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텐더 - 테크노에모시오날

오늘날 일본식 바텐딩의 손기술은 더 이상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다. 사보이의 에릭 로린츠를 비롯하여 무수한 이들에게 영감을 준 기술들의 세부사항은 거의 전부가 알려져있고, 그 원리나 실제 효용 등에 대해서도 선행 연구들을 검토해볼 수 있을만큼 이제는 우리는 일본식 바텐딩에 대해 적당히 알고 있다.

영업난으로 시달리고 있는 「텐더」 영업의 많은 것들이 COVID-19로 인해 바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영혼만큼은 변하지 않고 남아있다. 셰이크를 상징하는 김렛, 스터를 상징하는 맨해튼이 그렇다.

아이스픽으로 찍어서 깎은 얼음을 마지막에 띄우는 것은 카이칸 김렛의 흔적이다. 카이칸 스타일은 입이 한참 넓은 잔을 쓰기 때문에 열을 빠르게 얻기에 얼음을 띄우게 되었는데, 텐더의 김렛은 그로부터 자유롭지만 그 영혼에 대한 존중을 담는다. 얼음의 가장 튼튼한 부분만을 남겨 만든 보냉제의 내구도는 그야말로 만족스러움 이상이다. 맨해튼은 어떤가. 카즈오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씻은 얼음"을 이용하는 스터는 손가락 네 개가 물흐르듯 가락을 이루며 고RPM으로 돌아가는 믹싱 글래스에서 물리적인 결합의 궁극적인 만족을 이끌어낸다.

체이서 한 잔을 따르는데도 귀찮은 과정들이 얹히는 이 일본식 바텐딩의 결과물들은 도대체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닿는 결론은 음료의 질감이다. 서양 믹솔로지 씬이 보드카와 리큐르 위주의 파티용 음료와 롱티를 필두로 한 암흑기에 시달릴 동안 일본인들은 미국에서 밀려온 고전적 칵테일 레시피가 맛있는 무언가임을 잊지 않았는데, 여기에 얹어진게 섞는 행위에 대한 고찰이다. 다른 방법으로 만든 칵테일들이지만 유사한 맥락을 공유한다. 마치 처음부터 하나의 음료로, 화학적으로 빚어진 액체처럼 미끄러진다. 제스트가 제공하는 탑 노트만이 구분될 뿐, 서늘한 곳에서 자라는 주니퍼베리와 뜨거운 햇볕을 머금은 라임이, 나무를 입은 라이 위스키와 풀뿌리의 맛을 지닌 베르무트가 거의 하나가 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째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합일에 이르른 음료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식 바텐딩의 결말은 호스피탈리티에 있다. 따라내는 것까지, 저녁 즈음하여 한창 피로에 지쳤을 입맛을 위해 단순하고 강렬한, 그리고 낯설지 않은 기주들의 선택부터 그 풍미를 가장 또렷하게 만드는 제법, 그리고 음료 앞에서 긴장하지 않아도 좋은 서비스. 오늘날 일본 요리는 종종 페티쉬의 대상이 되거나 오해를 산다. 그러나 일본식 바텐딩을 배운 서양의 바텐더들과 "노렌와케"를 내건 서울의 텐더 모두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제 나름의 합리적 감각이 있다. 결국 모든 것은 먹는 경험을 통해 어떤 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단지 먹는 즐거움을 어느 차원에서 구현하느냐의 견해 차이로, 텐더는 그것을 여전히 일상의 단계에서 구현하려 노력할 뿐이다. 다만 긴자 본점과 동일한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긴자를 들락날락하는 일상이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하지 않다는 현실은 고민의 대상이다.

  • 굳이 잡소리 하나를 보태자면, 경험의 공간으로서 한옥이 과연 언제까지 한옥이니까 좋다로 끝날지는 모르겠다. 한옥 안에는 이제 교양있는 일본어를 사용해야 하는 초밥집들도 속속들이 채워지고 있는데, 한옥과 일본 요리 양자 모두 서로 할 말이 있지 않나. 특이한 동거가 계속되고 있다. 우리에게 한옥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아! 물론 건축은 이 블로그에서 다룰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