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항공 LX123 퍼스트 클래스 탑승기
본지의 정수는 무엇보다도 외식 전반에 대한 아마추어적 비평이므로, 본래 이런 글은 핏에 완전히 맞지는 않지만, 스타얼라이언스 이용객으로서 스위스 국제항공의 인천-취리히 노선 취항을 기념해 일등석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 투욀 시티 이후 간만의 여행기로 가볍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인천발 취리히행 LX123편은 오전 9:55에 출발하므로 공항에 아침 일찍 도착하게 된다. 같은 스타얼라이언스이지만 아시아나와는 정 반대편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데, 습관적으로 아시아나 카운터 가까운 곳에 내려 한참을 걸었던 기억이 있다.
카운터는 물론 직원들도 모두 모회사인 루프트한자와 동일한 곳에서 처리하며, 직원들도 공유한다.
스타얼라이언스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는 아시아나의 비즈니스 스위트 라운지가 제공되는데, 공간은 여유롭지만 라운지로서의 재미는 싱가포르항공의 비즈니스 라운지보다도 못하다. 물론 비즈니스 스위트 라운지의 이용객이라면 라운지는 지긋지긋하게 들러본 상용 고객이거나 기내에서의 만찬을 기다리고 있는 퍼스트 클래스 승객이므로 경험상 큰 흠은 되지 않지만, 원가절감의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져 아쉬움이 크다. 이제와서 아시아나의 경쟁력에 대해 말하는 것도 이제는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라운지 샴페인은 모에 에 샹동 브뤼.
게이트마저도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약간의 지연이 있은 후 탑승하는데, 루프트한자 그룹 특유의 그룹 시스템으로 탑승하게 된다. 유럽발 노선의 경우 루프트한자 상용 프로그램의 최상위 티어인 HON Circle 회원이 매우 많기 때문에 퍼스트가 속하는 그룹 1의 보딩을 위해서도 한참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하지만 이번 LX123편에서는 퍼스트 클래스 탑승객 이외에는 그룹 1 탑승자는 전혀 없었다.
좌석의 경우 1-2-1배열, Safran사의 것으로 전형적인 일등석 좌석이다. 구형 기종을 끌고 온 만큼 특별할 것 없는 좌석이다. 대한항공의 코스모 스위트와 비슷한 듯, 조금 더 긴 듯 한 느낌.
외투 보관이 습관화된 문화권답게 옷걸이가 하나 제공된다. 1A좌석에는 큰 미련이 없으므로 이동시 다른 승객과 마주칠 일이 가장 적은 구석 자리를 택했다.
스위스 국제항공은 2024년 현재 기준으로 포므리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어 샴페인은 포므리의 차상위 퀴베인 퀴베 루이즈를 사용한다. 말로락틱 발효의 뉘앙스도 약간 있는 듯 하며 주황색에서 노란색 느낌의 열대과일이나 시트러스 느낌. 약간의 버터와 향신료가 와인에 복잡성을 더한다. 좁은 잔에 마구잡이로 마시고 싶은 샴페인은 아니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주어진 환경에서 즐기기로 하자.
어메니티는 2종의 크림과 양치 도구, 이어플러그와 안대로 간단한 편. 크림은 스위스의 젊은 브랜드인 Soeder, 치약은 엘멕스. 대부분의 외항사 치약은 콜게이트가 많은데, 치약마저도 스위스제를 고집하는 것이 특징이다.
수면 잠옷 역시 스위스 브랜드인 Zimmerli 제품. 추운 기내에서 제공되는 제품이다보니 두께가 있는 편. 같은 기업인 루프트한자의 제품과 비교해도 살짝 더 두툼한 느낌이다.
일정 고도에 도달하고 서비스가 시작되면 먼저 뜨거운 물수건이 제공된다. 작지만 환대에서 중요한 요소를 차지해 주는 고마운 물건이다.
여느 항공사처럼 퍼스트 클래스에는 Wi-Fi 바우처를 제공하지만 기기 고장으로 세계와 단절된 채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기내 서비스를 만끽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으니 좋았다고 할까? 불행하게도 나는 원래 업무를 보기 위해 노트북을 준비했었다.
약간 이른 점심 식사를 시작하기 위해 테이블을 세팅한다.
시작을 알리는 건 세 종류의 그리시니, 하지만 기억에 더 남는 것은 비트와 약간의 사워 크림이 주는 신선함이었다. 그리시니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비트의 단맛이 좋았던 덕이리라.
공간은 한 사람이 사용하기에 충분한 넉넉함, 역시 서양식 환대의 전형인 흰 식탁보와 실버웨어로 시작된다.
빵 3종에서 단연 기억에 남는 것은 유독 하얗게 구운 바게트. 바게트라고 하면 떠오르는 갈색빛의 껍질이 아니라 속의 촉촉함은 최대로 지키되 껍질은 거의 발달하지 않은 역발상의 바게트였다. 나머지 빵들은 전형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바게트에 대해서만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올리브 오일은 토마토나 풀향이 강하고 매콤함은 적은 느낌.
대부분 스위스 내수로 소비되기 때문에 접할 일이 없는 스위스 와인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도 있는데(이쯤 되면 스위스라는 나라에 이렇게 공산품 콘텐츠가 많았는지 새삼스러운 느낌도 든다). 레만 호 동쪽 끝에 위치한 샤블레(Chablais) AOC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이보르네 그랑 크뤼로 부싯돌을 연상케 하는 미네랄은 리슬링을 떠오르게 하면서도 제비꽃이나 모과, 꿀과 같은 향이 리슬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화사한 매력을 전해준다. 향이 강한 음식이랑은 충돌할 정도로 부케가 강렬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샴페인과 정 반대의 캐릭터를 가지기 때문에 더더욱 와닿았던 것 같기도.
스위스 국제항공을 상징하는 앙트레라고 할 수 있는 발릭 연어인데, 이미 유명한 식재료지만 이참에 소개를 하자면 엄청난 전통이 있어보이지만 실은 1978년 창업한 Balik사의 상표의 이름을 딴 것이다. 발릭사에서는 공동 창업주인 카플란(Каплан) 가문의 조상이 과거 제정 러시아 시대에 생선 훈연 기술자(Коптильщик рыбы)로 명성을 쌓았던 레시피를 재현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제정 러시아의 훈제 생선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지 못했으므로 여러분은 재미로만 알아두시기 바란다. 배경을 걷어내고 현실로 어떤 음식인가를 보면 양식으로 3년여를 키운 연어를 소금으로 수분을 빼고 낮은 온도에 오래도록 훈제하는 방식으로 가공한 것으로 수분은 줄고 지방이나 근육 조직은 농축된 느낌으로 점도 있는 식감에 더불어 연어의 맛이 한껏 집중도 있게 다가오면서 약간의 염도가 기분 좋게 어울린다. 제정 러시아 따위를 떠올리지 않아도 탐닉할 만한 스페셜티로 스위스 국제항공을 타지 않더라도 기회가 되면 꼭 드셔 보시기를 바란다. 곁들이는 사워 크림과 블리니는 캐비어 서비스를 모사한 것처럼 보이는데, 사워 크림과는 훌륭하게 어울리지만 블리니로 연어의 아름다움을 감추고 싶지 않았다.
- 그래서 왜 러시아가 아니라 스위스에서 이걸 스페셜티로 내세우냐고? 스위스 기업가가 부활시킨 상품이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샤퀴테리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스타일이 병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실 이외에도 네 종의 앙트레가 더 있고, 원한다면 전부를 맛볼 수 있지만 발릭 연어 하나만으로 이 날의 목표는 달성했으므로 과욕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본식사에 곁들이는 와인으로도 스위스 와인이 준비되어 있지만, 좋은 빈티지의 보르도를 보고서는 욕심이 앞서버렸다. 샤토 지스쿠르의 해당 빈티지는 가당 이슈로 논란이 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마고에 2016, 그랑 크뤼라는 이름값에 넘어가는 속물 근성을 보였다. 카베르네 소비뇽의 전력이 펼쳐지지는 않았지만, 흠 없는 보르도 블렌드에 약간의 담배나 커피향까지 갖출 것은 다 갖췄다.
애석하게도 닭의 익힘은 유쾌한 영역을 벗어나고 있었지만(이런 형태의 음식을 보통 따지고 들지 않는 이유가 이런 데 있다) 타라곤 향을 입혀낸 쉬프렘 소스의 향은 훌륭했고, 감자 무스는 버터와 감자의 균형과 질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살짝 달콤함마저 감도는 착각을 일으키는 버터향과 감자의 갈색빛 향이 닭가슴살의 단단함을 잊게 도와주었다.
치즈도 다섯 종을 고를 수 있지만 두 종류만 선택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블뢰 두 빌라주로 가운데는 전형적인 푸른곰팡이 치즈지만 바깥 부분은 소프트 치즈 느낌을 고루 가지고 있어 재밌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곰팡이 치즈라면 로크포르처럼 곰팡이의 집중도가 극에 달한 것을 좋아하지만 다른대로 즐길 수 있었다. 컨디먼트의 경우 건과일이 좋았다.
독일 문화권에서는 키르슈가 있다면 꼭 키르슈를 드셔보시기 바란다! 제과 주방에서 쓰는 것들과 과실의 집중도가 있는 키르슈 사이에는 꽤나 큰 차이가 있다. 투명한 키르슈는 오크가 아닌 유리병에 숙성하므로 빈티지는 사실 큰 의미가 없지만 잘 만든 키르슈가 가진 화사함과 약간의 톡 쏘는 느낌이 멋드러지게 녹아있다.
흔히 초콜릿과는 위스키를 생각하지만, 초콜릿과 오드비를 함께하다 보면 포레 누아 케이크처럼 어울리는 느낌을 준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베딩 서비스를 받는다. 인터넷이 될 것을 생각해 충전기까지 챙겨와 업무를 볼 준비를 마쳤지만, 하는 척만 하고 주어진 휴식을 만끽했다.
보기보다 깊이가 있기 때문에 작은 전자기기를 보관하기에 충분한 공간. 구형 기제이기 때문에 기내 엔터테인먼트가 구형인데, 앞으로는 스크린 미러링 등 기능만 지원한다면 기내 엔터테인먼트의 자체의 중요도는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활하고 있다. 랩탑과 아이패드까지 싸들고 다니는 시대가 되다 보니.
그렇게 잠에 들고.. 끝나기에는 역시 아쉽지 않은가? 졸린 눈을 비벼가며 열심히 먹었다.
미리 절단면을 한 번 지져둔 듯한 브리오슈와 열악한 환경에도 제대로 녹여낸 치즈를 곁들인 치킨 버거는 앞선 닭가슴살을 깔끔하게 잊게 만들 정도로 완성도가 훌륭했다.
아이스크림은 현지공수품.
초콜릿을 내세우는 스위스 국제항공답게 캐빈 크루가 있는 공간에는 언제든지 초콜릿이 준비되어 있다. 다들 입맛은 비슷한지 눈독을 들여놓은 것들부터 사라지는 것을 보고 무언의 동질감을 느꼈다.
커피의 경우에는 네스프레소 캡슐로 준비되어 있다. 네스프레소가 네슬레의 브랜드라서 설마??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로 온통 모든 것이 스위스다...
이 굴라쉬에서는 현재 스위스 국제항공의 메뉴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오텔 드 빌 르 크리시에의 셰프 프랑크 지오반니니의 실력을 약간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단백질의 조리 상태를 섬세하게 조절하기 불가능한 환경이다보니 소스나 재료의 조합이 빛이 나기 마련인데, 사워 크림과 굴라쉬의 토마토의 신맛의 흐름에 살짝 강하게 덖어낸 슈페츨레와 버터에 볶은 야채까지, 단순하면서도 균형의 극을 보여주는 요리였다. 한국에서 비즈니스 클래스나 퍼스트 클래스에서 라면 서비스를 하는 것이 하나의 의식으로 자리잡은 것처럼, 이런 요리는 정서적 만족감을 전달하는 게 핵심인데 정말 그런 만족감이 있었다. 빵으로 깨끗이 닦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유로를 맞아 옷을 새로 입은 초콜릿을 받을 때 쯤이면 이륙할 때가 되었다.
약 1시간 후에 바로 연결 항공편을 탑승하는 여정이었는데, 퍼스트 클래스 탑승자는 리무진을 타고 전용 입국 수속 장소로 이동한다. 이동 시간은 약 5분 정도.
공항의 뒷문같은 곳을 지나면 곧바로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로 연결되는데, 역시 HON Circle 회원들이 매우 많기 때문에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임에도 꽤나 붐비는 편이다.
본래 취리히의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는 화려한 주류 라인업과 다양한 식사 메뉴로 무장하고 있지만 환승까지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기내에서 충분히 식사를 하고 내린 뒤였기 때문에 간단한 안주거리로 요기만 했다. 라운지 샴페인으로 선택했던 것은 파이퍼 하이직 밀레짐.
그래도 들른 김에 최대한 남긴 내부의 모습은 이런 느낌. 여기에 업무 공간이나 침대까지 특이한 공간들도 많은데 소개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그리고 내가 즐기지 못한 것도!). 이런 점에서 인천공항 출발편은 정말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샴페인 다음으로는 아쉬운대로 그랑 마르니에 퀴베 드 센테나레로 디저트를 갈음하고 간단히 몸을 다시 씻은 뒤 단거리 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어릴적 처음으로 인터넷에서 보았던 일등석 탑승기를 보고 꿈만 같다는 생각을 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굳이 이렇게 사진으로 다 남겨가며 글로 남기는 것이 겸연쩍은 사람이 되었다. 마음 속의 즐거움을 글로 반도 전하지 못해 아쉬운데, 그런대로 여러분에게도 유익하고 재미있는 여행기가 되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