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령 - 메밀 식사
한동안 시끄러웠고 빠르게 조용해진 서령은 내게 있어서는 단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줄 서지 않는 장원막국수. 서령을 이끌고 있는 정종문, 이경희 부부는 홍천 장원막국수의 실무가 출신으로 강화도에서도 장원막국수 간판을 썼던 것으로 안다. 물론 이제는 평양냉면을 주력으로 하는 가게가 되었지만, 장원막국수 계열의 혈통을 상징하는 들기름 막국수를 메뉴에 두고 있다.
만테까레가 없는 오일 파스타 같은 느낌의 들기름 막국수는 김을 조미한 기름-깨를 씹을 때의 기름-그리고 면을 둘러싼 기름으로 층층이 쌓인 기름만으로 맛보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한때 고기리의 장사진의 이유를 느끼게 하는데, 기름의 만족도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면이 가진 집중도다.
서령은 경우에 따라 중국산을 쓰는 날이 있고 내몽골산을 쓰는 날이 있는데, 다르게 말하면 국산을 쓰는 날은 (지금까지 본 경우로는) 없다는 뜻이다. 물론 메밀의 원산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대표적으로 우래옥) 다른 플레이어들과 특별히 다른지는 리서치를 해야 알겠지만, 일단 원산지가 바뀐다는 점이 눈에 띄고 그 출처가 저 두 곳이라는 것이 더욱 눈에 띈다. 이는 사실 좋은 국산 메밀에 대한 담론을 생각해보면 메밀은 늦은 가을이 되어 쌀쌀한 날씨를 맞아야 맛도 질감도 집중도 있게 뽑히는 만큼 사시사철 이용하기로는 고원지대의 메밀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결론이다. 실제로 서령의 순면은 그러한 이해를 탁월하게 드러낸다.
다만 면의 아름다움과 별개로 대표 메뉴가 되는 서령 순면(평양냉면)의 경우, 국물의 소고기 느낌이 썩 진한 편으로 전형적인 요즘 시대의, 서울식 평양냉면을 추구한다. 남북 화해 무드 당시 잠시 밀려왔던 '가난한 원형'(이용재 평론가의 표현을 빌어)과 달리, 서울의 평양냉면은 고추가루를 뿌리거나 하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향신을 배제하고 차갑지만 고기 느낌이 강한 모순의 결과물을 목표로 한다. 왜 모순인가? 콩소메같은 것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거르고 졸이는 과정 없이 물과 불에 의지해 만들기 때문에 집중도의 한계가 있는 형식을 감각이 둔해지는 차가운 온도로 즐기니 이중고를 겪는다. 그럼에도 어떤 주방에서는 성공적인 결과를 내놓으며, 서령의 그것 또한 충분히 포함할 수 있다. 고명? 질식해버린 사태 따위를 굳이 썰어 올리지 않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냉면집의 부가가치를 늘려주는 역할은 이북의 정서를 담은 만두, 보통 제육과 수육으로 부르는 두 종류의 삶은 고기 정도가 다하고 있다가 근래에는 어복쟁반이니 하는 외식사업가들의 아이템도 등장했다가 또 조용히 사그라들기도 하였다. 냉면 자체의 '퀀텀 점프'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북 출신의 서울 요리, 한 그릇 요리로는 드물게 계절을 제패한 요리로(삼계탕 따위는 적수가 못 된다) 한국 요리 중에서는 대중적인 미식의 대상으로 최고 히트작이라고 할 수 있는 냉면의 다음 장면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