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naud Nicolas - 샤퀴트리
메종 베로 얘기를 하면 너무 뻔해지므로 샤퀴트리에 대해서는 아르노 니콜라만 다루기로 결심했다. 메종 베로는 검색이 잘 되는 곳이니까. 큰 틀에서 어차피 주제는 비슷하게 흘러간다 생각한다. 아르노 니콜라는 시트롱마카롱 출판사에서 번역한「세상에 모든 샤퀴트리」의 저자라고 하면 아마 더 잘 아실 인물이다. 유명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도 경력이 길지만 지금은 자기만의 샵을 하고 있는데, 흔히 일반적인 샤퀴트리와 이런 소규모 매장에서 샤퀴트리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짧은 식사에서 짧게나마 다뤄본다.
먼저 제공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다. 당연히 샤퀴트리의 기본값은 콜드 컷, 그대로 차게 내는 것이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상온에 내는 음식이라고 하는게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냉장 기술의 발달보다 샤퀴트리의 존재가 앞서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한다. 샤퀴트리는 그렇다면 왜 상온에 내는 것일까? 당연히 주 목적이 맛이 아닌 상온에서의 보존 그 자체에 있는 음식이라는 기원에서 시작한다. 주로 버리는 부위나 빠르게 부패하는 부위를 장기 보관하기 위해 가공한 것이 인류의 육가공사이며, 샤퀴트리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보존을 위한 가공을 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기존의 육가공업자(boucher)와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무렵이며, 현대의 샤퀴트리는 그 자체로 먹을 수 있는 상태를 지향하는데 그러한 구분이 퀴(cuit)라는 글자에 그 의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다보니 소와 같이 값비싼 취급을 받는 재료는 샤퀴트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편이며 주로 돼지와 가금류, 그리고 부정기적으로 수급되는 사냥을 통해 얻는 잡다한 고기가 주제가 된다.
오늘날에는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얻어가는 장점이 보존이라는 기존의 의도에 앞서고 있는데, 버려지거나 인기 없는 부위를 사용한다는 점이 생산자 입장에서도 원가 측면의 메리트가 되며 환경적으로도 폐기물을 줄이는 방향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 값비싸고 인기 많은 재료에 의지하는 방식의 요리 사상에 비해 발전의 여지도 있다. 보존을 위해 수분을 줄이자 맛의 집적도가 올라가고 산패와 멀어지기 위해 사용하던 향신료는 이 요리에 다양하고 복잡한 맛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또한 유지방이 아닌 견과 등의 식물성 지방까지 사용하는 등 지방의 뉘앙스에 대해서도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 점이 샤퀴트리가 내세울 만한 강점이다.
아르노 니콜라를 상징하는 샤퀴트리는 돼지를 사용하지 않고 만든 파테 엉 크루트로 샤퀴트리가 가진 기교적 재미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여러 동물을 혼합하지 않고 한 종류의 동물, 닭만을 사용하되 적색에 가까운 허벅지 쪽과 백색에 가까운 가슴살을 분리했다 다시 혼합하고 연결고리는 거위 간의 지방이 채워 겹겹이 쌓는다. 상온에서 먹는 것이 아슬아슬하게 즐거운 간의 지방이기 때문에 가능한 설정이다. 강하고 화려하게 부딪히는 맛은 아니지만 씹어댈 때 피어나는 힘이 강하다. 그야말로 닭맛인데, 어찌 보면 우리에게는 우스운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닭이 그럼 닭맛이지 무슨 맛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닭맛이다. 모이도 주다 말고 마구잡이로 키우던 시골 닭을 급하게 삶아내면 질겨버릇하기 그지없지만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의 맛이 있는데 그런 닭맛이 씹을 때마다 피어난다. 닭다리를 좋아하는 한국인에게 더욱 크게 다가오는 기쁨이다. 거기에 패스츄리로 지방과 탄수화믈을 이미 덧댄 설정이니 하나의 완성된 요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요리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역시 오븐과 패스츄리 반죽이겠지만(간은 없어도 어찌저찌 만들 수는 있다) 그것이 해결된 이후에도 무언가 이상한 이미지가 씌여져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황실에서 먹는다는 잡지 기고문도 본 적이 있는데 이런 장삿속을 벗겨낸 다음 제대로 된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프랑스 황실이라면 나폴레옹이라는 얘긴데 정작 나폴레옹은 먹는 취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설마 왕실보다 황실이 높아보여 한 말이라면 어쩔 수 없지.
주제에서는 벗어나지만, 의도적으로 체류 내내 전형적인 현대적 바게트를 최대한 피했는데 정말 절망적으로 맛있었다. 뻔하게 스펙 좋은 밀가루와 이스트로 뻔하게 잘 만든 바게트가 가진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다.
소시지에서는 한국의 육가공에 대한 미래도 생각해 보았다. 열조리에 조미까지 더해지기 때문에 고기가 가진 개성은 비교적 덜 드러나는데, 한국에서도 이런 소시지를 작정하고 만들면 비슷하게는 연출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일회성으로 생산은 가능해도 그 이상에 대해서는 회의적인데, 우리가 가진 육가공에 대한 이해나 원육의 차이 이런 문제가 아니라 이걸 소비하는 정서,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런 서양 육가공품의 가장 주요한 장르는 튤립부터 스팸에 이르는 프레스형 가공육이다. 그 품질은 여전히 돼지고기 함량을 두고 다투는 실정이며 자연히 그 맛에 대한 논의도 전무하고, 요리법에 대한 아이디어도 부족하다. 한국 육가공품의 큰손이라고 하면 부대찌개집 정도가 있으며 이외에는 캠핑업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위 한 접시에는 그래서 뭐 그렇게 대단한 문화가 있는가? 실은 이런 소시지를 식사로 만드는 쪽은 소시지 본인이 아니라 옆의 감자 무스다. 조엘 로부숑의 것에 비하면 초라하겠지만 멀쩡한 무스로 적당한 버터향, 그리고 적당한 부드러움이 있다. 소시지를 먹기 위해서는 소시지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닌 것이다. 물론 19세기 선교사들의 문헌에서도 한국인들은 내장을 간단하게 불에 굽거나 해서 먹어버린다고 되어있는 등 육가공품 따위에게 알맞는 반찬까지 준비하라는 것은 과한 요구처럼 들리긴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육가공이 가진 현대적인 의미, 저렴한 원가와 서양 이름에서 나오는 부가가치부터 흔히 말하는 노즈-투-테일같은 사상적인 목적까지 달성하려면 더욱 철저해지는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그런 요리가 없다는 말은 더 이상 변명이 되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파스타는 탕국의 영향을 받아 탕국에 가까운 방식으로, 피자는 단맛 위주에 최대한 갖가지 토핑을 뿌리는 식으로 변하거나 한식 그 자체에서도 떡볶이 하나를 두고 탄수화물의 우주가 펼쳐지고 있다. 공기밥을 넘어 감자 무스는 물론 렌틸 콩이나 후무스, 폴렌타 따위로 시야를 넓히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노골적인 뒤카스 스타일의 바바는 뒤카스는 되지 못한 관계로 다소간 불만스러웠으나 크림만은 바닐라의 향이 아주 훌륭했다. 바바를 위해 크림을 먹는 게 아니라 크림을 닦아먹기 위해 바바를 이용한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