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티넨탈 - 2023년 봄
레스토랑 비평을 시도하는, 또는 비평의 이름을 팔아 나름의 만족을 취하는 사람이라면 흔히 마주하는 문제로 결과론적인 질문("그래서 어디가 최고라는 거냐") 또는 비판("그래서 어디를 더 자주 가지 않느냐") 따위가 있다. 첫째에 대해서는 완벽한 수직 평가의 어려움으로 답한다. 예컨대 체호프나 고골의 단편과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단순히 작품성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우열을 매기기 어려운 문제와도 같다. 작품이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다르게 작동하듯이, 요리 역시도 식사의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다르게 작동할 여지가 크다. 다만 메뉴의 구성에 이르기까지의 사고, 그리고 반복되는 조리의 실행 내의 공통 감각에서 일정한 평가의 여지가 발생할 뿐이다. 둘째에 대해서는 더욱 답변이 쉽다. 본지는 아마추어 지향이지만 그래도 프로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프로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고 싶을지라도 그래서는 안될 때도 있고, 그럴 수 없을 때도 있다. 특정한 식당에서 식사를 자주 하거나, 특정한 식당에 거의 가지 않더라도 이는 단지 프로로서의 숙명일 뿐이다. 애초에 평론을 게재하는 것과 본인의 방문 빈도는 별로 비례하지도 않는다.
방문 전에
콘티넨탈의 예약은 웹상 및 전화로 가능하며, 이메일은 있으나 웹 이용을 권장하는 유도 안내가 있다. 예약 이후 카카오톡 알림 메시지가 전송되며 별도의 확인 전화는 예약 확정 시에도, 방문 전일 및 당일에도 없다.
요리
콘티넨탈의 저녁 메뉴는 테이스팅 메뉴 단품(KRW 300,000)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요리에 대해 길게 언급하지 않기로 했지만, 몇가지 해야 할 이야기는 해야겠다. 먼저 오르되브르를 통해 드러내는 콘티넨탈의 방향성이다. 샴페인까지 있는 상태에서 오르되브르가 제 역할을 하려면 포션은 작되 맛이 응집력이 있어야 하는데, 가장 먼저 나오는 튀일 비슷한 와플은 정확히 그 반대의 길을 걷는다. 튀일의 비중이 높고 마요네즈는 듬성듬성 있을 뿐이어서 오로되브르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반대로 해낸다. 양이 많아보이는 효과는 확실할 지 몰라도. 다행히 두 번째 시퀀스까지 이러한 흐름이 이어지지는 않는다. 꽃게를 이용한 사바용은 보통 가재를 사용해 만드는 요리에서 가재만 게로 바꾼 인상인데 좋게 말하면 게의 특징적인 느낌이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열등한 대체품의 인상이었다. 흔히 "샴페인 사바용"이라고 부르는 소스의 이름처럼 와인의 신맛 뉘앙스로 레몬까지 이어져 이를 가렸으면 나았을지 모른다. 튀일-샐러리악-타르틀렛으로 이어지는 질감의 연속도, 트러플-캐비어-참치로 이어지는 팔레트의 연속도 명확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아주 부수어지지도, 그렇다고 부드럽지도 않다. 아주 밋밋하지는 않지만 값싼 오르되브르의 전형보다도 선명함은 떨어진다. 그나마 먹는 이의 재량이 있는 사바용에서 캐비어의 짠맛만이 짝을 짓는 로제 샴페인과 견줄 힘을 지닌다.
전체 흐름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가드망제가 만만하다는 뜻이 아니다. 서비스 시간 바깥에 위치한다고 해서 식사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이곳 같은 경우는 분명히 서비스 시간에 완성하는 종류도 있다(사바용). 전형적인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무언가 다른 의도가 앞서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구성을 보면 그것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허영심이다. 첫타부터 등장하는 트러플(향),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캐비어. 수입 사정이 좋았다면 분명 푸아 그라도 한 자리 있었겠지. 물론 푸아 그라와 캐비어는 전채로서 흠잡을 데 없는 재료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에서는 제대로 빛나지 못한다. 간단하게 콜드 컷으로 낸 치즈나 염장육보다 과연 지금의 형식이 오르되브르 역할을 더 잘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다음으로 나오는 요리는 레퍼런스가 노골적이어서 당황스러웠다. 에릭 프레숑의 랑구스틴 호이얄으로 표절과 오마주 그 사이에 위치한 수준으로 판박이다. 컨디먼트의 오렌지/양파의 단맛을 아래의 소스로 옮기고, 타임과 코리앤더 대신 큐민을 써서 카레 풍미를 주장하고 있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브리스톨의 그 남자가 떠오른다. 그래, 레시피에는 저작권이 없다고들 하니까. 하지만 나는 모욕감을 느꼈다.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알면 어떻다는 것인가?
이 요리에는 명확한 비교군이 있다. 클레멘스의 발드호텔 소노라에서 선보인 랑구스틴이다. 망고-유자로 레퍼런스에 대한 성격은 더 선명하지만 열등한 모방이 아닌 나름의 창작 영역을 더하는데, 강렬한 버터 향의 소스와 컨디먼트를 통한 식감의 다변화가 그 지점이었다. 에릭 프레숑의 양파-망고와는 달리 단맛을 망고 뉘앙스 그대로 선명하게 살렸던 점도 주효했다. 콘티넨탈의 랑구스틴은 벌써 반 년이 되가는 요리의 맛을 다시 생생하게 기억하게 하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아주 유의미했다. 하지만 스스로는 어떠한가. "한국의 사정이..." 같은 이야기는 이 요리에 대해서만큼은 접어두자. 랑구스틴의 품질은 브르타뉴산에 그대로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아주 괜찮아, 가장 윗부분의 단맛을 맛볼 때에만 해도 오늘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어올랐다. 하지만 소스에서 빠르게 내려앉았다.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아 모르겠지만 허브 한 종류를 오일로 두른 것은 프레숑 스타일의 스파이스와는 너무 다른 것이었다. 참고로, 에릭 프레숑의 랑구스틴은 온전히 타임으로 향신하는 게 아니라 바스크 요리에 쓰는 고추(피멘트 드 에스플레트)를 몰래 입혀 만든다.
레퍼런스가 아예 없거나 내가 모르고 지나갔다면 그냥저냥의 해보았습니다 요리로 지나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 요리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 사고에 대해 부동의할 수밖에 없다.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재료로 대체한다고 새로워지는 것도, 그렇다고 정말로 대체가 되는 것도 아니다. 흔히 요리사들이 무슨 여행에서 영감을 얻었다느니 하면서 신메뉴를 내는 경우가 있지만, 정말 그 여행지의 요리를 복제해오리라고 누가 기대하겠는가? 나는 요리사가 라이카가 되길 바라는 게 아니다.
차라리 빵을 베끼기로 했다면 박수를 쳐줬을 것이다. 에피큐어는 타협 없는 사워도우를 쓰니까. 하지만 정작 콘티넨탈은 빵에 대해서는 극도의 보수성을 보인다. 오른쪽의 바게트가 특히 문제적인데, 바게트지만 매우 부드럽다. 반죽이 작다보니 껍질이 발달할 여유가 없고, 결국 구운 빵맛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다. 여린 껍질을 갈라보지만 새어나올 빵 내음이 없다. 빵의 크기에는 버거운 버터나이프로 빵을 덮어버리듯 먹게 되는 형국이다.
앞선 랑구스틴에서는 허브가 의미를 잘 모르겠는 오일로 처리되었다면 정작 러비지 소스라는 요리의 이름에서는 러비지가 그런 방식으로 처리되지 않았다. 애초에 왜 소스를 러비지라고 부르기로 한 것일까. 직관적으로는 러비지의 풀, 아니스 향이 강하리라 기대했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달걀과 캐비어 사이에 생선을 끼워둔 듯한 요리가 나타난다.
왜 러비지였는지 의문을 갖는 지점은 포기했으므로(심지어 나는 이 이름으로 검색도 해보았으나 그 누구도 러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단순한 요리로 바라보자면 결국 캐비어를 먹기 위한 요리에 불과했다. 캐비어를 좋아한다, 좋다. 하지만 비합리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내 캐비어가 납득이 갈 만큼 브란지노는 무의미했다. 흰살생선에 대한 조리 자체가 정교하지 못한데, 애초에 이렇게 조리할 요량이라면 왜 브란지노였을까. 단순히 지중해에서 많이 쓰기 때문일까. 다른 단백질이 브란지노 자리에 있었다면 이 요리는 더 나아졌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러비지에 대한 의문을 제외하면 소스와 캐비어, 그리고 브란지노의 맹점을 메꿔주는 테두리의 섬유질-전분의 흐름은 납득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무엇을 예상하겠는가. 앞서 언급한, 캐비어-트러플-(푸아 그라 부재 중)의 흐름이 예상대로 이어진다. 하나를 더하자면, 에릭 프레숑도 또 나온다. 트러플로 조금 가려져 있지만, 이 주황색-검정색이 교차되는 플레이팅에서 마치 이 레스토랑에 프레숑의 화신이라도 있는 듯 느끼게 만든다.
속을 채운 파스타-소스 쉬프렘-치즈를 얹어 그라탱이라는 양식까지 큰 틀에서 에릭 프레숑 그 자체지만, 소스 모르네Mornay를 쓰지 않고 성게를 써 체면은 살렸다. 문제는 그 체면을 살린 김에 더한 날 성게소에서 불행한 맛이 났다는 점이다. 만 엔 언저리의 식당과 비교하기도 민망한 저렴한 냉동 성게소의 그 맛으로, 미세한 부취제 느낌까지 성게를 이용하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나마 소스로 만든 것은 가열하기 때문인지 이취가 적었지만, 소스 모르네의 버터/우유처럼 쉬프렘의 강한 짠맛을 받아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두 소스는 기왕 에릭 프레숑이 선보인 흑백의 대비의 의의는 살렸다고 본다. 단순한 색상 대비가 아니라 팔레트의 대비라는 점까지도 이해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파스타 속을 채운 것에 있다. 원본은 푸아 그라와 아티초크, 그리고 트러플을 채워넣는데 그 자리에 콩테를 넣는다. 저렴해져서 문제가 아니라, 식탁에 오를 때 쯤이면 둘의 텍스처는 전혀 다른 것이 되는 게 문제이다. 같은 지방이라도 경성 치즈가 푸아 그라의 실크에 가까운 텍스처와 유사할 리 만무하다. 그 자체로 완성된 요리에 트러플을 다시 얹는 것은 앞선 캐비어와 같은 정서적인 문제로 보인다. 보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한국식 플레이팅이다. 반대로 말하면 보이기만 하면 일단 믿으니까.
푸아 그라의 빈 자리라도 그리웠는지 브리오슈 하나가 맥락 없이 제공되는데, 앞서 제공된 두 빵보다는 훨씬 나았다. 여러모로 혼란스럽다가도 어느 지점만은 분명한 것이 아주 재미있었다.
트루 노르망 비슷한 느낌인데 여러 반죽이나 요리에서의 반죽 사용례를 보면 애초에 패스트리 주방은 손을 놓았다는 생각이 드는 바 이런 종류도 자연히 기대할 게 못된다. 열도 다루지 못하는데 얼음을 다루겠는가.
한우 스테이크!!!!!의 등장은 요리사의 손을 떠난 영역에서 결정되는 것이므로 여기에서만큼은 그를 탓하지 않으려고 한다. 외려 이 요리에서 주방의 진가가 드러나는 지점도 있었다. 모렐 파르시는 서로 다른 맛으로 유의미했다. 아스파라거스나 모렐 모두 존재 의의가 느껴졌고 시금치 역시 한국의 철과는 무관했지만 기능에는 문제가 없었다. 상단의 감자는 로부숑 이후의 영향을 받은 것 중에는 썩 내키지 않는 정도였으나 전체를 감싸는 짝으로는 모자란 점 없었다. 문제라면 마데이라 소스인데 짝짓기 대신 택한 본-로마네에 견주기에는 소스가 충분히 졸아들지 않았다. 캐주얼한 식사에서는 통할 법 해도 캐비어나 앞선 쉬프렘 소스같이 강한 염도에 익숙해진 혀에 레드까지 곁들이는 실정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디저트는 구성만으로도 이 주방에서 패스트리의 사정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해준다. 어설픈 초콜릿 장식으로 그래도 분위기라도 연출해보려고 만든 무스는 그래도 평범한 수준에서 납득할 수 있지만 후자의 베린 모사품은 안타깝게도 탈락이다(누가 안타까운가? 이걸 먹는 내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성의 없게 만든 파코젯에서 점도마저 부족해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그냥 차가운 크림에 가깝고, 엘더플라워 특유의 향은 받아내줄 수 있는 지방도 단맛도 없는 채로 방황한다. 무엇이든 마시게 만드는 맛이 의도라면 성공했다. 르 코르동 블루 졸업작품으로나 나올 것 같은, 아이스크림/거품/초콜릿 디스크/설탕 케이스..각각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가지지 않는 공허의 탑. 뻔한 방식마저도 버거운 현실에서 찾아낸 궁여지책의 인상. 화구나 오븐이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닌가 파티셰가 걱정스럽기도 하다.
분명 어딘가 남는 자리가 있는 것 같은데.
총평: 콘티넨탈은 정말 한국적인 방식의 프렌치를 만든다. 어설프게 한국의 재료나 한국적인 것으로 서양인들이 판단하는 조리법을 우겨넣고 한국식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 요리 스타일을 반영한 진짜 한국식 프렌치다. 무언가 잘나가는 게 있다면 일단 차용하면서도 정작 레퍼런스의 핵심은 빠져있는 의아한 방식의 재현. 트러플과 캐비어의 지나친 반복에서 드러나는 물신숭배 정신. 럭셔리 하우스의 이름이나 하우스 패턴이 최대한 커다랗게 들어간 티셔츠로 무장한, 혹은 정장을 입어도 시계가 잘 보이도록 손목을 반 단 접는 그런 버릇이 있는 사람을 요리로 만든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그런 사람과 와인을 곁들여 식사를 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살면서 얼마나 많은 캐비어와 트러플, 그리고 미쉐린 스타를 먹어치웠는지를 말할 것이다.
분위기: 높은 층고와 풍성한 일조량을 덮는 아슬아슬한 테이블 간격.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면 모든 테이블에서 축하해줄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감. 실제로 축하 인사를 건네지는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서비스: 서비스에는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이 있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국내의 표준이 되고 있다. 음식에 대해 높임말을 쓸 정도지만 디테일은 착실하게 떨어진다. 그 때문에 주방을 오가는 일이 잦고 고정된 역할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곧바로 위기에 빠진다. 이런 공간에는 붙잡고 대접을 바라는 유형의 고객도 있으므로 안타깝다고 생각은 하지만 자연스러움이 지나치게 떨어진다. 흔히 서비스 교육이나 평가에서 가르키듯이, 서비스 제공자라도 개방형 질문이나 개인화된 대화를 통해 인간적인 관계를 쌓는 척을 해야 하는데 콘티넨탈의 서버는 차라리 종이 되면 되었지 같은 인간이 되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듯 보인다. 물론 나는 그들을 종으로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으므로, 대화는 단편적인 것으로 머무른다.
가격: KRW 300,000 단일 메뉴. 음료 포함시 인당 KRW 500,000 내외.
음료: 애호가들이 높이 평가하는 생산자보다는 일반적인 명성이 있는 생산자에 치중하겠다는 전략적 선택. 분배가 고른 것 같지만 보르도, 신대륙 속의 보르도, 이탈리아의 보르도로 지향하는 방향이 명확하다.
- https://www.shilla.net/seoul/dining/viewDining.do?contId=F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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