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텐더 - 브랜디 사워
단순한 재료나 레시피로 이루어진 요리더라도 어떤 이들이 향유하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모습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빵 사이에 고기를 끼워먹는 요리들, 달걀을 익히는 요리들을 떠올려보면 제 문화권을 넘어 집집마다 스페셜티 메뉴가 있는 수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니 말이다.
칵테일은 그러한 재미를 즐기기 좋은 무대이다. 세계적으로 재료와 쓰임새가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그 틈새에 재미가 풍성하다. 스카치 위스키를 필두로 이제는 세계 어느 곳의 공항에서도 동일한 증류주를 찾아볼 수 있는 시대이지만 즐기는 방식 안에서 그들의 삶을, 또 새로운 맛의 가능성을 찾는 경험은 각별하다. 예컨대 "페르넷 콘 코카"가 그렇다. 세상천지 어디를 가도 마실 수 있는 콜라지만 바의 콜라는 그렇지 않다. 흔히 아메리칸 위스키로 콜라의 미세한 바닐라향-코카 콜라 컴퍼니는 세계 최대의 바닐라 빈 소비자이다-과 짝을 맞추고 콜라는 위스키의 달콤함을 당겨오는 시너지를 즐기는 버번 콕, 잭 콕과 달리 페르넷이 선사하는 오감이 열리는 듯한 화사함과 탄산의 몰아치는 청량감의 시너지는 아르헨티나의 지혜에 절로 감사를 표하게 해주는 즐거움이 있다. 페르넷 브랑카는 정말 이 음료가 아니면 구매할 일이 없는 물건이지만, 그만큼 마시는 데 아낌 없는 사랑을 퍼붓는 공간이 바로 BAR다. 콜라에 이렇게까지 구애하는 사람들이 또 있겠는가.
브랜디 사워라는 칵테일도 그렇다. 오늘날 마티니, 진 & 토닉과 같이 즐겨 주문되는 칵테일은 아니지만 무수히 많은 칵테일에게 맛 설계의 왕도를 제시한 '사워 칵테일'로부터 출발한 옛스러운 칵테일로 세계 어디에서나 주문할 수 있는 칵테일이다.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곳에서는 관심 바깥에 묻혀있는데, 달걀 흰자를 쓰는 뉴욕 사워나 아마레또 사워의 레시피가 여전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달걀 흰자는 특유의 거품 가득한 질감을 형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강한 알코올이나 오크통의 향을 점잖은 인상으로 다스리는데, 이러한 결과물이 언제나 필요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넣는 경우가 썩 잦다. 나는 이를 단지 잘못된 처방의 반복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사진의 브랜디 사워의 뿌연 층은 달걀이 아닌 하드셰이크의 결과물로 풍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제는 일종의 시각적 상징물이 되었다. 카즈오 우에다의 저서들에서도 반복적으로 얼음알갱이 층은 하드셰이크의 목적이 아니고 수반되는 결과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맛보는데 크게 방해는 주지 않으므로 아이덴티티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드셰이크를 눈으로 즐기고자 한다면 준비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는게 여러모로 낫다. 코블러 셰이커의 널널한 스트레이너보다는 그쪽에 지혜가 더 많이 스며있기도 하고.
잠시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저 얼음알갱이 층을 치우고 나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달걀도, 비터스도 없이 완성된 사워 칵테일이다. 사실상 기주를 셰이크해서 다시 마시는 것에 가까운 극단적인 레시피이지만, 맛은 친절하다. 풍성하게 다가오는 신맛, 누구나 아는 V.S.O.P 꼬냑의 말린 과일과 계피, 바닐라향. 모든게 친숙한 가운데 그 존재는 낯설다. 단순한 칵테일인 만큼 즐길거리가 없는 칵테일같지만 그야말로 꼬냑 그 자체를 연상케하는 도수에 짐짓 뒷걸음질 치다가도 다시 입에 대고 있는 장면을 인식하는 순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사이드카의 드라이한 인상도, 옛 방식 사워 칵테일의 편안함도 없다. 그러나 높은 알코올의 유혹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면 신맛 덕에 자극받은 미각이 나를 다그친다. 한껏 차가운 온도와 부드러워진 질감에 기대어 들이키려 들면 솟아오르는 알코올이 만취를 막아선다. 숏 드링크 칵테일이란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하는걸 새삼스래 느꼈다. 달걀 흰자나 체리 가니쉬같은건 접어두라지. 많이 마실 수 없는 음료, 그래서 좋은 음료. 한 잔이 하루를 관통하고 있었다.
엄밀하게 말해 이 칵테일은 위스키 사워의 정립된 레시피가 아닌, 사워라는 장르를 최초로 정리한 제리 토마스의 칵테일 북의 "Japanese Cocktail"의 직계 후손같았다. 브랜디를 셰이커에 와인잔만큼 담아 흔들어 내는 칵테일 말이다. 그 당시 왜 브랜디에 레몬 필을 꽂아 일본이라고 이름을 붙였는지는 몰라도, 정말로 그 레시피의 영혼은 일본에서 완성된 듯 보였다. 브랜디를 마시기 위한, 하지만 브랜디는 아닌, 그러면서도 브랜디의 기억을, 즐거움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는 한 잔.
멈출 수 없는 갈증이 도사리고 있는 낮의 사워는 과연 같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혹여 낮에 진 토닉이 아닌 사워 계통의 칵테일을 찾는다면 이 경우와는 달리 키프로스식을 참고할만 하다. 일본의 브랜디 사워ブランデー・サワー가 극단적으로 기주를 숭배한다면 키프로스의 브랜디 사워Μπράντυ Σάουαρ는 비터스에 탄산수를 부어 완성하는 롱 드링크로, 올드 패션드와 위스콘신 올드 패션드와 같이 가계로 묶일 수 없는, 텐더의 브랜디 사워와는 전혀 딴판의 레시피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또 우리는 일본인도, 사이프러스인도 아니지만 그러면 또 어떠한가. 레몬과 함께 세계를 거닐며 또 마실 궁리를 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