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ña Santa Rita, Triple C, Maipo 2018
결국 보르도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국의 마트에는 보르도보다 신대륙 와인이 훨씬 큰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만, 결국 그들 역시 보르도의 그늘에 있다. 레드 와인이라는 식문화는 큰 틀에서 이미 보르도 바깥을 상상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버렸다.
물론 피노 누아를 선봉으로 한 진짜 고급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냥 "와인"이라고 통칭되는 속에서 그런 분류는 무의미하다. 어젯적에도 와인과는 무관한 장소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지나치게 큰 건넛 테이블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무려 와인으로 주량을 세고 있었다. 와인을 몇 병 시키고, 몇 병 마시면 취하고.
그러는 속에서 와인은 보르도의 이체자가 된다. 양조의 환경, 키워야 할 품종부터 지향해야 할 맛까지 이미 보르도 블렌드라는 어떤 그림이 이 음료를 마시는 행위 자체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다를 수 있다. 당장 이 마이포 밸리의 와인 하면 떠오르는 것은 강렬한 채소 뉘앙스, 이른바 피망향이다. 그러나 이 피망이 기억에 남는 이유 역시? 결국 보르도 블렌드를 디폴트로 생각하는 습관이 묻어난다. 그것과 다른 점을 마이포의 특징이라고 기억하고 만다.
물론 보르도는 그 자체로 이제는 너무나 완벽한 문법이다. 바리끄에서 얻어내는 담배향, 다크 초콜릿향은 사람의 식욕을 자극하는데 더할 나위 없으며 액체의 점도는 맛을 느끼기에 최적화된 수준으로 뭉쳐있다. 마치 좋은 와인으로 가는 길에 할머니의 비법을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처럼, 산타 리타의 와인은 보르도의 좋음을 충족시키는 가운데, 몇몇 특징의 주장이 다소 강하다는 점만이 통상의 보르도와 구별짓는 기억을 만든다.
결국 보르도와 소고기, 보르도와 양고기, 보르도와.. 만이 반복되는 일상이다. 르네 레드제피가 레스토랑에서 일부러 보르도를 두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취지에 강하게 수긍을 했었는데 결국 눈을 떠보면 그냥 또 다른 보르도에 도착해있다. 와인에 필요한 상상력이란 무엇일까. 좋은 술의 맛은 또 어떤게 가능할까. 피노 누아? 글쎄.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