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텐더 - M-30 Rain
보드카 베이스, 색상을 맞추기 위해 리큐르를 소량 사용하는 칵테일. 오늘날 이런 칵테일은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취급받는다. 이제는 칵테일 제작의 영역이 앞뒤로 넓어져 맛을 넣고 싶다면 기주의 증류 및 인퓨징 단계, 혹은 그 이전 재료의 생산 단계까지 개입하고 있는데 보드카 베이스라니, 칵테일 암흑기를 떠올리게 한다. 색상을 맞추기 위한 극소량의 큐라소는 또 어떤가. 시각적으로 매혹하기 위해서는 99가지의 다른 방법이 존재하고, 색소와 향료를 넣어 만드는 볼스 리큐르는 주머니 사정 넉넉해진 늙은 애호가들에게는 실버 드래곤 보드카의 친구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재료를 써서 만드는 칵테일이 있다. 보드카 베이스에 라임과 팜펠무제 4:1:1이 기본. 침이 고인다면 보드카를 줄이는 것으로 대응한다. 풍성한 과실의 신맛과 향으로 먹는 칵테일로, 김렛이 지니는 확 깨는 화사함 대신 커다란 과실의 복잡함으로 대응한다.
이 칵테일의 시작과 끝은 팜펠무제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기 전에는 모르는 분들도 계시리라. Pampelmuse라는 독일어는 수입산 식물에 대해 만들어신 조어이기 때문에 언중의 의미가 기대만큼 뚜렷하지 않다. 사전적으로는 Citrus maxima를 의미해야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자몽(Citrus x paradisi)으로 만든 리큐르도 팜펠무제다. 이 칵테일에 쓰이는 슈페트 팜펠무제가 그 경우로, 보틀의 하단에 자몽임이 명기되어 있다. früchteparadies라는 표현은 백 년 전에나 쓰였던 것 같지만, 낙원의 과일이 자몽의 이명이라는 점은 그 학명에 남아있으니 우리는 알 수 있다.
비극일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의 무게, 그리고 애통함을 담은 선율에 바치는 칵테일이지만 팔레트에서는 슬픔보다는 즐거움이 크다. 무취, 무미의 스미노프는 셰이크에 따른 마우스필을 짓는 뼈대의 역할이고, 경험의 거의 전부를 팜펠무제가 사로잡는다. 리큐르의 희미한 쓴맛, 그리고 셰이크로 형성된 편안한 질감이 신맛을 즐기게 돕는다. 하지만 시고, 그래서 기쁘다. 미묘한 푸른색이 아마도 단맛을 느끼기 어렵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을까? 눈을 감는다고 해서 달아지지는 않았다.
아무렴 다른 칵테일과 어울려 한 잔 마시기에는 기가 막히다. 원시적인 레시피, 놀라움보다는 익숙함이 어울리는 칵테일이지만 새삼스래 들추어보면 오타쿠들의 재미요소가 가득하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오늘처럼 비오는 날의 거무튀튀한 하늘을 그리기 위한 리큐르는 종류와 양이 정해져 있는데, 초심자라면 스포이드를 사용해야만 맞출 수 있다. 높은 산도 덕에 마시기(drink)는 어렵고 홀짝이기(sip)에 기대게 되는데, 천천히 취하는 가락에 기대는 즐거움을 느낀다. 우리가 왜 바라는 공간을 사랑했더라? 그 이유에 대해 괜히 괜히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한 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