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getable Simple, Random House, 2021
요리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읽지만 정말 써있는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실버 스푼」의 치킨 디아볼라나 프리타타같은 요리들은 정말 피와 살이 되는 반면, 패스트리나 창작에 가까운 요리들은 따라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들도 많다.
「Vegetable Simple」은 그중 완전한 전자에 가깝다. 간만에 기꺼이 따라하고 싶고, 또 따라하기 위해 만들어진 요리책을 집어든 셈이다. 사실 소식을 접하고 계속 기다렸다. 단지 미슐랭 별 셋의 셰프의 책이니까? 그런 것들중에 쳐다보지도 않은 것들은 산더미처럼 쌓였다. 「Bau」 연작은 비싼 가격에 불구하고 독일어라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두 가지가 나를 매혹했다. 첫째로, 역시 따라할 수 있는 요리들을 통해 저자의 생각에 닿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통로가 바로 땅에서 나는 것들에 있다는 점이다.
서문에서도 밝히듯, 「Le Bernardin」도, 리퍼트 본인도 야채를 처음부터 주목해온 요리사는 아니다. 그는 르 베르나르댕의 선대 셰프로부터 찬란한 대서양의 자원들을 창작해야할 의무를 계승받은 후계자였고, 그 작업을 위대하게 완성했다. 물론 우리는 좌에는 광둥요리, 우에는 쿄료리를 이웃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들의 생선 요리를 단지 비웃음의 대상 정도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비웃는 사이 그들은 세상을 바꾸어왔다. 생선과 해산물을 동시에 내는 "서프 앤 터프"는 여전히 그들의 코스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고 있으며, 아시아의 높은 수준의 생선 이해도를 유감없이 받아들여 세비체가 아닌 사시미를 종종 만날 수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이 되었다.
그런 그의 책을 집어들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아스파라거스, 그 다음은 당근이다. 며칠 전 나를 새삼스래 슬프게 했던 당근이 떠올랐다. 좋은 당근이라도 해도 풍미라고는 짙은 단맛뿐인 당근이 최선이지만, 그마저도 엷을 때는 정말이지 눈물이 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니가 아직 당근을 진지하게 요리해보지 않은 거야. 저자는 말하고 있다. 수십 년의 세월동안 대서양에서 낚을 수 있는 것들은 다 낚아본 셰프가 이제는 드넓은 미국의 토양으로 눈을 옮겼다. 과연 우리는 야채를 얼마나 맛있게 먹고 있을까? 그것의 맛을 얼마나 표현해보았을까?
아직 야채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지는 저자는 "내가 모든 것을 알려주마"같은 방식대신, 처음으로 야채의 맛에 매혹되었던 자신의 과거를 우리에게 다시 돌려주고자 한다. 정말 이해하기 쉽고 익숙한 야채 요리가 진정으로 맛있을 때, 그에 대한 태도는 영원히 달라질 수 있다. 그에게는 감자 그라탕이 그랬다면, 내게는 어릴 적의 시금치 무침이 기억에 떠오른다. 짙은 참기름향때문에 다른 쓴 나물들을 제치고 내 젓가락의 표적이 되었던 시금치, 하지만 한겨울의 시금치는 그 쓴맛마저도 좋을 단맛이 있었다. 참기름향은 더 이상 나지 않았도 좋았다. 이런 기억이 있다면 앞으로 모든 시금치가 나를 배신하더라도 나는 끊을 수가 없다. 땅에 자라는 것들에게는 모두 그런 힘이 있으리라 우리는 믿는다.
따라서 이 책의 레시피들은 전채부터 미냐디스에 이르는 그가 기존에 봉사하던 틀에 엄격히 구속되는 대신, 레시피를 활용해보고 나누어 먹는 즐거움 이외의 영역을 마음껏 풀어놓는다. 단지 프랑스식 요리에 구속되지도 않는다. 동아시아의 채소인 배추와 표고버섯에 양파를 다져 소를 만드는 야채 만두나 살짝 양념을 입혀 팬에 부쳐낸 표고버섯과 같은 요리는 이 책의 이전에도 기꺼이 우리가 먹고 살았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고, 만두를 빚는 고생은 해본 적이 없더라도 잘 소테한 표고버섯에 소금간만 치더라도 훌륭한 밥반찬이 되는 경험은 집구석 요리사에게는 한 번쯤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는 우리에게 약간 더의 상상력을 더해준다. 나는 표고에 소금에 종종 올리브유 정도를 곁들여 보았지만, 이제는 에릭 리퍼트 덕에 버섯에 에르브 드 프로방스와 스리라차를 살짝 더해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수십 년동안 뉴욕의 가장 화려한 주방에서 근무한 셰프의 책인만큼 국내의 사정에 맞지 않는 레시피들도 썩 있다. 일단 플랜틴 바나나같은건 아예 없고, 절정을 맞기 시작했을 모렐 요리같은 것은 레스토랑에 재료를 대는 업체들에 연락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레시피들이 전체적으로 어렵지 않은 가운데, 일상적인 것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연출되니 조용한 책에서 박진감마저 느낀다. 습관적으로 간장과 말린 멸치를 곁들여 졸였던 꽈리고추를 소금간만 더해 볶아내 고추의 숨은 단맛을 느끼자는 레시피, 가지튀김의 부흥 이후 다시 멸망해버린 가지 다양성의 부재에 호흡을 불어넣을 후추를 곁들인au poivre 가지 스테이크. 물론 이런 재료 본연의 맛에 의존하는 레시피일수록 솜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리긴 하겠지만, 나는 그가 채소를 조명하는 방식 자체가 너무 재밌다. 전채라고 부르기도 뭣한 간식인 팝콘부터 디저트, 심지어 음료까지 채소가 풍미의 중심이 되고, 그것을 잘 살리기 위한 요리의 모습은 어때야 할까? 그 고민의 배에 나는 기꺼이 탑승하고 싶다. 서문에서 밝히듯, 야채의 맛을 찾고 밝혀내는 것은 단지 "열정적인 식도락가"로서의 실천이다. 마침 서울은 딱 생선에 있어서는 썩 좋은 도시여서, 허무한 비용만 치르면 기가막힌 물고기 요리를 내놓을 식당이 즐비하다. 그 사이에서 내 냉장고에서라도 채소를 주인공으로 밝혀보는 것도 가능할까. 언젠가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내지 않아도 웃으면서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꿈을 에릭 리퍼트로부터 이어받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