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뚜아멍 - 2023년 겨울
연말 분위기를 내볼 만한 게시글을 하나 써볼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연말이라고 해봤자 생각나는 아이디어라곤 성탄밖에 없었고, 파네토네나 슈톨렌에 대해 쓰기는 싫었다(때가 무르익을 날이 올 것이다). 대신 그런 이야기를 해보자. 망년회와 송년회라는 이름 속에서 잠시 벗어나 홀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야기를.
식사 전에
뛰뚜아멍의 예약은 서드 파티 앱인 캐치테이블과 전화, 카카오톡 등으로 가능하다. 예약 후 한 번의 확인 절차가 있다.
요리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뛰뚜아멍은 주방에 단 한 명이 상주하는 가게라는 점이다. 전담 서버가 있으므로 일본식 표현의 원오페ワンオペ에 해당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대로 된 정찬을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한 환경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구조의 환경은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한 점보다는 우려스러운 점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요리에는 그런 요리의 세계가 있다. 그 점을 유념해야 한다.
총평: 디테일을 잡아낼 수 없는 환경이지만 몇몇 특징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보자.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텍스처다. 가장 빛나는 지점이라고 본다. 환경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질감의 대부분은 취식 이전 가장 가까운 시점에 진행되는 열변화의 통제에 따라 달라지고, 이것은 주어진 환경-적은 노동력, 높은 통제 수준-에서 가장 쉽게 강점이 발휘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감안해도 경험으로 단련된 감각, 그리고 주관적으로 특정한 지점을 결정할 수 있는 결단력은 높이 살 가치가 있다. 이러한 감각이 절정에 달한 요리는 덕대와 사바용이다. 비단같은 질감을 만드는 칵테일처럼, 빠르게 저은 뒤 체로 걸러 숨을 죽인 사바용과 'butter fish'라는 이름에 걸맞는 풍성한 지방을 가진 덕대의 부드러움이 맞물리며, 강한 신맛으로 잡아낸 균형감각은 흰살생선에 흰 소스를 더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을 가장 전형적이지 않게 비틀어 전형적인 쾌락을 다시 그려낸다.
둘째로는 완성되지 않은 개인이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표현에 주의하라. 프로, 직업, 생활으로서 요리사는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혼자서 이런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반복숙달로 익힌 기술이 어지간한 경지에 오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요리를 하는 기술인으로서의 요리사를 넘어선 한 명의 인간으로 그의 요리관, 세계관이 완전히 폴리싱까지 마쳐 빛을 내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몇몇 발상은 분명 현명하지만, 현명하기 때문에 충돌한다. 먼저 빛나는 지점은 재료의 특징에서 시작해 쌓아 올리는 상향식의 발상이다. 그을린 향을 멋드러지게 이어받는 관자와 돼지감자, 살의 단맛으로 묶어놓은 듯한 일체감을 보이는 새우와 시금치와 같은 파격의 요리에서 그 감각은 크게 빛을 발한다. 굳이 모를 잡자면 뿌리가 두꺼운 포항초를 사용했다면 그 단맛이 더욱 빛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정도가 있었을 뿐, 그마저도 흠이라고 할 수는 없는 수준이다. 반면 전형성을 기반으로 변주하는 하향식의 요리에서는 항상 성공만이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앞선 덕대와 사바용과 같은 위대한 승리도 있으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겨울의 계절감을 최대한 살린 오리 파테는 실은 트러플의 첫향을 이어받는 표고버섯의 묵직한 흙향, 소스의 강한 신맛으로 열악함을 가린 타개의 문법에 가깝게 느껴진다. 꼬치고기를 올린 파스타는 그 사이의 어디쯤이었다. 토르치오Torchio 형태를 본뜬 듯한 호박 파스타(루스티켈라 디 아브루초 제품으로 추정)를 시작으로 단맛과 지방으로 풀어내지만 앞뒤의 흐름 사이에서 제대로 먹혀들어간 느낌은 아니었다. 두께가 다소 있는 숏파스타를 사용하는 만큼 점도와 강도를 높였다면 나았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소스에 가리지 않고 면을 드러내는 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이런 면이라면 어지간해서 가려질 일은 없다고 본다(차라리 흐름상 만취해가는 객의 입맛이 더욱 걱정될 뿐이다). 디저트의 경우 겨울이라는 계절에는 제대로 먹혀들어가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바뀔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앞으로는 아쉬운 지점이 될 공산이 크다. 그나마 떠올려볼만한 발상이라면 결국 이 요리사의 얼굴에서 아직은 지울 수 없는 그림자의 주인, 거대한 고목-가니에르의 것을 빌리는 정도가 떠오르는 대안이다. 그의 커스터드 안에 홍삼이 들어가듯이. 물론 미봉책에 가까우므로 권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권할 위치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뚜아멍은 큰 잠재력을 지닌 공간이라고 본다. 당장 눈에 띄는 것은 기술의 노련함이지만, 재료의 본질을 관통하는 요리사의 감각과 그것을 살려내는 창조성으로 더욱 빛날 공간이다. 그리고 그 빛을 발하는 방식이 바로 '뛰뚜아멍'이 아닐까. 그 이름 말이다. 프랑스어의 tutoiement이란 tutoyer의 명사형이다. tutoyer는 다시 tu와 -oyer가 합쳐진 말이며, tu는 2인칭 비격식 인칭대명사, -oyer는 동사를 만드는 접미사이다. 비격식 인칭대명사가 사장된 영어를 제외하면 스페인어의 tutear, 독일어의 duzen, 이탈리아어의 dare del tu 모두 같은 의미를 공유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비격식과 격식의 구분은 고저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언중의 용례와 언어학적 탐구 모두를 고려했을 때 비격식과 낮춤말이 완전히 다르다고는 하지 않는다. 격식/비격식 구분을 쓰는 서유럽 언어라도 상사, 고령자가 먼저 비격식투를 권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유럽어의 비격식 인칭대명사는 항상 상호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치명적인 차이를 지닌다. 낮춤말의 상대방이 높임말을 쓰는 상황은 얼마든지 상상해볼 수 있지만, 나의 tutoyer와 상대의 vouvoyer가 교차하기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거리는 좁히되 눈높이는 맞추는, 한국의 세계관과의 차이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지점이다. 물론 이것을 우열로 따지고 들면 우를 범하는 것이지만, 사용해보면 인칭대명사에서 이어지는 소통의 차이가 상당함을 느낄 수 있다. 한국어에서도 '말놓기'를 통해 유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일상 언어의 강력한 힘 아래 말놓기는 일방통행이 되기 십상이다. 사무실에서 이름을 영어로 개명당하는 와중에도 사내 문화는 상호비칭이 아닌 상호존칭을 유지하는 이유가 있다.
쓸데없이 언어에 대한 설명이 길어졌는데(본지의 독자라면 응당 다 아는 내용임이 분명함에도 본인의 탐욕을 주체하지 못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결론적으로 뛰뚜아멍의 요리는 이런 관계를 지향한다는 꿈을 꾼다고 생각한다. 한국식 오트 퀴진('파인 다이닝', '스시'의 결합체)에서 요리사는 사치의 부속품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의 요리사는 카운터 반대편을 내려다 보지도, 올려다 보지도 않고 tutoyer를 건넨다. 참으로 담대하지 않은가.
분위기: 작지만 좁지 않고, 차분하지만 무겁지 않으며, 어둡지만 차갑지 않다. 다만 공간의 특징상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이 그 날의 분위기를 바꾸어 나갈 것이기에 경험의 편차가 클 수 있음에 유의.
서비스: N/A(이 레스토랑의 인력은 두 명이다)
가격: 단일 메뉴 270,000KRW.
음료: 있어야 할 것만 있는 듯한 선택지. 지역이나 스타일에 대한 편중은 피해갈 수 없다. 어차피 다들 빈손으로 오지 않는 서울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