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ña Pargua, Pargua, 2013
발레 델 마이포Valle del Maipo, 우리말로는 Maipo 동산이나 언덕은 칠레의 와인을 논할 때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포라는 이름이 언제, 누구에 의해 붙었는지는 알 길이 잘 없지만 양조용 포도의 재배역사는 잘 기록되어 있는데, 칠레의 경제가 성장하며 프랑스 와인의 맛을 본격적으로 탐내기 시작한 19세기 중후반 이후부터다. 곧 몇몇 중요한 와이너리가 수도였던 산티아고 근처에서 프랑스식으로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었고, 그렇게 마이포는 칠레 와인의 심장부로 발돋움한다.
구체적으로 마이포는 다시 마이포 알토와 마이포 메디오, 마이포 바조로 세분화되고, 마이포 알토는 다시 7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그중 파르구아는 Huelquén에 위치하여, 마이포 지역의 포도밭의 젖줄과도 같은 마이포 강에서는 꽤나 떨어져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발레 델 마이포의 자랑은 포도가 맛을 맺는 여름은 건조하고도 뜨거우며, 수확기인 봄에는 서늘해진다는 데 있다. 바위투성이인 경사면은 양조용 포도가 진하게 맛을 맺기 좋은 환경으로 보르도를 빼다 박기 시작하여 까베르네 소비뇽, 메를로와 쁘띠 베르도가 재배된다. 20세기 말 필록세라로 인해 구대륙에서는 절멸한 까르메네르가 칠레에서 재배되던 메를로의 본명임이 알려지며 까르메네르도 마이포를 대표하는 품종으로 자리잡았다. 보르도 품종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피라진의 향이 독특하게 강한 까르미네르는 조금이라도 기온이 서늘한 빈티지에서는 그야말로 특유의 풀향기, 오래된 아스파라거스나 익은 피망과 같은 향을 폭발시켜 칠레 와인의 상징과 같은 내음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 고향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생각해보면 현재 만날 수 있는 칠레 와인이 보르도의 옛 그림자처럼 생겼다고 감히 주장하는 이들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파르구아는 이러한 칠레 와인의 전형이면서, 그야말로 RP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는 와인을 만드는데, 사실 양조자부터 생테밀리옹에서 일하던 양조자를 초빙하여 생산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보르도스럽다. 양조 과정에서 시라와 까르메네르가 축차로 투입되어 배합되는 과정을 거치지만 양조 단계에 들어서면 이들은 배제하고 까베르네 소비뇽 85%, 까베르네 프랑 10%에 메를로 4%, 쁘띠 베르도를 1%로 배합하였다. 오크통 또한 프랑스 중부에서 제작한 수입품으로 프렌치 오크를 60%는 새 것, 40%는 재탕으로 경제적인 면모또한 고려하여 18개월 숙성한다.
파르구아는 칠레 와인 특유의 잎이나 녹색 채소의 향을 크게 절제하였고, 짙은 블랙커런트의 향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까베르네 소비뇽의 두터운 검정이다. 시음적기의 끝을 달려 구조가 좋은 가운데 고민에 빠지게 하는 것은 탄닌계의 빈 자리였다. 파르구아는 나름 '컬트'를 표방하는, 소량 생산품이지만 짙은 담배향과 쁘띠 베르도에서 느껴지는 가죽향 등은 새롭다기 보다는 의문스러웠다. 좋다, 좋은데, 그렇다면 칠레일 이유가 있을까? 칠레에서야 이유가 되겠지만 프랑스도 칠레도 아닌 이곳에서는 글쎄다. 그래도 사라지기는 힘든 녹색 채소의 느낌과 살짝의 흰 꽃과 같은 향이 복잡함을 꽤나 갖춘 와인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이러한 사업의 방향성에 대해 묻고 싶다. 칠레라는 땅을 이렇게 사용하면 올바른 것일까. 탐닉하기에는 이곳은 보르도가 아니었다. 마이포 강 최상류에서 진행되고 있는 댐 건설은 아직 지지부진하지만 완공된 순간 남미 최대의 수력발전시설로 마이포 강의 생태계는 필연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른 보르도를 찾아 떠나고 말까? 마이포 강 유역이 차지하는 칠레 경제에서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와인 산업을 붕괴시키거나, 칠레 와인의 "보르도맛"을 댐이 해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반복되고 있다. 신대륙의 어딘가는 "보르도"같아서 와인 산지로 주목받고 세월을 거쳐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몇몇 유명 생산자가 우리 땅에도 수입된다. 시간이 지나며 환경도, 생산자도 변하고 가끔은 엉성한 보르도를 만나고 우리는 실망한다. 보르도라는 이름의 가치는 철옹성같아서 몇몇 후진 빈티지나 생산자는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가운데 세계 각지를 전시한 것 같은 와인샵의 셀러는 사실 덜 보르도, 더 보르도의 문제만이 남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그런가? 그렇다면 그 대답으로 이탈리아를 제시해야 할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알 것으로 믿는다. 그를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소비하는 이들은 항상 왜 이런 것을 원하는 지 모르겠다. 이런 우리의 마음이 RP를 낳았다. 물론 엉망같은 평가로 우리를 기만해왔던 와인 산업이 낳았다고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RP의 시대가 저물고 마주한 세상은 다소 불유쾌하다.