한 장 남기고 떠나는데 오 분이면 넉넉하다. 삼삼오오 나와 점심식사를 한 뒤 본업으로 돌아가는 사이 식사의 여운을 지우기에 이만큼 빠르고 강한 간식이 또 있겠는가.
이에 반해, 누군가는 일상이 아닌 도심의 "목적지로서의 아이스크림 가게"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소비되는 곳들이 더러 있는데, 목적지 방문의 경험이라는게 단순히 위치 이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 별로 설득되지는 않는다. 단지 서울이라는 도시가 생각보다 꽤 클 뿐이다. 누군가의 집 앞도 반대편의 사람에게는 여행지가 될 정도니까. 그렇지만 과연 그런 아이스크림이라고 해서, 위의 기준에 빗대어 만족스럽지 못해도 좋을 이유가 있을까? 서울에서 만난 아이스크림들은-다름이 아니라 틀림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매우 잦았다.
"르 페셰 미뇽"의 아이스크림, 정확히는 소르베는 여러가지 외적 요소들을 고려했을 때, 완전한 일상품은 아니었다. 일단 건물 2층에서 먹는 아이스크림이라는 설정부터 이단적이다. 일상일 리가 없다.
아마도 또 파코젯이겠거니, 언제나 반은 아마추어의 사랑으로, 반은 취재에 대한 의무감으로 또 낯선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대부분이 탈락한다. 가타부타 할 이유도 없는게 이렇게 서울에 아이스크림 가게라는게 생기는 과정을 생각하면 논할 실익이 없다. 이제 제과학원 갓 졸업한 디저트 가게들의 유행이 불과 몇 년 전인가. 그 이후에나 무언가 궁시렁거릴 일이다.
그러나 르 페셰 미뇽의 이번 체리 소르베는 달랐다. 체리를 맛으로 낸 차가운 디저트라는 점에서, 이 경우보다도 훌륭했다. 체리의 진한 향과 그만큼 진한 단맛, 그리고 놀랍게도 예측과 달리 전혀 서걱거리지 않는 소르베는 비록 아이스크림은 아니었지만 케이크 하나와 곁들이기에는 꼭 맞았다.
쉽게 판단하건대 그 비결은 먼 곳이 아닌 바로 제과의 주방이라는 점에서 왔다. 날 것의 체리나 동결건조품이 아니라, 깡통 제품이나 알코올에 담근 가공품에서 오는 풍미만이 이렇게 쉽게 짙고 강렬한 그림을 그린다. 다만 후자는 아닌 듯 한게 키르슈바서의 복잡한 풍미까지는 없는, 올곧은 체리 일변도였다.
에스코피에의 체리 쥬빌레의 레시피가 떠오르면서도, 바닐라와 플람베 등으로 한껏 무거워지는 체리 쥬빌레와 달리 지방이 없어 가볍지만 충분히 달다. 무엇보다도 간만에 서걱거림이라는 요소를 아예 없앤 소르베를 만나니 기쁘기 그지없다. 우유가 얼개를 잡는 아이스크림과는 달리 조금이라도 녹은 이후에는 영 그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아서 두 개를 먹은 뒤에는 조금 후회했지만, 크림을 모사하는 것을 포기하고 정직하게 펙틴의 끈적임만을 간직한 소르베는 간만에 내 마음을 적셨다. 그래, 뻔한 체리맛이면 어떤가. 스타벅스의 여러 프라푸치노들이 해내지 못하는, 차갑고 달면서 부드러움이라는 목적지에 한 층 더 근접했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형태의 디저트를 깔보지만, 이 도시에서 가장 절실한건 이렇게 놀라움을 주제로 하지 않는 음식이다. 흰 치즈나 열대 과일의 풍미가 있는 케이크에 커피까지 곁들이고 있다면, 소르베의 풍미가 복잡하지 않다는건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진정 2층에서 케이크를 파는 가게에 어울리는 맛이었다.
물론, 가격을 감안하면, 그 자체로 나오는 것을 넘어서 가공의 재료로 쓰인다거나 하는 경우를 상정함이 바람직하겠다. 프랑스 제과사들이 흔히 하는 일들 중 하나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